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카이퍼

제 55장 우리 기도가 상달되지 못하게 하시고

새벽지기1 2021. 9. 29. 07:13

아이가 아버지에게 무언가 달라고 할 때, 아이는 먼저 아버지를 찾고, 찾은 다음에야 자기가 원하는 바를 아버지에게 구한다. 아버지를 찾기도 전에 말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유치하고 어리석은 일로서, 생각 없이 고집을 피운다는 증거이다. 기도에 있어서 이와 관련하여 알아야 할 일이 없는가? 

 

하나님의 자녀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기도하려 하고 하나님께 믿음으로 무엇을 구하는 자는 먼저 하나님께 가고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았을 때에만 자기가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구할 수가 있다. 기도와 관련해서, 종종 이 점을 별로 생각하지 않는데, 때로 우리 자신의 기도와 다른 사람들의 기도에서 이 점을 보게 된다. 즉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말을 걸고 기도하기 보다는 허공에 대고 기도하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특별히 즉흥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드리는 기도에서 그렇고, 특히 교회에서 위엄으로 옷 입으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실제로 말하기 보다 때로 따지고 주장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은밀히 드리는 기도에 대해서는 할 말이 더 없다. 이에 대해서 사람마다 자기 방식대로 드리는 기도에 대해 말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은밀히 드리는 기도에 대해서 자기들 나름대로 말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이 점에만 국한해서 생각할지라도, 기도의 응답이 없는 것에 관해 형제의 귀에 속삭이는 불평들이 아주 많다는 사실은, 때로 은밀히 드리는 기도에서 조차, 영혼이 하나님을 만났다고 의식하기도 전에 이미 중얼거리나 말하기 시작한다는 주장이 옳다는 것을 입증한다. 

 

많이 기도하고 오래 기도하는 것이 이 습관을 부추긴다. 눈을 감고 손을 모으고 이제 그동안 마음으로 배워 온 형식적인 기도를 시작한다. 불손하게 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다는 데서 오는 아주 깊은 공경심을 가지고 드리는 것도 아닌 것은 확실하다. 심지어 목소리를 보나 기도의 어조를 보나 때로 여러분은 기도가 단순히 형식이지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것이 결코 아닌 것을 느낀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기도가 다 그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아닌 것을 거듭 보여준다. 

 

성경은 우리의 기도가 응답을 받지 못하는 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여호와의 이 같은 말씀을 듣게 한다.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사 1:15). 또한 성경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불평을 기록하고 있다. "주께서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사 기도가 상달되지 못하게 하시고"(에 3:44). 그때는 하늘이 놋쇠 같아서, 열리는 일도 자물쇠가 풀리는 일도 없고, 가까이 하거나 들어가는 일도 없고, 은혜와 간구의 영도 없다. 

 

시온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지성소’가 있었다. 그래서 경건한 유대인이 산에서 헤매거나 요단강으로 인해 발이 묶였을 때, 그는 돌이켜 지성소를 향하여 기도하였다(시28:2).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 있을 때, 그들도 마찬가지로 시온을 바라보며 기도하였다.

 

이 습관의 잔재로서, 오늘날도 사람들이 간절한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는 집에 머물지 않고 예배당으로 가는 것이 많은 나라에 습관으로 있다. 이 목적을 위해 예배당의 문이 하루 종일 열려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처럼 장중한 예배당 건물에 엄숙하게 홀로 찾아와, 그런 인상적인 곳에서는 하나님의 가까이 하심이 더욱 효과적으로 나타날 것으로 기대하고 사람들 모르게 은밀한 곳에서 무릎을 꿇는다. 

 

특별히 대가족 식구들과 함께 좁은 집안에서 지내야 하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좋은 점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집에서도 언제든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빈방이 있어서 문을 걸어 잠그고 얼마 동안 홀로 하나님과 지낼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행운을 누리고 있지 못하다. 이런 경우에, 사람들은 거의 홀로 지내거나 조용히 지낼 수 없으며 기도에 크게 도움이 될, 그런 은밀한 곳을 거의 찾을 수 없다. 신앙의 높은 경지에 있는 사람은 그처럼 빈 예배당에서 조용히 드리는 기도를 소위 신성한 곳에 지나치게 중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증거로 보고 비난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마도 집안에서 개인적인 기도를 위해서 조용한 시간을 거의낼 수없는 고통스런 생활을 경험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집에서 겪는 어려움은 별 문제로 하고,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거룩한 지성소를 정하시고 신실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그리로 향하라고 명하셨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신 데에는 형식적으로 입으로만 중얼거리는데서 참된 기도 즉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데 이르게 하려는 교육적인 목적이 어느 정도 있다. 

 

이와 같이 기도할 수 있기 위해 먼저 영혼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반드시 자신의 영혼과 하나님이 연결된 후에야 기도를 시작하는 경건한 유대인이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먼저 하나님을 찾고 이제 하나님께 말씀을 드릴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지도 않고 기도를 하는 것은 사실상 기도를 어설프게 흉내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기도하려고 하는 사람은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하는 목소리에 주의하고,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 시며 우리의 간구를 경청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도하기 전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섰다는 것을 충분히 의식하지 않는한, 이런 영적 의식이 여러분에게 일어날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는 언제나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고 구속받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그 의 기도에 귀 기울이심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이 먼저 거룩하신 분 앞에 서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권한이 전혀 없다는 것을 느끼고 따라서 오직 그리스도로 감싸여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렇게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아무 뜻없이 하는 말이 된다. 

 

여기서 그 어려움을 제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편재성이다. 하나님은 시간이나 장소나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어디에나 계신다는 것이 믿음의 인식이다. 그래서 이 사실 때문에 사람 들이 먼저 하나님께 생각을 집중하고, 하나님을 자기 앞에 모시며 하나님을 만날 때까지 찾는 일도 없이 공중에 대고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그의 말씀에서 다르게 가르치신다. 성경에서 아주 영광스런 용어로 하나님의 편재하심을 우리에게 계시하지만, 이것은 기도에 관해서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성경은, 우리가 어떤 장소에 있든지 살아계신 하나님, 곧 우리의 앞뒤를 두르시고, 우리의 길과 눕는 것을 아시고, 우리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는(시 139:35) 하나님을 대하고 있다는 사실도 강하게 계시한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과 함께 성경은 언제나 우리에게 위를 보라고 가리킨다. 기도할 때 우리는 영혼을 위로 들어 올려야 한다. 기도할 때 생각을 하늘로 향해야 한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위엄이 빛나는 은혜의 보좌가 있다. 우리의 기도가 을라 가는 곳은 하늘에 있는 궁정이다. 우리에게 귀를 기울이시는 분은 살아계신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고, 우리 영혼이 마땅히 향해야 하는 분도 살아 계신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사실 이 점에서 여러분의 상상력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그래서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자기 아버지로 아는 사람은 또한 자신이 모든 곳에 확대되어 펼쳐지는 어떤 세력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하나님, 자신의 주요 왕이신 하나님을 대하고 있음을 안다. 그래서 그는 효과적인 기도를 위해 하나님과 은밀히 교제하는 것을 회복하고 하나님과 다시 친교를 이루기 전까지는 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전보도 전화도 없던 이전 시대에는, 이 사실이 지금보다 훨씬 더 불가해한 일처럼 보였다. 반면에 우리 시대에는, 약한 금속선 외에는 아무것에도 도움 받지 않고서 엄청난 먼 거리에서도 사람들끼리 의사를 소통할 수 있음을 경험으로 안다. 그리고 이 선조차도 사라져 버렸다. 이제는 무선전신이 등장 하였는데, 이 무선전신은 그 놀라운 작용에서 우리의 기도를 아름답게 상징하게 되었다. 우리의 기도는 어떤 중간 매체도 없이 하나님과 교제를 갖는 것이다. 

 

또한 소위 정신감응(telepathy)이라는 것이 여기서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영혼과 영혼으로 교제할 수 있고 상대의 생각을 알 수 있다는 믿을 만한 이 사실은, 어떻게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교제를 가질 수 있고 생각을 알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이다. 인간 영혼이 이미 이런 일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이런 영적 교제의 수단들보다 무한히 더 크신 분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와 같은 교제가 가능한 것이다. 

 

문제의 요점은, 기도할 때 우리는 이 친교가 반드시 필요함을 알아야 하지만, 하나님과의 연결을 확보하기 전에는, 하나님과의 의사소통, 하나님과의 접촉을 확보하기 전에는 기도를 시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름으로 가리셨기 때문에 자기 기도가 "상달되지" 못하였다고 불평할 때, 그 말을 통해 자기가 이 교제를 가지려 했지만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음을 알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사람이 전화기 앞에서 전화교환국으로 전화를 할 때 선이 끊어져 있으면 응답이 없다. 그렇듯이 기도하는 사람이 하늘 앞에 서서 대답을 듣고자 하나님의 등 뒤에서 부르며 교제가 시작되기를 구하지만 생명의 신호가 돌아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