좋은 말씀/카이퍼

제 50장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새벽지기1 2021. 9. 24. 06:13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는 또 한 가지 길이 있다. 이것은 매우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는 길이다. 그 길이란, 죄의 깊은 골짜기를 지나가는 것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는 두려운 길을 뜻한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생각하고 있는 바를 예수님의 이 한 마디가 즉각 설명해 줄 수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바리새인 시몬에게 하신 말씀이다. "사함을 받는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이 말씀으로써 예수님은 두 사람이 마주 대하도록 하신다. 한편에는 나인 성의 가장 명예로운 시민이요 집주인인 시몬이 있고, 다른 편에는 이 작은 성읍에서 공공연한 죄인으로 평판이 아주 나쁜 여자가 있다. 사실 상황이 이러했다. 그 여자는 더 많은 죄를 지었으므로 더 많이 용서함을 받았고, 그 결과 그 여자는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한 것이다. 반면에 죄를 덜 지은, 덕행이 높은 시몬은 적게 용서를 받았고 그 결과 예수님을 적게 사랑한 것이다.

자, 이렇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생생한 하나님의 지식을 일으키는 지극히 풍성한 원천 가운데 하나라면, 죄의 깊은 골짜기를 지나가는 길이 공공연한 죄인인 이 여자에게는 결과적으로 많은 사함을 받게 되는 길이었고, 더 깊고 풍성한 하나님의 지식에 도달하는 수단이 된 것이다.

 

책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지식을 추구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이 지식을 경험할 수 없고 예수님의 강력한 이 말씀을 결코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의해 가장 효과적으로 길러지고 전달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아는 사람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는다. 그렇지만 그 말씀 앞에서 몸을 떤다. 죄의 어두운 성격은 거룩함과 뚜렷이 대비된다. 그래서 한 동안 영혼은, 죄의 어두운 길이 어떻게 하나님께 대한 더 풍성한 지식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를 해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더 풍부한 지식에 이르는 이 방식에 대해 우리는 좀 더 겸손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 우리들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이 말씀을 때로 사탄적으로 악용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나는 영광스럽게 죄를 지었고, 그래서 그 다음에는 은혜를 발견하는 복된 시간을 가졌다”고 은근히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 이 방식을 들을 때 물리쳐 버리게 된다. 그런 마귀적인 발언은 우리 하나님의 자비를 비방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끔찍하게 악용하는 것을 보고서 지극히 조심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럴지라도 이 말씀에서 번쩍이는 하늘의 보화를 묻어 두어서는 안 된다.

 

죄가 많으면 사함이 많고 그것은 더 많은 사랑에 이르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한 더 풍성한 지식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참말이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받은 더할 수 없이 큰 복과 예수께서 그가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약속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하는 것은 이 말씀뿐이다. 그것은 다윗이 시편 130:4에 쓴 것과 근본적으로 같다.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네가 주를 경외한다면 주께 사유하심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사랑으로 신실하게 주님을 봉사하는 것은 죄에 대한 사유하심으로부터 생긴다. 죄, 사유하심, 사랑, 그리고 이 사랑에서 나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이것은 거룩한 한 줄에 꿰어 있는 네 개의 구슬이다. 사실 복음 전체는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 근거하고 있고, 또 옛적 믿음의 영웅인 어거스틴의 외침, 펠릭스 쿨파(Felix culp: '복된 죄여" 라는 라틴어 -역자주) 곧 "타락에는 영광스런 것이 있다”는 말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으로서는 결코 생각해낼 수 없는 말이다.

 

하나님의 천사들은 죄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유 하심도 알지 못하고, 따라서 그들은 사유함으로부터 생기는 친밀한 사랑을 알지 못한다. 천사들은 이같이 더 친밀한 애정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에 대한 풍성한 지식도 갖지 못한다. 천사들은 이런 일에 외인으로 서있다. 그래서 사도는 이 신비에 관해 천사들이, 말하자면 질투할 정도로 "살펴보기를"(벧전 1:12) 원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 대한 계시가 속죄의 위대한 사역에서 나타날 때 낙원에서 이루어진 첫 계시보다 훨씬 더 풍성하고 친밀하고 현저한 것은 확실하다. 죄인에 대한 우리 하나님의 은혜, 자비, 동정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는데, 죄를 떠나서는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는 하나님의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다른 모든 지식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리고 성경에서, 아들 하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심은 오직 죄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일이다.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 가운데서 누구든지 깊은 감동을 받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한 말은, 모두 여호와의 남녀 종들 이 죄 씻음을 받고 자신들의 비참함에서 구원받았다는 마음의 감격적인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죄가 세상을 삼켜 버리지 않았다면, 이러한 화해와 성화, 비참함으로부터 구원을 생각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러분이 개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보는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은 구속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보이는 애정 어린 헌신과 다르다는 사실을 지금도 종종 보게 된다. 그것은 개심하지 않은 자들이 자신들의 죄를 전혀 생각지 않지만, 구속받은 자들은 죄에 대한 이런 지식으로부터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언제나 자신들의 잃어버린 지위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출발한 다는점에서 다르다.

 

하나님의 천사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죄와 상관 없이 지극히 순수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천사들의 사랑이 아무리 영광스러울지라도 그것은 구속받은 죄인이 구주 하나님에 대해 갖는 사랑과는 다르고 그 보다는 덜하다.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계시가 나타났을까 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즉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에 대한 풍부한 지식은 우리에게 최고의 지식이며, 하나님에 대한 이 최고의 지식은 죄와 비참함으로 낙원이 파멸되었다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개인의 경우에 적용되는 사실이다. 특별히 요즘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한 지식을 별로 생각지 않는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양육되었고, 공공연히 죄를 짓는 일올 하지 않았다. 그래서 죄가 그들에게 아무 짐이 되지 않는다. 그 결과, 그들 사이에 화해의 필요성에 대한 의식이 많이 사라졌다. 십자가가 그들에게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끼친다. 그들에게 기독교 신앙은 높은 이상과 선한 활동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태도가 낳은 슬픈 결과는 이들이 하나님에 대한 친밀하고 소중히 여기는 신비한 사랑을 점점 잃게 되는 것이고,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고 하는 행복한 상태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의 엄한 요구를 예민하게 의식해서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범죄할 자유를 주셨기 때문이든지 간에 죄에 대한 지식에 깊이 들어간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가던 길을 멈추게 되었고, 그들 속에서 뜨겁게 화해를 갈망하는 욕구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이제 이들은 구주에게서 이 화해를 발견하였고, 그 영혼이 주님의 긍홀에 대한 찬양과 경배로 뜨거워진다. 그들은 하나님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자비로 인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그들 속에서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가 더 큼에 따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과 더 풍성한 교제를 갖게 되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에 대해서도 더 풍성한 지식을 갖게 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 언제나 더욱 극악한 죄를 지을 필요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일반적인 죄라도 그것을 보는 더 깊은 통찰이 화해를 갈망하는 불같은 소원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럴지라도, 모든 사도들 가운데서 바울 사도가 구원받은 자들의 이 사랑을 가장 열렬하게 자랑한 것은 순전히 그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자신을 죄인 가운데 괴수로 느낀 때문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죄에 깊이 빠졌다가 진정으로 그리고 철저히 회심하였을 때, 화해에 대한 갈망과 이에 대한 깊은 감사에서 나오는 사랑이 그 안에서 강렬하게 일어나 다른 사람들을 놀라운 온기로 아주 유익한 영향을 끼치고, 때로 심지어는 그의 내적 생활 속에 있는 온기를 부러워하여 그를 시기할 만큼 된다는 것도 여전히 사실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 은혜를 받기 위해 죄를 지어야 하고, 죄를 지으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지식이 더 늘어날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질문 자체가 마귀적이다. 그 질문을 꺼내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공공연히 모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자녀는 각각 자기 마음의 죄 됨에 대한 지식을 더 깊게 이해하고, 자신의 은밀한 죄를 못 본 척 넘기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 또 때때로 자기 마음의 모든 죄에 대해 다시 풍성한 속죄를 적용하고, 그렇게 함으로 사유하심이 얼마나 끝없이 필요하고 또 자신이 얼마나 끝없이 용서받는가를 더욱 더 예민하게 느끼게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한 가지는 자신의 죄를 지극히 적은 것으로 생각하고 죄의 책임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화를 내고, 자신이 많은 죄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는 꼿꼿이 서서 자신을 성도로 생각한다. 자, 이것은 사람의 죄를 덮어 가리는 방법이다. 화해를 갈망하는 것도 아니고 화해와 사랑에 감사하는 것도 아니며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는 여전히 아주 멀리 있다. 
 
그러나 또 다른 길이 있는데, 곧 겸손한 방법이다. 이 길에서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을 믿지 않는다. 누군가가 자신의 죄를 지적해 주면 감사하고, 자신의 마음을 훨씬 더 면밀하게 살피되 자기 영혼의 과거와 현재 상태를 살핀다. 그래서 여기에는 때때로. 화해의 필요가 새로 생기고, 받은 사유함에 대한 기쁨도 새로 생기며, 자비하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더욱 생기고, 그래서 구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더욱더 깊게 이해하게 된다. 
 

그 다음에 이 이상의 것이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리새인 시몬을 본받아 스스로를 의인으로 간주하는 사람은 예수께서 죄인의 편을 드는 것이 견딜 수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에는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에게 보인 동정이 들어설 여지가 전혀 없다. 
 

반면에 자신의 죄에 대해 더 깊은 지식을 갖게 되면, 여러분은 자신이 하찮다고 느끼지만 매일 화해의 잔으로부터 새로운 한 모금을 마심으로 기운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죄인 하나에 대해 갖는 기쁨, 곧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아홉에 대한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마음에 일어나게 된다. 결국 이것이 복음이다! 


출처 자기부인 / 바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