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 저편에 있는 것을 아는 것과 관련해서, 죽는 순간은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죽거나 다른 사람이 죽는 방식도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에 기여를 한다. 보통 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많은 것들이 그때에는 사라진다. 그때에 사람은 보이지 않는 생명에 들어가는 입구에 선다. 그리고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시 122:2)는 시편 기자의 말은 또한 새 예루살렘의 문으로 들어가는 일에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죽는 것은 실제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여야 한다. 죽는 것은 하나의 행위이다. 태어날 때 사람은 수동적이다. 그 다음에야 삶이 시작된다. 그러나 끝이 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생을 떠나고 장차 올 생명에 들어가게 하시는 데서 완성의 때에 이르도록 특권을 주셨을 때, 하나님의 종들은 자신들의 뜻에 어긋나게 죽음에 끌려 나가지 않고 자발적으로 나가야 하고, 그같이 함으로써 자신들의 믿음의 수고의 열매를 나타내야 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고인을 옮길 때 찬송을 불렀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쳤다.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빌 1:21,23). 이와 같이 죽는 일은 마지막 싸움이었지만, 그것은 습격자인 죽음에 대항하여 자신의 생명을 방어하는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자기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기름으로 용감하게 앞으로 나간 영웅의 싸움이었다.
참으로, 우리는 죽음을 요구할 수 없다. 죽는 그 순간까지 생명을 조심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다. 자살은 죽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없애버리는 것, 곧 자신을 파멸시키는 행위이다. 죽는 것은 용기를 나타내는 일이다. 자살은 비겁한 일이고, 항복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수행해야 하는 삶의 투쟁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대열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회망과 기회가 있는 한, 하나님께서 오라고 부르실 때까지는 이 땅에서 하나님께 대한 봉사를 연장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시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는 슬픈 한숨보다는 거룩한 기쁨의 미소를 짓는 것이 더 적합한 일이다. 믿는 사람은 자기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자신의 고향은 하늘에 있다는 것을 언제나 고백한 사람이다. 죽는 일이 일어난다는 의미는 이것이다. 죽을 때, 믿음으로 행한 우리의 모든 삶에 도장이 찍혀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죽는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다.
죽음이 행위가 아니라면 그렇게 될 수가 없다. 우리는 죽음에 따라잡혀 목숨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같이 대답해야 한다. "보십시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며,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이 어둠속을 지나 빛으로 데려가신다는 것을 알므로 이제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를 용감하게 들어가고, 골짜기를 끝까지 지나가겠나이다."
그렇지만, 그런 이상적인 죽음이 자주 있는 것이 아님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의 고통과 슬픔이 죽음에서 이상적인 모습과, 죽음의 고귀하고 거룩한 성격을 빼앗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혼수상태가 끼어드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그렇게 되면 죽음이 자발적이고 의식적인 영혼의 행위가 될 가능성은 없다. 심지어 진정제를 투여하면 죽음이 잠자듯이 조용히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 당사자 자신이 책임 있는 결정을 할 수 없는 한, 하나님의 자녀의 입장에서 그처럼 남자답게 죽을 수없는 일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이 일에서 최고의 결정권자는 하나님이시다. 사실, 주님께서는 그처럼 믿음을 보이며 영웅적으로 죽는 일을 허락지 않으시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다만 이 문제에 어쩔 수 없이 동의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경은 언제나 감상적인 면을 피한다. 그래서 죽음에 관해서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사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골고다에서 죽으신 것과 야곱의 죽음에 대해서만 개략적으로 기술한다. 그런데 야곱에 대해서는, 그가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고서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다"(히 11:21, 개역개정에는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라는 말이 없음 - 역자주)는 말을 듣는다.
야곱은 힘을 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약함과 고통에 무너지도록 허락지 않았다는 것이다. 야곱은 죽으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약함과 고통에 맞서 싸우고, 자신을 추스르며 스러져가는 마지막 힘을 끌어 모았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마지막 숨을 내쉬는 것에 대해 전혀 생각지 않았다. 심지어 자기 아들들에게 축복할 때에도, 그것은 단지 가족적인 일이 아니다. 다 같이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들이 될 자기 아들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올지, 그 나라가 어떻게 번성하고, 어느 날 메시야가 오실 지에 대해 거룩한 예언을 한 것이다. '실로가 오시기까지’’(창 49:10). 이것이 그의 예언의 정점이었다. 그는 자기 아들들에게 복을 빌지만, 그의 아들들 안에서 그리고 아들들을 통해서 그의 예언은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에서는 이것이 야곱의 지극히 위대한 믿음의 행위로 기술된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경배하였으며." 죽을 때 어둠이 영혼을 감쌀 수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사탄이 우리가 죽는 시간에 풀려나서 우리를 괴롭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체로, 삶은 우리의 믿음을 확신하기 위해 존재하고, 우리가 죽을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이 믿음의 확신에 대한 열매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죽을 때, 사람이 고통과 약함에 수동적으로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죽을 때, 의지와 용기, 믿음의 회복하는 힘을 발휘하여 육신의 약함에 맞서 계속해서 싸워야 한다. 이 거룩한 순간에, 육신이 아니라 영혼이 이겨야 한다. 야곱이 한 일이 이것이다. 야곱은 경건하게 죽기 위해서 힘을 냈다. 이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필시 그는 의식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가버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의 강한 영이 스스로를 흔들어 깨웠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죽을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렸다.
그 죽음은 지금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본보기로서 수용된다. 그러나 그런 죽음에는 또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다. 죽음 전에 이 만남은 죽는 사람과 임종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사람이 조용히 평화스럽게 잠드는 것을 가장 바람직하게 죽는 방식이라고 흔히들 말하는데, 사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지적인 표시를 전혀 보이지 않은 채 사람이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죽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은 불신자들에게도 똑같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예수 없이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이 조용히 그리고 평온한 가운데 죽었다, 어쩌면 많은 하나님의 자녀보다 염려와 의심의 고통을 덜 겪은 채 죽었다고 하는 말을 듣는다.
그들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였다. 그들 스스로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의사는 계속해서 그들에게 일이 심각한 것이 아니라고 안심시켰다. 이렇게 해서 죽음의 공포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 채 죽음이 일반적인 방식으로 삶 가운데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서, 결국 죽음이란 아무것도 아니고, 죽음은 아주 조용하고 유순한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 다음에는 꽃들이 관위에 놓여진다. 그 다음에는 의례히 사람들의 조문이 이어지는데, 아무도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장례 후에는, 다시 온갖 이야기를 떠들어대지만, 영원한 것을 다루는 이야기는 제외된다. 이와 같이 죽음에 대한 큰 교훈이 아무 쓸데없게 된다. 죽음이 더 이상 깊고 진지한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목인해서는 안 되는 악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세상 방식을 본 따서 죽은 자들에 대해 "조용하고 평은하게' 갔다고 말할 때, 우리가 바로 그런 일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서 임종은 조용하고 평은하게 가는 것이 아니라 구주 안에서 싸우고 정복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 사실을 직면하려 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환자가 마지막에 아주 진지하고 고통스러운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는 일에만 신경 쓰는 사람은 자비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불신앙으로 잔인한 일을 하는 것이다. 죽을때 야곱은 경배를 하였다. 죽음을 맞이할 때 사람은 기도할 수 있다. 마지막 싸움을 위해 도움을 구해야 한다. 자기에 속한 사람들, 두고 떠나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임종 때 드리는 그런 기도는, 사람이 이같이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얼굴 앞에 나타나면 모든 휘장이 사라지고, 영원한 빛의 궁전에서 자기를 기다리는 하나님께 마지막 탄원을 보낸다는 점에서 언제나 영광스럽다. 그런 기도는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도하기를 가르친다. 그런 기도는 매우 강력한 설득력을 갖는다. 그렇지만 야곱은 그 이상의 일을 하였다.
죽을 때 그는 경배하였다. 죽음에 이르러서, 야곱은 자기 하나님께 예배의 제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음을 느꼈다.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와 영예를 드리기 위해, 자기 하나님의 크심과 위엄에,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몰입하기 위해, 그리고 일생 동안 할 수 있었던 것보다 나은 방식으로 하나님께 입술의 열매를 드리기 위해 예배의 제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임종시에 드리는 그같이 엄숙한 예배는 우리가 일생 동안 드려왔던 예배의 요약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천사들과 하늘에 있는 성도들 가운데서 하나님께 크고 영광스러운 이름의 명예를 돌려드리기 직전인 임종 때만큼 예배드릴 필요를 강력하게 느끼는 때는 없을 것이다.
임종 때 드리는 그런 예배에서, 그전까지 습득했던 모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응집되고, 그런 순간에 하나님에 대한 이 지식이 놀라을 정도로 밝아지고 풍성하고 깊어진다. 이때, 지금까지 알아왔던 것보다 더 분명하게 하나님을 알게 된다. 그것은 거의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하나님을 보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 예배로부터, 병상에서 시중들고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복된 결과가 온다. 임종시에 사랑하는 마음이 강렬하게 일어난다. 슬픔의 고통이 이미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며, 이로 인해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감수성이 예민해지게 된다. 이런 순간에 마음이 받아들이는 인상은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알고 신뢰한다. 그러나 믿는다는 증거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편협한 태도와 죄에서 그 반대의 면을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이 왔을 때, 아이들은 아버지에게서, 남편은 아내에게서, 이 애처로운 순간에 믿음이 쇠약해지지 않고 그대로 있으며, 영원의 문 앞에서 믿음의 말이 더 활기차고 강렬해지는 것을 본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하나님을 따라 나가는, 죽어가는 자의 영혼에서 나오는 발언을 듣는 것 같다. 이 순간에 죽어가는 자가 임종시 예배에서 드리는 기도와 간구를 통해, 여러분은 하나님의 존전 앞에 서게 되고, 하나님의 임재를 과거 그 어느 때보다 가깝게 느끼게 된다.
삶이 달랐다면, 죽어가는 것은 보통의 죽음과는 전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믿음이 더욱 효과적으로 깨어날 것이다. 그래서 죽어갈 때,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과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행해야 할 의무가 자기에게 여전히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때, 죽음은 보통의 죽음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것이다. 거룩한 진실을 전하는 일을 할 것이다. 그래서 그 죽음의 열매는 뒤에 남은 사람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하는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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