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에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1:20)라는 말씀을 읽고, 마태복음에서는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11:27)는 말씀을 읽게 되는데, 이들이 서로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온갖 방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다. 이것은 단지 낙원에서만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이 타락한 세상에서, 심지어 세상에서 이교 국가의 저주로 두워진 곳에서도 여전히 가능한 일이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시 19:1,2). 그래서 온 세상에서, 하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언어도 없고 나라도 없으며 백성도 없다. 생명으로 고동치는 자연이 일부러 귀를 닫지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소리를 발할 뿐 아니라, 모든 백성, 모든 민족들에게 양심을 통해 전하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또한 있다. 사도 바울은 낙원에 있던 처음 창조 받은 두 사람에게가 아니라 타락한 가이사라 시대의 이교도들에 대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 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5) 고 증거 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이 이교도들 사이에서는 종종 우상 숭배와 저속한 종교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우상 승배와 저속한 종교 형태를 일으키는 층동은 다름 아니라 자연과 양심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다. 이것이 바로 종교의 씨앗으로, 하나님을 아는 타고난 지식이며, 주어진 하나님의 지식이다. 우리 조상들은 늘 이 점을 고백하였다. 이 점을 고백하는 것은 타락한 사람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로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눈이 충분히 열려 있고 양심이 순수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그리고 자기 주변의 자연과 역사의 모든 곳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인식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와 같이 타락한 인류와 그 인류 가운데 모든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그처럼 깊은 죄의 책임을 지고 서게 된다.
그런데 이 모든 사실 앞에서 그리스도께서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고 강하게 말씀하신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 말씀은 사람이 아들을 통해서 아는 것을 제외하고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일체 가질 수 없다거나 아들로부터 하나님을 계시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 하나님을 아무도 모른다는 뜻으로 하신 것이 아니다.
사탄과 그의 종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떤다고 분명하게 기술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탄의 타락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 대한 반역, 곧 하나님을 왕위에서 밀어내고 자기가 그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악한 욕망 때문이었다. 사탄이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지 못했다면 어떻게 그런 것을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사탄이 하나님을 알고 있긴 하지만 아버지로는 결코 알지 않았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느낀다는 것 또한 확실한 사실이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위로를 받고 하나님과 화목한다. 반면에 사탄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두려워 떤다. 아버지를 아는 지식이 풍성해지면 평안과 영원한 안식을 준다. 사탄이 하나님에 대해 아는 지식은 그를 떨게 만든다. 세상의 범죄자는 자기 양심을 무마시키고 하나님을 잊기 위해 수면제를 복용 할 수 있지만 사탄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이것이 사탄과 세상의 큰 죄인 사이의 차이점이다. 모든 것을 잊게 하는 죄의 수면제를 한 모금 마시는 것이 사탄에게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임재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때때로 하나님께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두려워 떤다. 바깔 어두운데 버려진 이들의 비참한 상태가 바로 이것으로 설명된다. 여기 세상에서는 불경건한 자들 이 양심을 잠재울 수 있고 죄를 지으면서도 조금도 불안해하 지 않고 예사로이 살 수 있다. 양심이 철저히 마비된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따금씩 감정이 격해질 때에만 하나님의 분노를 느끼고, 나머지 시간은 하나님 없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끊임없이 죄를 지며 산다. 이는 순전히그들은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지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이생이 끝나고 그들이 영원에 들어가면, 이런 생각도 끝이 날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의 눈이 다시는 감을 수 없을 만큼 크게 떠지고, 그들의 귀는 다시는 닫을 수 없을 만큼 크게 열릴 것이다. 그래서 크게 든 눈과 열린 귀를 가지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영원히 대해야 하는 것이 그들의 비참한 운명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기계적으로 배우는 어떤 교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계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보다는 구속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존재의 영적 경험이 가져다 주는 지식을 여기서 말하고 있다. 그 다음에, 기록된 대로 아들이 아버지를 계시해 주지 않으면 우리 가운데 아무도 아버지를 알 수 없다면, 이것은 모든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보다는 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리고 자신을 이 하늘 아버지의 자녀로 아는 것을 배우기 전까지는 결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영원한 자비에 대한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 확실하다.
우리가 알 수 있도록 주신 계시가 또한 여기에 속하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고, 우리가 참된 자를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지각을 주셨다는(요일 5:20) 것을 안다. 모든 계시는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시작된다. 예수께서 오셨을때 온 나라를 다니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다. 복음은 장차 올 구원의 기쁜 소식이고, 선포된 구속의 기쁜 소식 이다.
그러나 이 복음 전파, 이 소식, 복음의 말씀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런 것을 마음으로 배우고 머리로 기억하면서도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좀 더 친밀한 지식은 조금도 얻지 못할 수가 있다. 이 교리를 보류하거나 저항하는 일이 없이 받아들일 수 있지만, 교리 자체가 우리를 "주여 주여’ 하고 부르는 것 이상으로 끌고 가지는 못한다. 그것은 마치 호세아 시대에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하고 말하였지만, 실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을 대하여 불같이 일어났던 때와 같다.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화목케 하시는 그의 풍성을 우리에게 주시고, 죄인인 우리를 찾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실 때에만 이 지식이 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을 때에만,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지식이 복되고 영광스런 우리 지식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 말씀도 전부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의 사역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보다 먼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신 영원한 말씀이시다. 자연이 담고 있는 하나님의 소리와 함께 모든 자연은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말씀이시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없으시다면 자연으로부터 아무 소리도 나가지 않는다. 이 영원하신 말씀을 떠나면 자연은 죽고 범어리가 되어서 우리에게 아무 말도 전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자연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고 언어로 활기를띠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연 가운데 있는 인류로서 우리 자신도 그리스도가 없었다면 이 세상에 들어오지 못하였다. 게다가 우리 인간 본성의 모든 영역이 그리스도로부터 나왔다. 우리 자신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별히 우리의 모든 영적 성향과 자연을 듣고 이해하는 능력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우리의 도덕적 본성에도 적용된다. 우리의 양심은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인류의 양심이시다. 우리 마음이 도덕적 세계 질서와 갖는 교제, 즉 선과 악, 옳고 그름에 대한 인식,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것과 아름다움에 매흑되게 하는 것, 이기심과 사랑, 빛과 어둠에 대한 인식, 이 모든 것이 영원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우리가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알았다는 것을 뜻하는 말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다른 원천들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는 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우리에게 아버지로 계시된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지식을 기르는 발판이 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폭넓은 기초는 영원한 말씀으로부터 온다. 아버지에 대한 지식은 하늘에서 우리에게 떨어져 내려오는 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 본성의 마른 줄기에 묶어놓은 꽃이 아니다. 그보다는 메마른 인간 본성이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새 생명을 얻어 활기를 띠게 되었고, 그래서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온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그리고 우리가 영원한 말씀으로부터 창조된 덕분에 생긴 양심을 통해 우리에게 온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아버지에 대한 지식이 접붙여진 것이다.
이와 같이 내적으로는 연결되어 있지 않고 외적으로만 나 히 연결되어 있는 두 가지 지식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영원한 말씀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에 대한 한 가지 지식이 있는데, 자연과 양심을 통해서 우리 안에 생기는 이 지식이 이제는 메시야의 구속 사역 안에서 그리고 구속 사역을 통해서 향상되어 아버지에 대한 지식에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회심한 사람이 마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만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해서 그 사역에 만족하고, 그 이후로는, 자연과 양심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세상에 속한 것으로 두는것은 우리의 신앙을 훼손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기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늘에 계신 자기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에게 온 이 빛이 자기 주변의 자연에서 그리고 자기 인간 본성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목소리에 반영되도록 해야 한다. 이 두 가지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목소리도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와 맺고 있는 이 관계에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일부터 시작한다. 이 관계는 세상의 창조와 자연의 창조, 우리 사람의 창조에서 이미 형성된 것이다.
그 결과는, 자연에서 들리는 이 하나님의 소리와 우리 양심에서 들리는 이 하나님의 소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화목 덕택에 전혀 다르게 들리며, 더 분명하게 들리고 그 의미가 더 확실해지며 이제 열린 귀를 통해 순전하게 들린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인식하면, 은혜의 생명과 자연의 생명이 영광스런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결합이 되고, 온 세계와 우리 자신의 삶을 포함한 역사의 모든 것이 우리가 그 아들 안에서 예배하는 아버지 하나님을 나타내는 강력한 하나의 계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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