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카이퍼

제 59장 주께서 내게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새벽지기1 2021. 10. 4. 07:19

 

참된 기도는 응답을 구한다. 위로부터 오는 응답,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응답을 구한다. 모든 기도가 다 응답을 받는 것은 아니다. 순전히 형식적으로 말을 중얼거리는 것과 영혼을 쏟아 간절히 간구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형식적인 기도는 장점이라곤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면, 크게 잘못하는 생각하는 것이다. 형식적인 기도에는 기도를 유지하는 힘이 있다. 형식적인 기도가 계속되다가도, 위로부터 오는 불꽃이 갑작스럽게 이 생기 없는 기도에 들어오면, 그 즉시 형식적인 기도에서 참된 기도가 불길처럼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순전히 형식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하는 것이 아주 틀린 말이지만, 생명이 없는 기도는 병든 기도라는 사실 또한 마찬가지로 강조해야 한다. 열렬히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라면 그런 기도에 대해 즉시 정결케 하는 속죄의 능력을 간구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기도의 진정한 성격을 알아보려면, 무엇보다 먼저 형식적인 기도에 대한 생각을 깨끗이 잊어버리고 오로지 영혼의 참된 간구에만 주의를 집중하고, 모든 간구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응답을 기다린다는 이 확고한 원칙을 적용하도록 해야 한다. 옛적에는 그 응답이 계시로 주어졌고, 영혼 속에 하시는 말씀으로, 이상으로 흑은 천사의 나타남으로 주어졌다. 혹은 이제는 흔히 갑작스럽게 어떤 사람을 만남을 통해서 혹은 성령께서 우리 속에 일으키시는 영혼의 느낌을 통해서 기도에 직접적인 응답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응답을 기다리는 사람은 언제나 경건하게 기도하는 사람이다. 응답은, 신자가 기도로 무엇인가를 구할 때뿐만 아니라 예배드리며 찬송을 부르거나 감사를 드릴 때에도 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드리고 찬송과 감사를 드리는 사람도 단지 하나님의 이름과 위엄에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만 그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예배하는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과 입술에서 나오는 예배와 감사를 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경배와 찬송과 예배를 성경에서 제사라고 부른다. 호세아서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입술의 송아지"(14:2 ),개역개정은 "입술의 열매" - 역자주)라고 부르고, 이사야서에 서는 "입술의 열매"(57:19)라고 한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그런 예배가 함축하고 있는, 분명한 제사적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역사상 최초로 형제를 살해한 사건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보면, 거기에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가 있고 또 하나님께서 물리치시는 제사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사를 드릴 때는 반드시 사람이 마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기다린다는 사실이 가인의 분노에서 만큼 분명하게 나타나는 데는 없다.

 

그러나 이 응답이 언제나 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 응답이 지연되기도 한다. 마음의 슬픔과 영혼의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응답의 지연만큼 고통스럽고 견디기 어려운 것은 없다. 욥의 불평 가운데서 그 사실을 보도록 하자.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30:20). 이 점은 메시야의 불평을 담고 있는 시편 22편에서 훨씬 뚜렷하게 나타난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혹은 미가서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선견자가 부끄러워할 것은 하나님이 응답하지 아니하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이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의 잘못인 것은 아니다. 적어도 메시야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기도 생활을 돌이켜 볼 때, 자신이 양심적으로 부끄러운 경우에도 응답을 받은 적이 있고, 반면에 진심으로 간절히 기도한 경우에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이 오지 않은 때도 드물지 않다는 것을 안다. 많은 경우에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이 오지 않는 것은 우리 기도가 사실은 입술로 범하는 죄이기 때문이었다. 하나님 편에서 응답하시지 않는 것은, 많은 경우에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죄악된 성향 때문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 편에서 죄가 하나님께서 기도에 대한 응답을 보류하시는 유일한 이유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스라엘의 지극히 경건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다고 거듭 불평하였다. 이것이 언제나 그들 마음에 깊은 슬픔을 일으키는 원인이었고, 이처럼 아주 깊은 슬픔이 있다는 것은 그들의 기도가 그만큼 간절하고 진실하였음을 보여 주는 증거였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외치신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외침은 인간 영혼의 슬픔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점을 보여 준다. 하나님 편에서 응답을 보류하는 것이 의도적일 수 있다는 것이 골고다에서 만큼 분명하게 나타날 수 있는 경우는 없었다. 

 

갈멜 산에서 논쟁이 되고 있던 문제는 하늘로부터 응답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은 다같이 하나님이 살아 계시므로 사람이 기도하면 하나님의 살아 계신다는 표시로 하나님 편에서 기도의 응답이 와야 한다는것을 인정하였다. 바알 제사장들은 바알에게 이 응답을 구하였고 엘리야는 여호와 하나님께 구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 종일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고 부르짖었다(왕상 18:26). 그들은 응답이 없자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베기까지 하였다. 그 다음에 엘리야가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 불로써 응답하셨다. 여기에서 걸린 문제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존재하지 않고 생명이 없는 하나님은 응답할 수 없다. 영광 가운데 살아계시는 여호와는 응답하실 수 있으셨고, 두려운 응답이 하늘로부터 불로써 내려왔다.

 

그러나 응답하는 능력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또한 응답하시려고 해야 한다. 그래서 버리셨다는 것은 때로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들으려고 하시지 않는다는 두려운 진실을 가장 고상하게 표현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때는 우연히 흑은 실수로 안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계획에 따라 응답을 보류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가 계속 부르짖는 때에도 응답을 보류하시고, 지극히 진실된 예배자가 하나님 앞에서 영혼을 쏟아 기도하는 때에도 응답을 미루시고, 심지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드님께서 십자가에서 부르짖을 때에도 응답을 보류하신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들리는 바로 그 외침에서, 부르짖지만 응답을 받지 못하는 모든 영혼이 위로를 발견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영혼이 쉽게 절망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친 아드님의 기도조차 응답 되지 않았다는 것이 나타나듯이, 우리도 성자 하나님과 함께 고려될 때 어찌 죄인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고 불평하거나 낙망에 빠져서야 되겠는가? 
 

그렇다면 기도에 응답한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승낙하지 않는 것이나 제멋대로 처리하는 것은 아닌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 대해서는 결코 그런 생각을 할 수 없다. 이처럼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하나님 편에서 보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자녀의 영혼을 두르시는 사랑과 생명에서 나오는 처사이다. 

 

우리가 기도 생활에서 하나님 자신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물을 구한다는 점에 위험 요소가 있다. 우리의 기도는 거의 언제나 하나님의 도움이나 구조, 하나님의 구원하시고 복 주시는 능력을 구한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 자신을 보는데서, 우리 자신의 관심사와 곤경에 처한 우리 상태에서 눈길을 돌려 무엇보다 하나님 자신을 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단계에 좀처럼 이르지 못한다.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이 일에 지침을 주신다. 그 지침은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구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기를 구하고, 그 다음에서야 우리에게 매일의 양식을 주시기를,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우리를 악에서 구해 주시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가 이 기도를 할 때에조차 하늘 아버지의 이 신성한 고지에 좀처럼 서지 못한다는 사실이 우리 영혼의 비참한 상태를 보여 준다. 이런 우리의 상태가 하나님과 우리 영혼 사이에 있는 부드러운 사랑의 생명을 해친다. 곤경의 때에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그 기도는 언제나 우리가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사랑에서 나온다. 그 경우에 하나님은 우리를 돕고, 구조하고 구원해야 하는 분이다. 그래서 때때로 마치 하나님께서 단지 우리를 위해, 우리의 유익을 위해, 곧 우리를 고난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은 다르다. 
기도에서 나타나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명예,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영화롭게 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사랑만이 영혼을 부요하게 하고 존귀하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잠시 동안 우리 기도에 대한 응답을 보류하심으로써 우리를 사랑의 생활에 더 깊이 들어가게 하고 기도에 들어 있는 이기주의를 억제하며, 기도 생활에 서도 사랑을 북돋우실 때, 그것은 은혜이고, 은혜를 주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늦어질 때에 영혼이 낙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기도의 응답이 반드시 즉시 와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과, 아주 많은 경우에 응답이 뒤늦게 나타났다는 것,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정하신 때에 응답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그만 두고라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응답하지 않을 때 낙심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그 한 가지 만은 아니다.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에서 다 같이 하나님의 성도들을 사로잡았던 사실을 여러분에게서는 면제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여러분의 구주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음의 어두운 시간에 어떤 일을 겪으셨는가? 여러분의 영혼이 부르짖을 때 하나님 편에서 이렇게 응답을 보류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여러분의 영혼을 사랑하신다는 표시가 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 영혼의 생명과 여러분의 기도 생활을 더 높은 우월한 위치로 올리기 원하신다는 표시이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더 깊은 사랑의 길로 들어가게 하시고자 한다는 표시이며,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더 낫게 기도하고 더 간절히 간구하며, 그 다음에 훨씬 더 영광스러운 응답을 받을 영광스러운 미래를 여러분을 위해 준비하신다는 표시이다.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의 편에서 일시적으로 응답을 보류하는 것이 더 깊은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이 되는 것을 사람들 가운데서도 자주 보게 되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그분 자신이 사랑이시고, 이처럼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 구름을 가림으로 여러분이 더 고귀하고 풍성하게 사랑을 누리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에게는 이 사실이 얼마나 더 해당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