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한 방에 어떤 사람과 가까이 앉아 있으면서도, 마음으로만 한번 가까이 해볼까 생각할 뿐 대화 한 마디 안하며 지낼 수가 있다. 특별히 긴 철도 여행에서, 여러분은 상당히 좁은 공간에 이름도 모르고 직업도 모르는 사람들과 하루 이상 갇혀 지내면서 말 한 마디 나누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반면에, 여러분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상대를 전혀볼 수 없고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없으며, 소리를 질러서 듣게 할 수도 없고 상대방의 말을 들을 수도 없지만, 끊임 없이 그 사람과 대화틀 나누며 그가 생각하는 것을 거의 그대로 알고, 영으로 그와 지극히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가 있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이를 잃은 엄마가, 아이가 죽은 처음 몇 시간, 그러니까 사랑하는 아이가 엄마에게서 무한히 덜리 떠난 그때만큼 영혼으로 아이와 가깝게 있을 수 있는 때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공간적으로 그리고 신체적으로 함께 있으면, 서로의 영혼이 친밀한 교제를 갖는데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얼굴 표정을 볼 수 있고, 특별히 눈빛과 서로의 생각을 교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사람과 마음으로 사귀는 것은 반드시 이렇게 공간적으로 함께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니다. 친구의 모습을 보기를 간절히 바라게 만드는 것은, 바로 영혼으로 갖는 친밀한 사귐이다. 우리 인성은 영혼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영혼의 교제에서 충분한 만족을 얻는데, 영혼으로 친하면 신체적으로 함께 지내는 것도 즐기게 된다. 영광의 영역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성도들과 갖는 사권은 영화롭게 된 몸을 가지고 서로를 볼 때에야 비로소 가장 복된 절정에 이를 것이다.
하늘의 아버지 집에 있는 복 받은 자들의 사귐은 죽은 자의 부활 때까지는 일시적인 성격을 띠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완성될 것이다. 신체적으로 함께 있고, 서로를 볼 수 있다는 것의 의미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우리 영혼이 다른 사람의 영혼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은 거기에 좌우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실 때, 서로 떨어져 있을지라도 친밀한 교제를 나늘 수 있도록 창조하셨다. 글을 쓰거나 직접 전화로 이야기를 주고받음으로 교제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런 매개체의 도움이 전혀 없이도, 순전히 영적으로, 순전히 느낌과 인식, 생각과 상상력으로 교제를 나눌 수가 있다.
순전히 서로 얼굴을 봄으로써만 갖는 사귐은 인간적인 사귐이 아니다. 인격과 인격의 교제는 언제나 영에서 영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가 아니면 멀게 지내는가, 혹은 우리가 그에게 낮선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거리나 신체적으로 함께함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영적인 친밀 함이나 영적인 거리감으로 결정된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가, 죽기 전에 만나 작별 인사를 하면서, 사람은 "항상 당신과 함께 하겠다"고 말할 수 있다. 죽은 아이를 둔 어머니와, 남편을 사별한 과부는 이 말을 그대로 지켰다. 아이와 남편은 세상메서 떠나갔지만 사별은 그대로 있고, 다시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아삽의 시에서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73:23 )라는 말씀을 읽을 때, 이 말을 영적인 교제를 갖는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공간적으로 하나님과 떨어져 있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까이 계시지 않는 어떤 곳에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앞뒤로 두르신다. 우리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앞을 피할 수가 없다.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 139:8-10) 하고 다윗은 말한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멀리 계실 수 없고 우리도 하나님에게서 멀리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에게 작용한다. 따라서 우리의 맥박이 뛸 때마다, 우리의 신경조직이 떨 때마다, 숨을 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신다고 해서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교제하는 일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 다. 이것을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우리 영과 마음에 성령의 임재의 표시를 알려주셔야 한다. 둘째로, 우리가 마음을 열어 성령께서 들어오셔서,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여 하나님을 찾도록 하고, 하나님을 찾을 때까지 쉬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영에 가까이 오신다는 이 첫 번째 부분이 피상적인 인상을 주는 것에 그칠 수가 있다. 이런 의미에 서, 양심을 통해서든 인생의 현저한 사건들과 관련해서든 하나님에게서 오는 충동을 때로 자기 영혼 속에서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심지어 죄를 짓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이런 충동을 의식해 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밝히고 나타내시며, 우리 안에 거하면서 자신을 우리 마음의 은밀한 친구로 알리 시면, 이 문제는 전혀 달라진다.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과 은밀히 행하는 일이 가능해지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는 주가 되시어 우리 영혼에 교제를 허락하시기도 하고 보류하시기도 한다. 하나님과의 사귐을 갖는 사람은 그로 말미암아 모든 특권들 위에 가장 고귀한 가치를 지닌,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고귀한 은혜를 받는 특권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이 복을 높이 평가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도 하나님께로 마음을 열고, 생활의 한결 같은 은혜를 단지 이따금 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구하고 하나님과의 이 친밀하고 은밀한 교제를 즐기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의해 나타날 것이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시 73:23) 라는 아삽의 시에서, "항상"이라는 단어를 "때때로" "이따금’ "간혹"의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되고, "항상’ "줄곧’ "쉼 없이'라는 뜻으로 해석 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복 됨을 맛보고 즐겼지만 이따금씩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가 한 때는 하나님께 가까이 하였으나 또 다시 하나님에게서 멀어졌고, 그로 말미암아 그의 영혼이 헤매었다. 그는 자기 영혼이 길을 잃었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성실하게 대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성소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서야 이 큰 혼란에서 돌아오게 되었고 마음을 열어 다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게 되었다. 이제 영혼의 쓰라린 경험으로 깨달음을 얻은 그는, 전과는 다르게 행하겠다고 마음으로 굳은 결심을 한다. 단지 지금까지 해오던 것처럼, 마음을 분산시키는 은갖 일들 가운데서 한 때 하나님과의 교제를 구하다가 다시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와 길을 헤매는 식으로 하지 않고, 지금부터 계속해서 줄곧, 간단없이 쉼 없이 하나님과 함께 있겠다고 한 것이다. 이것이 "항상’’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이다.
이 선언은 그가 이제부터는 상상력을 깊게 신비하게 발휘하여 거룩한 명상에 몰두함으로 신적 존재와의 교제에 전념 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매우 조심해서 그런 일을 한다면, 은밀한 기도의 결과로 그와 같이 무지한 자를 영적으로 보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 그것대로 가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항상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아니다.
그런 거록하고 신비한 명상을 하는 동안에는 영의 다른 모든 작용은 쉬기 때문에 그런 것을 의미할 수가 없다. 그렇게 할 경우 우리는 세상에서 행해야 하는 우리 직무 앞에서 무력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교제는 우리 생활을 은전히 힘있게 수행하는 가운데 현실적으 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 교제는 우리의 느낌, 인식, 기분, 사고, 상상, 의지, 활동, 말에 스며들어야 하고 그것들이 살아나도록 해야 한다. 우리 삶의 이질적인 요소로 있어서는 안 되고 우리 존재와 삶 전체에 걸쳐 숨쉬는 열정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사람과 갖는 교제에서는 불가능하고 다만 우리 하나님과 갖는 교제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피조물로서 모든 거룩한 것과 생명이 있는 모든 소산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하나님을 통해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만히 앉아 생각하는 것은 아삽이 원한 것이 아니다. 그가 원한 것은 항상 감사드리며, 스스로 고양되어 경건하게 하나님께로 향하는 마음과 생각의 기조와 근본적인 경향이다. 울부짖는 기도로 충분치 않다. 이런 기도는 이따금씩만 영혼에서 나온다. 필요한 것은 항상, 모든 일에서 우리의 기대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이고, 또 우리가 항상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고무시켜 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항상 신실하신 아버지와 교제하는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어느 때 우리에게 나타나실지라도 언제든지 우리가 그것을 전혀 낯설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있는 곳에 항상 우리 자아가 함께 있고 생활의 모든 일에 우리의 자아를 참여시키듯이 하나님에 대한 생각, 영혼을 하나님께로 들어 올리는 것,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모든 일 안에 그리고 모든 일과 함께 작용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떠나 곁길로 가는 것을 막고 우리 영혼이 항상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습관이 들게 한다.
이 사실은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사람이 다시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기까지는 마음 아픈 공허, 곧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며 따라서 결코 안식을 얻지 못하는 때를 느낀다는 점에서 아주 뚜렷하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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