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탉은 위험이 가까이 오기 전까지는 제 병아리들이 눈앞에 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도록 둔다. 그러나 위험이 가까이 오면 즉시 암닭은 날개를 펼치고 새끼들에게 자기에게로 오라고 꼬꼬 하고 소리치며 마지막 새끼가 날개 아래로 모이기까지 마음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동물이 어미로서 갖는 신실함으로 어린 새끼들을 모두 보호한다. 그런데 그때 병아리가 스스로 어미 닭에게로 피하지 않는다. 병아리 스스로 위험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볼 때에야 비로소 어미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기 위해 어미에게로 달려가서 피한다.
예수께서 시온에 대해 애처로운 심정으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고 외치신 것은 두 번에 걸쳐 질책하시는 것이다. 그 말씀은 이스라엘이 위험이 가까이 오는 것을 전혀 짐작하지 못한 것과, 방어를 구하되 하나님에게서 찾지 않고 오직 사람에게서만 구한 것에 대해 책망하였다. 곤경의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자기 조상의 하나님께 도움과 구원을 부르짖는 기도와 간구를 드렸어야 하고, 그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을 기다릴 것이 없이 자기들에게로 닥치는 파멸의 홍수의 물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마자 온 영혼으로 하나님께로 피했어야 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힘을 믿었고 그 위험을 가볍게 보았다. 그때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소리치셨다. "이스라엘아 내게로 도망하라 내가 네 방패가 되게 하라." 하나님께서는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 이같이 외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자기 하나님께서 그 같이 외치는 소리와 부추기는 말을 들었지만 마음을 완고하게 하고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때서야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시는 심판을 하셨다. "암닭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회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 23:37,3 8). 이 심판의 말을 듣고도 이스라엘은 스스로 책망하고 부끄러워하며 울지 않았고 오히려 골고다에 십자가를 세웠다. 자기 백성을 위하여 우신 분은 하나님이시었다.
여기서 여러분은 온갖 영적 상태를 보게 된다.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도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이 위험 가운데서 지내다가 배가 가라앉게 될 즈음에서야 비로소 "하나님 살려주세요" 하고 소리치지만, 그 외침과 함께 폭풍우 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위험에 처해서 용감하게 위험에 맞서 싸우지만 하나님을 전혀 모를 수가 있다. 또 어떤 사람은 곤경의 때에 하나님의 경고하시는 소리를 듣지만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심한 고난의 때에 스스로 하나님께 피하려 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그래서 자기 하나님께 피하고 그 날개 아래 숨으며 하나님의 신실한 보호를 받으므로 그 영혼이 구원을 받는 사람들도 있다.
이 마지막 사람들만이 실로 그 영혼으로부터 이같이 확신을 가지고 외칠 수가 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여 숨었나이다"(시 143:9). 병아리들이 어미 닭의 날개 아래로 기어들어 갔을 때, 가까이 온 매는 더 이상 병아리들을 보지 못하고 화가 나 있는 어미 닭만 볼뿐이다. 어린 아이가 어머니에게 달려가서 어머니 옷자락에 숨으면 아이를 공격하던 사람은 더 이상 무력한 아이를 상대하지 못하고 아이의 편을 들고 나서는 암사자 같은 어머니를 대해야 한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께로 숨으면 그 싸음은 더 이상 그 자녀와 세상의 싸움이 아니라 이 세상과 하나님의 싸움이 된다.
하나님께 피하여 숨는 것은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고 하나님과 은밀히 지내는 것의 은밀한 은혜를 아는 것과는 다르다. 피하여 숨는다는 것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언제나 일시적인 것이다. 여러분은 천둥을 동반한 폭풍우를 만나면 피하여 숨지만, 곧 해가 다시 비치면 숨었던 곳에서 나와 계속해서 여러분의 길을 간다. 병아리들은 매가 공중에 멤돌면 어미 닭에게 피하여 숨지만 매가 사라지만 다시 밖으로 뛰어나온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영혼은 고난이 지속되는 한 하나님께 피하여 숨는다. 그러나 고난이 지나가면 더 이상 숨을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 피하여 숨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 아니라 특별한 어떤 때에 해당하는 상태이다.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시 57:1) 흑은 이사야서에서 말한 대로 "분노가 지나기까지'(26: 20) 숨는 것이다. 고난과 염려는 우리 일생을 따라다닌다. 그래서 우리의 십자가를 매일 새롭게 져야 한다. 그러나 대체로 매일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하고서 평온한 심정으로 자기 길을 가야 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싸우시며, 자기의 그늘이 되신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서 선한 목자로서 자신을 인도하시고, 맹렬한 공격이 닥칠 때는 하나님께서 보호물로 자기를 가리신다는 것을 안다.
그럴 때 그는 진실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하나님은 그를 버리시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일상적인 활동에서 믿음이 발휘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작용하고 하나님 자녀의 신뢰하는 확신이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숨는 것은 그 이상의 다른 어떤 것, 공포의 시간과 관련된 것이다. 물이 목에까지 왔을 때, 어두운 공포가 갑작스럽게 영혼을 덮쳤을 때, 도망갈 길이 전혀 없을 때, 마음에 어두운 밤이 자리 잠을 때, 믿음이 더 이상 스스로를 확신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때 영웅적인 용기를 내어 자신을 추스르고 위험의 순간에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달려가 엄마 치맛자락에 숨듯이, 영혼이 하나님께로 도망하여 하나님께 바싹 달라불고 하나님의 성소에 숨고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때 영혼은 다른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계획을 깔 시간도 갖지 않은 채, 오직 하나님께 숨고 하나님 곁에서 안전하게 지내며 하나님에게서 구원을 얻으려는 이 한 가지만 추구한다. 믿음의 절망으로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면, 그때에 하나님께 피하여 숨는 것은 절망적인 행동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믿음에서는 절망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불안한 가운데 스스로에 대해 낙담하고, 밖에서 오는 모든 도움과 구원에 대해 절망하며, 다른 때에는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던 일반적인 능력과 은사가 작용하는 것을 단념하고 심지어는 방어나 저항을 계획하는 방법마저 포기한다는 점에서 절망이 있다. 이는 닥쳐오는 일이 너무 강해서 자기가 틀림없이 패할 수밖에 없으므로 마주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다른 하찮은 위험도 무릎쓸 만한 용기가 남아있지 않아 창과 방패를 던져 버리고 무력하고 절망적인 상태에서 하나님께로 피하며 "하나님이여 주께서 나를 위해 싸워주소서" 하고 간구하며 이제 하나님께 피하여 숨는다.
하나님께 피하여 숨는자는 자신의 주장을 하나님께 맡겨 버린 자이다. 그는 그 주장으로부터 스스로 물러난다. 자신의 모든 지원과 소망을 하나님의 공의에 맡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 잡으셨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는 자신의 주장을 마무리 짓기 위해 숨었던 곳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이같이 하나님께 피하여 숨는 것은 일이 잘못되어 갈 때마다 영혼에게 일어나는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지극히 곤혹스럽고 고통스런 환경에서만 일어나는 행동이다.
다윗은 영혼이 자기 속에서 짓늘릴 때에야 비로소 이같이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 시 143:4). 그래서 그는 "죽은 지 오랜 자 같이 암흑 속에 있었나이다'고 하고 마음으로부터 쥐어짜듯이 도움을 부르짖었고,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그와 같은 고난의 순간에 짓눌린 마음으로부터 울려내었던 것과 같은 말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숨막힐 듯한 불안과 곤경의 때에 하나님께 피하여 숨는 일도 있다. 왜냐하면 다윗의 경우에서와 같은, 하나님의 싸움을 싸우라는 부르심은 신자들에게 드문 일이지만, 이러한 싸움의 성격이 모든 가족에게서 또 일상적인 생활에서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절망과 자살로 이끄는 치명적인 불안의 예들은 거의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절망으로 인해서 세상 사람을 자살로 끌고 가는 불안이 신자에게는 자기 하나님께로 피하여 숨게 만든다는 이 사실이 믿음에서 주목할만한 점이다. 세상 사람이나 하나님의 자녀나 다 같이 포기한다. 그러나 세상 사람은 단지 고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파멸로 종결 지으려고 하지만, 이때 신자의 영혼에는 영생의 소망이 빛을 비추고, 그래서 그도 자신을 버리려고 하는데 다만 자신의 능력과 역량에서 어떤 것이 나오기를 전혀 기대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기 하나님의 손에 맡김으로써 자기를 버리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는 치명적인 병에 걸리고 고통을 겪으며, 더 이상 그 고통을 견딜 수 없고 더 이상 약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게 될 수 있지만 자기 하나님께 피하여 숨을 수 있기 때문에, 죽음에 끝까지 저항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이 통절한 슬픔으로, 괴로운 죄로, 끝없이 이어지는 역경으로, 가난으로 가정에 절망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다시는 명예를 회복할 수 없고 그래서 사는 것이 짐이 될 만큼 아주 깊고 무자비한 조소와 비방으로 인해 큰 슬픔을 당할 수도 있다.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대의가 연루될 수가 있다. 그러나 대체로, 이 모든 두려운 어둠이 일상적인 생활에서 갑자기 불쑥 나타나는 일은 없다. 문제 자체는 하나님을 위한 싸움과 상관없을지라도, 순전히 이 슬픈 고통들이 하나님 자녀의 마음에 있는 믿음을 흔들기 때문에 이 싸움이 일어난다. 그때에는 그것이 다름이 아니라 믿음의 싸움이 될 수 있다. 세상의 권세와 믿음이 나타내는 힘과의 전투가 될 수 있다. 불안이 믿음을 쳐서 잠잠하게 만들지라도, 믿음은 이 치명적인 두려움에 맞서서 계속해서 하나님께 도움을 부르짖을 것이다.
이 모든 경우에 믿음은 그 두려움에 저항하는 것부터 시작하고, 그 다음에는 힘이 있는 한 그 두려움과 맞서 싸운다. 결국 믿음이 더 이상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이제 곧 믿음이 힘을 잃을 것을 느낄 때, 믿음이 마지막으로 영웅적인 노력을 발휘하고 그로 인해 승리를 거둔다. 이때 믿음은 자신이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그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고, 폭풍우로 인해 이리 저리 뒹굴며 괴로움을 당하는 자가 하나님께 피하여 숨고, 하나님께서 그의 상처를 싸매시는 것이다.
출처 자기부인 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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