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카이퍼

제 52장 하나님이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

새벽지기1 2021. 9. 26. 08:10

하나님과 함께 지내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는 사람들의 수가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고 할 만큼 소수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과 은밀히 만나는 이 실제적인 생활은 그만 둔 채로 사람들은 기도하고, 교회에 출석하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을 계속할 수가 있다. 사람들이 갖가지 환경과 기회에 수많은 기도를 드리는데, 영혼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고 하나님께서도 영혼에게 나타나시지 않는 기도를 드린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교회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데,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 적도 없고 하나님을 만난 적도 없이 그 일을 되풀이 한다. 성례가 시행되고 설교가 전해지는 가운데, 마음이 하나님의 일들을 대하고 있었을지라도 마음이 스스로 하나님을 만나 대화를 나눈 것은 아니다. 선한 행실에 대해서는, 하루 종일 선행을 하면서도 선행을 하도록 마음을 감화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지 않을 수가 있다는 것은거의 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일 것이다. 

아, 이렇게 실생활에서 하나님을 부지런히 만나는 일이 그토록 적다. 그동안 우리는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서 살고 선한 행실을 하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신자들만을 고려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쁜 의미에서 세속적이지 않고 진지하게 사고하려고 하고 덕을 존중하며 고상한 이상에 열광하지만 종교는 한 쪽으로 제쳐두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한번 생각해 보자. 여러분은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고결한 최고의 사람들에게서조차 하나님과 대화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는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순전히 일을 위해 살고, 일이 끝나면 쾌락을 위해 사는 사람들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과 대화하며 지낸다는 그런 일이 그들에게는 이제는 더 이상 없다는 사실에 여러분은 충격을 받지 않는가? 사회에서 대놓고 악하고 불경건하게 지내는 집단과, 또 이들과 함께 좀 더 고상한 모든 관심사에 무관심한 사람들은 물론 여기서 제외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생활에 지극히 적은 시간 밖에 내지 않는 사람들의 수도 통탄할 정도로 적다는 사실은 충분히 증명된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 사실이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는 참으로 고통스러우실 것이라고 느낀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하나님을 알고 보답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있는 능력을 세상에 주셨다. 세상에서 적은 무리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산다. 그리고 세례를 받고 사는 이 적은 무리 가운데서 하나님께 마음과 영혼을 돌리고 하나님과 은밀히 교제하는 일을 경험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그 수도 나날이 갈수록 적어진다.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그 일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에는 다른 일들이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의 이름과 그 존재를 아는 지식을 그들은 멸시한다. 그러나 성경에 따를 때 확실한 사실은 이것이다. 즉 조만간 하나님께서 강제로 각 사람으로 하여금 홀로 하나님을 대하도록,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 대하도록 만드실 때가 모든 사람에게 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위한 날을 정해두셨다. 이 날이 오면, 그 날에는 누가 되었든지 하나님 앞에 나타나야 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위엄으로 압도하며 온통 사로잡을 것이므로, 그는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날은 심판의 날이다. 이 심판의 날을 묘사하는 일에서, 예술이 많은 해를 끼쳤다. 예술은 보이는 형태를 통해서 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표현을 위해 예술은 세상 법정으로부터 그 재료와 모양을 빌려와서, 지금까지 세상에 살았던 수백만, 수천만의 모든 사람들을 피고인들로 하나님의 거록한 법정 앞에 세웠다. 예술은 연필이나 붓으로 장엄하게 표현하는 것외에 달리 어떤 것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영적인 의미가 담긴 것이 외적으로 표현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심판에서 이 영적 활동은 그림으로 표현될 수 없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불신앙이 들어오고 심판의 날이 정해졌다는 것이 부인되었을 때, 예술은 그것을 외적으로 표현하여 그 문제 자체를 조롱하고, 그 일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기회로 삼았다. 이 수백만, 수천 만의 사람들이 서 있을 공간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단 한 사람의 일생에 대해 그의 말과 생각 하나하나에 대해 재판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려야 하겠는가? 하루 동안에 심판을 한다고 하는데, 단 한 가족을 심판하는데도 일년은 걸릴 것이라고 조롱한다. 

 

신앙고백서가 심판의 영적 성격을 생각하고서 그 날을 양심의 책들이 펼쳐지는 것으로 이야기했을 때, 좀 더 사실에 가까운 말을 한 것이다. 그와 같이 이해할 때, 심판이란 모든 사람의 전 생애를 한 번에 분명하게 조사하여 보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전체를 보는 것이다. 그 앞에서 우리는 매 순간 계산하지 않은 청구서를 가지고 셈할 뿐이다. 심판은 셈을 청산하는 일이다. 이 청구서에는 여러분이 하나님께 빚지고 있는 것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행실을 선악간에 따라 갚아야 할 것이 나란히 적혀 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바이다.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회계사라면 누구나 여기서 셈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셈하는 일에 어떤 것이 포함되는지를 다 안다. 즉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는 통틀어 설명과 증거를 첨부해서 하나님의 청구서를 우리에게 제시하실 것이고, 우리는 그 계산이 정확하고 옳다는 것을 양심으로 확신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전체 성적이 되고, 어렸을 때부터 시작된 우리 인생의 전체 이력서가 될 것이다. 갑작스럽게 우리 앞에 나타나지만 한 점 의심을 제기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한 이력서가 될 것이다.

오늘날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자동계산기에서는, 입력하는 아라비아 숫자는 무엇이든지 즉각 나타나 보이고, 더하기를 하면 덧셈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여러분의 삶을 나타내는 상이다. 인생 내내 날마다 나타난 숫자에 조금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사람은 심판의 날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전체 숫자를 보게 될 것이다. 전혀 생각지 않았고 흑은 그냥 잊고 지냈고, 거기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숫자를 보게 될 것이다. 그 숫자를 조사할 기회는 가질 수 있지만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 계산서에 실수가 있으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할 수가 없다. 양심의 빛이 갑작스럽게 환하게 밝아져 여러분 일생을 비추고 지나가면, 여러분은 하나님은 의로우시다고 인정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이 사실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염려도 하지 않는다. 세상 끝날은 그들에게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할 잔고부족을 보여 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그리스도의 속죄가 그들을 위해 서고, 모든 것을 덮어 준다. 그들의 재판장이 그들의 구주이시다. 그래서 저주에서 해방된 그들이 영원한 복락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서 죽은 자들에게는 이렇게 양심의 책이 펼쳐지는 것이 두려운 일이 될 것이다. 그때에는 그런 사람이 회개하기에는 너무 늦을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숨을 수 없고, 그리스도의 속죄에 참여할 수도 없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신의 죄책을 볼지라도 자신의 대변에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그는 자기 양심이 낭독하는 선고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실이 심판의 영원한 두려움이 될 것이다. 이 사실이 그의 가장 깊은 영혼 속에서 죽지도 않고 끊임없이 갉아먹는 벌레가 될 것이다. 이것이 그의 양심 속에서 결코 꺼지지 않은 불길이 될 것이다. 여기에 외적인 어떤 고문도 부가되지 않을 것이다. 속에 있는 불 자체가 영원한 형벌이고, 이같은 내적 자아의 소멸이 암처럼 그의 전 존재를 파되하며, 그의 전 생애와 전 존재를 타락시킬 것이다. 

 

이것이 이 땅에서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될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이 지식은 두 가지이다. 한편으로 이 땅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지식은 믿음을 통해서 온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니이다"(요 17: 3). 다른 한편으로, 죽음 뒤에, 심판 때에만 오는 하나님의 지식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영생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밖에 가져오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 혹은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혹은 하나님에 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을 함부로 하였다. 그러나 죽은 뒤에 사람들은 즉시 이렇게 무시한 하나님 앞에 서서, 모든 것에 미치는 하나님의 임재에 두려움을 느끼고, 숨으려고 해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벗어날 수가 없다. 이것이 심판의 끝은 아니다. 그 직후에 옛날 일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없었던 것처럼 다시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실제 심판의 때에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받은, 자기를 파괴하는 인상이 계속되고 다시는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마귀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잘 알고, 두려워 떤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와 같이 이생에서 하나님을 회피하고 산 사람들은 심판 때에 그리고 심판 후에 자신들이 잘못 생각했다는 두려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 눈앞에 펼쳐진 대로, 하나님께서 실제로 계시다는 것을 알고 그들도 두려워 떨 것이다. 

 

사람은 이생의 육신적인 일들의 휘장 뒤에서 그리고 세상적인 한계들의 안개 뒤에서, 마치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자신을 숨길 수 있고, 일부러 하나님을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죽음으로 끝이 난다. 그때는 이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지고, 안개들이 걷힌다. 그러면 모든 겉모습이 그치고, 주 하나님의 위엄이 나타나며 아주 찬란하게 계시 된다.

 

일생 동안 무시했던 하나님의 지식이 이때 자연히 나타나고, 망한 사람들에게 충만하게 몰려온다. 그러나 그것은 죄인을 거절하는 지식이다. 여러분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이끌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두려우심 앞에서 뒤로 물러나게 하는 지식이다. 여러분이 어디를 둘러볼지라도, 하나님의 위엄을 피하여 숨을 곳을 찾을 수가 없다. 그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여러분에게 기운을 북돋우고 소중히 품는 햇빛이 아니라 여러분을 태워 시들게 하는 햇빛이 된다. 

 

성경은 이것을 지옥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지옥이지만 하나님께서 거룩한 임재로 말미암아 생기는 지옥일 뿐이다. 하나님을 무효로 만들 수 있다면, 혹은 하나님에게서 물러날 수 있다면, 흑은 하나님에게서 숨을 수 있다면 지옥이 끝이 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끊임없이 여러분에 범람할 것이고, 그것이 여러분에게 영원한 죽음을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있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찾은 사람에게는 그 지식이 좋다. 죽은 후에, 이 지식으로 말미암아 그는 하나님의 자비를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심판 때 하나님을 처음으로 아는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에게 하나님을 아는 이 지식은 고문이 될 것이다. 

 

출처 자기부인 / 바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