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이 금식은 행하지 않으면서, 자발적으로 성경을 따라 사는 것을 믿음과 생활의 유일한 준칙이라고 쉽게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이다. 금식은 구약에서만이 아니라 신약에서도 성경적인 생활의 규칙인 것이 분명하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십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셨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기도뿐만 아니라 금식에도 전념하라고 권면한다(7:5, 흠정역 성경은 "ye may give yourselves to fasting and prayer"이라고 해서 금식과 기도를 언급하나 한글개역개정에서는 금식은 생략되고 기도만 언급한다 - 역자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악한 영들이 있는데, 이런 영들이 '기도와 금식 외에' 다른 것으로는 나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막 9:29, 흠정역 성경은 "This kind can come for th by nothing,but by prayer and fasting"이라고 해서 기도와 금식을 나란히 언급하나 개역개정은 금식을 생략하고 기도만 언급한다 -역자주).
이에 대해, 예수께서 지상 사역을 하실 때 이 질문이 제기되었다.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막 2:18). 이 말씀을 근거로 당시 제자들은 유대인의 금식을 지키지 않았다는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신 답변은 이것이다. '신랑을 배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2:20).
역사를 살펴보면, 처음부터 금식이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시행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안디옥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렸다. 사도행전은 안디옥에 있는 이 교회에 대해,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이 "금식하며 기도하였고"( 행 13:3), 그렇게 하는 동안에 성령께서 그들에게 계시를 주셨다고 말한다. 로마 교회와 헬라 교회, 네스토리우스 교회들에서는 금식이 실행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종교개혁 시대에는 기도와 금식이 병행되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 이다.
그러므로 성경과 역사가 금식에 부여하는 의미를 생각할 때, 우리 가운데서 금식이 거의 폐지되었다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들이 신앙생활의 습관으로서 금식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닌가? 호세아 시대에 이스라엘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우리도 늘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호 8:2)고 말한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기도로써, 금식이 따르는 기도로써 크게 진보한다고 가르치므로,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우리가 금식을 소홀히 한다면 부족한 점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이 이사야서에 있다(58:6). 이사야 시대에 유다에 금식이 많이 행해졌다.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선지자를 통해서 그런 금식을 받지 않으신다고 증거하셨으며, 이어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다음에 거기에 대해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붙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라"(58:6-8).
금식에 있어서 죽은 형식주의에 대한 이같이 강한 항의가 우리 가운데 형식적인 금식에 대한 반감을 당연히 일으켰다. 형식으로서 금식, 순전히 육체적인 연습에 지나지 않는 금식, 세상 앞에 보이기 위한 금식은 사람을 성결케 하지 못하다. 사실 그런 금식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예수께서 산상보훈에서 이같이 경고하신 것이다. "금식할 때에 너회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마 6:16-18). 확실히 이것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는 말씀과 똑같이 강조되는 교훈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편으로는 금식에서 죽은 형식주의를 반대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참된 금식을 실천하는 것이 바른 태도이다.
그런데 여러분 자신의 과거를 생각할 때나 교회를 들러볼 때, 우리가 형식적이고 죽은 금식을 아주 신중하게 버리면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참되고 경건한 금식도 함께 완전히 버려버렸다는 것 외에 다른 결론을 낼 수 있겠는가? 이 점 때문에 많은 영적 손실이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영생을 바란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이 지식은 다름 아닌 기도로써 부양되고 살지게 된다. 기도가 더 친밀해지고 심오해지는 것은 특별히 금식을 통해서이다. 금식을 소홀히 하므로 우리의 기도가 열정을 잃어버리고, 이렇게 해서 항상 원숙해가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영생인 이 지식에서 손실을 겪는다는 부끄러운 결론을 피할 길이 있겠는가?
이 사실이 여러분 개인과 여러분 가족에게 적용된다면,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겠는가? 우리 교회들에서도 금식과 기도 외에는 쫓겨나가지 않는 악한 영들의 무리가 두루 퍼져있는 것을 거듭거듭 볼 때에, 금식을 행하지 않는 것이 그런 악한 영들이 계속해서 교회의 생명을 괴롭히는 여러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는 것이 무리한 얘기이겠는가?
그렇다면 일주일 가운데 한 날을 정하여 금식을 시행하는 것을 생활의 규칙으로 다시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금식 자체를 반대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의도하든 하지 않든 지간에 금식이 곧 형식주의로 떨어지게 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이사야서와 고린도전서 (7:3)에서 나타나는 대로, 금식은, 영적인 의미로 이해할 때, 음식을 일시적으로 금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은 근거를 지니고 있다. 금식은 몸에게서 영혼을 지배하려는 지배권을 빼앗아서 몸을 지배하는 권한을 영혼에게 다시 돌려주는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런데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세상으로부터 물러나야 한다고 추론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은둔자와 명상하는 수도사들이 생각한 점이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기도와 금식"이 하나님을 찾는 방법 들 중의 하나이지만, 그 외에도 바쁜 생활 가운데서 생각할 수 있는 방법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그 방법들에 대해서는 책의 앞부분에서 다루었다. 따라서 그 방법들을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 방법이라도 사용하지 않은 채 두어서는 안 되고, 그렇게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서 "기도와 금식"을 행하는 일에서 뿐 아니라 우리 가족과 환경 가운데서도 즐기도록 주시는 것을 누리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 삶의 영구한 규칙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때때로 우리가 몸과 세상의 지배하는 힘으로부터 영혼을 떼놓음으로써 위로부터 오는 영향력을 더욱 쉽게 받을 수 있도록 한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어떤 사람은 시간을 정해 놓고 일상생활에서 물러나 금식할 필요를 더 느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불안하고 생각이 깊어지는 때에야 비로소 금식의 필요성을 느낄 것이다. 이 문제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양심을 믿어야 한다. 이 점은 기질과 환경에 좌우된다. 이 문제에서는 아무도 자기 형제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문제 자체는 우리의 생활 습관으로 마땅히 받아들일 만한 것이다. 하나님을 더욱더 친밀히 아는 지식을 가질 때에만 비로소 이 영생을 즐길 수가 있다. 하나님을 더욱더 친밀히 아는 이 지식을, 여러분은 숨은 기도 생활에서 더 구체적으로 발견하게 된다. 여러분을 압박하는 몸과 환경의 지배하는 힘에 직면해서, 숨은 기도 생활이 필요하다. 그래서 올바르게 이해한 금식을 통해서 영혼이 새롭게 힘을 얻도록 해야 한다.
먹고 마시는 것을 절제하는 것이 이런 점에서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여러분이 연회장으로부터 돌아올 때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적어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으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과 여러분 마음 사이에 끼는 안개를 더욱더 두껍게 만드는 것에는 결코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는 것만이 아니라 장식과 의복에 지나치게 사치하는 것, 은갖 종류의 오락과 감각을 만족시키는 일 또한 포함된다. 또한 자발적이든 타의에 의한 것이든 간에 재물에 대한 관심도 해로운 영향을 끼친다.
그러므로 기도를 성결하게 하고 더욱 더 뜨겁게 만드는 금식은 결코 먹고 마시는 것을 몸에서 멀리하는 것으로만 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돈의 지배력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놓기 위해 넉넉하게 구제함으로써, 단순하고 절제하는 생활에 있고, 자기를 기쁘게 하는 데서 자유로워지는 일에 있으며, 환경의 지배로부터 물러나고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데에 있다. 바로 이것이, 이사야가 금식을 흉악의 결박을 풀고 주린 자에게 양식을 주는 것으로 확대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증거 하시는 바이다.
때때로 영혼은 모든 결박을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 그때, 문들이 머리를 들고, 영원한 문들이 열리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고, 우리 영혼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며, 영생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 마음의 성소에서 피어난다.
일반적으로, 여러분은 혼자 있을 때가 주변의 집단과 함께 있을 때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있는 것을 느낀다. 연회장에 있을 때, 여러분은 침실에 있을 때보다 하나님에게서 멀리 있다. 재산을 늘리는 일에 노심초사할 때, 여러분은 가난한 자들에게 돈을 줄 때보다 하나님의 가까이 계심을 덜 느낀다. 여러분이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줄 때가 가족과 함께 혹은 손님들과 함께 진수 성찬을 맛볼 때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여러분이 세상에서 즐거움을 적게 찾으면 찾을수록 여러분에게 더 가까이 온다는 것과, 여러분이 세상의 염려와 오락거리들에서 더 덜리 떨어질수록 하나님과 은밀히 교제하는 것이 더 친밀해진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경험으로 확증하는 바이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몸에 힘을 주고 소중히 기르는 모든 것에 는 영혼의 생명의 투명함과 신축성을 억누르는 경향이 있다. 우리 생명에서 세상으로 향하는 면은 우리 생명에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면과 좀처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출처 자기부인 / 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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