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카이퍼

제 51장 내가 죄를 주께 인정하나이다

새벽지기1 2021. 9. 25. 07:07

죄인인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할 하나님의 뜻, 곧 결국에는 죄가 우리를 하나님에 대한 더 깊은 지식으로 인도하는 수단이 되지 않을 수 없고, 하나님의 위엄이 우리를 위해 더 밝게 빛나도록 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 무엇인지 깨닫기 어렵다. 
 

사탄과, 사람으로 죄짓도록 시험하는 사탄의 종자인 마귀들이 이 하나님의 뜻을 악용하고 하나님을 대항하여 죄와 종교를 뒤섞는 일을 할지라도, 그 때문에 이 뜻의 영광이 결코 어두워지지 않는다. 또한 만약에 먼저 사탄이 타락하고 그 뒤에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주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또 다른 길 곧 하나님의 이름과 존재에 대한 훨씬 더 친밀한 지식은 아닐지라도 마찬가지로 깊은 지식으로 우리를 인도할 또 다른 길을 열지 않으셨을 지에 대해서는 우리 중 아무도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을 돌아본다고 해서 우리가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가는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는 죄악된 세상에 죄 가운데서 태어났다. 우리는 이 죄악된 세상을 고려해야 한다. 이것이 현실이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악으로부터 선이 나오도록 하시고 심지어는 죄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자녀의 내적 인식 속에 하나님의 이름과 존재에 대한 지식을 풍성하게 하신다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순탄할 때의 하나님의 복과 곤경 때의 하나님의 도움보다 은혜, 동정, 자비가 하나님의 사랑의 더 깊은 면을 형성한다. 그렇지만 이 은혜와 동정에 대한 지식은 화해의 기쁨을 맛보았고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구속 받은 자 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만 알 수 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는 결코 알지 못한 하나님의 이름과 존재에 대한 지식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왔고, 골고다뿐 아니라 베들레헴도 오직 죄인들의 구원에서만 그 의미가 해명되었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죄로 말미암아 크게 풍성하게 되었다. 사도가 이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엡 1:19). '그리스도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그리스도의 부활과 믿는 자의 중생에서 우리에게 계시되었으니’’(개역개정은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 역자주). 

하나님의 위엄과 전능하심은 창조에서보다 재창조에서 더 크게 나타난다. 아무것도 없는데서 맨 처음 존재를 불러내신 일보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일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더 강력하게 나타난다. 죽음이 없었으면 부활이 없었을 것이고, 타락이 없었으면 재창조도 없었을 것이다. 타락과 죽음이 다같이 죄에서만 시작되므로, 우리가 죄인이 아니었더라면, 부활과 재창조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더 높은 이 계시가 이같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실이 함축하고 있는 바를 다 이해하려면, 우리는 한 걸음 더 내려가야 하고, 하나님의 손 안에서 죄가 하나님의 거록함에 대한 우리 의식을 더욱 예민하고 분명하게 만드는 수단이 된다는 점을 또한 깨달아야 한다. 물론 우리는 회개하지 않은 상태에서 여전히 죄의 길로 행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지금 생각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구속받은 자들, 곧 하나님을 아는 데서 영생을 발견한 사람들만 다룬다. 죄의 역사가 그들의 경우에 어떻게 진행되었고, 지금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여기서 두 부류의 사람을 따로 구별해야 한다. 아주 눈에 띄게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있고, 일반적인 죄의 생활의 범위 내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있다. 막달라 마리아와 살로메는 한 부류에 있을 수 없다. 주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는 구속주에게 끝까지 신실한 요한과는 전혀 다른 내적 갈등을 겪었다. 

아주 멀리 빗나갔다가 회개한 죄인이 일반적인 범위 안에 머물러 있던 죄인에게 때로 질투를 일으킬 수 있다. 전자는 마음에 훨씬 더 깊은 감동을 받고, 변화하는 과정에서 겪는 그 싸움도 그만큼 더 영웅적이다. 마침내 죄의 짐이 그의 어깨에서 벗겨질 때 은혜를 기뻐하는 그의 기쁨은 훨씬 더 풍성하다. 돌아오는 탕자는 집에 남아있던 아들에게는 없는 것이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온화하고 조용한 죄인은 은혜의 잔을 완전히 비울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술 취함, 부도덕, 부정직 같은 현저한 죄를 지은 사람은 이런 지나친 방탕을 자신의 실제적인 진정한 죄로 생각하고 그 뒤에 있는 자신의 죄 된 본성은 고려하지 않을 큰 위험이 있다.

그래서 죄악 된 행실에서 눈에 띄게 회심한 그런 죄인들이 실제로 그런 죄에서는 떠났지만 마음과 생활의 성화에서는 조금도 진보를 보이지 않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반면에, 사람들 보기에 비난할 만한 일이 없이 살던 사람이 회개한 후에는에 숨겨진 작은 죄도 아주 예민하게 보고, 그런 믿음의 결과로 아주 풍성한 기독교인의 생활을 드러내 보이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큰 죄로부터 돌이킨 사람은 일생 동안 계속해서 무거운 추만을 가지고 죄를 따지고, 별로 눈에 띠지 않는 죄에서 돌이킨 사람은 아주 작은 추를 가지고 죄를 따진다. 
 

이것이 모든 경우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큰 죄들로부터 계속 자유로워졌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자신들이 영광스런 기록을 가진 것으로만 생각을 해서 교만이나 조용한 이기심 같은 일반적인 죄들은 일생 끝까지 가져가며, 그런 죄들에 대해 한 번도 심각하게 투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슬프게도 그런 사람이 적지 않다. 
 
반면에, 좀 더 좁은 의미에서 구속받은 자들을 생각해 보자. 그는 죄에 대하여 양심이 매우 예민해서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것으로도 안심하지 못하고, 끝에 가서 때때로 하나님께 자신의 숨은 죄를 알려 주시고 그 죄들을 용서해 주시라고 기도한다. 이는, 우리 마음이 우리를 정죄하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며, 심지어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것들도 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에 대한 내적 갈등이 우리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나 어떤 정도로든 일어날 때는, 그것은 언제나 우리 양심의 고소와 함께 시작된다. 이 같은 양심의 불안 가운데서 우리를 되롭게 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 죄에 대해 우리를 신랄하게 비난하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이 사실은 아직까지 완전히 꺼지지 않은 양심을 가지고 시작하는 세상 사람들에게도 부분적으로 해당된다. 그들은 양심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목소리에서 그들의 육적 본성이 갈구하는 것에  대항하는 영적 본성의 저항을 듣고 계속해서 자유롭게 죄를 짓기 위해 양심을 마비 시킨다. 그렇지 않으면 그 소리에서 자신의 더 나은 자아의 충동을 보고서, 자신들이 고상한 삶을 살도록 훈련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태도의 결과 사회적으로 훌륭한 모습과 칭찬할 만한 자제심이 많이 나타나지만, 그들이 그 명예를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고, 하나님에게 돌리지 않는 한, 영생을 위한 열매는 맺지 못한다. 

그러나 구속받은 자들에게는 양심이 전혀 다르게 작용한다. 괴로운 양심이 그들에게 발휘하는 첫 번째 효과는 그들이 깜짝 놀라고, 자기들이 지은 죄에 화를 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소중한 것을 망쳐버리지 않았기를 바라며, 이제 하나님 앞에 당황하며 부끄러워하며 선다. 이것이 기도할 마음을 일으킨다. 그날의 염려와 수고 가운데서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죄를 반대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일과 일터에서는 그들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는 일이 워낙 많아서 그들은 그 생각을 쉽게 잊는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그들에게는 여전히 기도한다는 점이 있다. 하루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시점이 되면, 한 가지 장애가 있음을 안다. 자기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잘못된 것이 있어서 감히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없음을 느끼고, 기도를 잘 하지 못한다. 그리고 나서 결정의 순간이 온다. 그들이 기도를 그만 두면, 그들의 양심이 마취제를 마시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지 않으면 그들은 길을 잃고 만다. 

시편 32:2이 그 뒤에 따라오는 바를 기술하고 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그러나 다윗은 약해지지 않고 계속해서 싸워 나갔다. 그는 자신이 아무리 부끄러울지라도 자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시편 32:5에는 이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그 영혼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무릎을 꿇고 자기 죄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자 복이 온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32:6). 이같이 영혼이 통회하는 가운데, 과거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하나님의 거록하심을 깨닫는다. 더 이상 그것은 율법의 계명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추론한 하나님의 거록하심이 아니다. 계명의 정결함에 감탄하느라 잊어버린 거룩함이 아니다. 우리의 양심으로 우리를 맹렬히 공격하신 분은 바로 거룩한 하나님이셨다. 자신의 거록함에 따라 우리의 죄를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써 우리를 시험하고, 자기비난과 회개의 고통 속에서 그 거룩함을 맛보게 하신 분은 바로 거룩한 하나님 이셨다. 

이때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우리에게 빛으로 나타났고, 이 빛은 저절로 우리 죄의 그림자와 뚜렷하게 대조를 이룬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우리 죄로 인한 죽음에 대립하고, 생명을 소생시키는 활기찬 힘으로 우리에게 나타났다. 이 거록하심은 명확하고 구체적인 죄의 냉흑한 정죄 속에서, 우리를 위하는 명확하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우리가 이 거룩하심을 이같이 명확한 형태로 파악하고 나면, 이 거록하심은 우리에게 거록함의 무한한 영역을 밝혀 보여 주는데, 이 영역이 명확한 이 죄가 나은 우리 영혼의 어두운 배경을 덮는다. 

이 거록함이 단지 우리 위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굳게 결합되었다. 그래서 정죄 받은 우리 영혼이 거록하신 하나님과 직접 접촉하게 된 것이다. 이 하나님의 거록하심이 우리가 대하는 하나님의 생생하고 확실한 지식을 가져다 주었다. 죄가 두려운 것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더 잘 알게 만드셨다.

출처 자기부인 / 바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