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여러분이 모르고 있는 어떤 사람이 혹은 알고는 있지만 존칭을 쓰던 사람이 그냥 편하게 이름을 부르라고 하면, 그 즉시 사회적인 교제에 놀라운 친밀감이 생긴다. 성을 떼고 대선 세례명을 쓰면 여러분은 훨씬 더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고 느낀다.
아이들은 이런 변화를 모른다. 어린아이들은 커서 신발을 못 신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유아기의 습관을 버리고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과 일정한 거리를 두어 자신들이 좀 더 자유롭게 될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형태의 예의를 차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후에, 좀 더 친밀하게 알고 지내는 것이 우정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든지 아니면 연합해서 공동으로 어떤 일을 하면서 거리감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든지 간에 직함을 떼고 처음으로 서로를 이름으로 부를 때 우리는 서로 가까워졌다는 것을 느낀다 거기에 상호 신뢰가 생긴 것인데, 그동안 상호 신뢰가 나타날 만한 기회가 필요했던 것이다.
대체로,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라고 허락하는 사람의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소원한 사이에서 친밀한 교제의 관계로 발전하는 도약도 그만큼 크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성으로 부를 때 사실은 그 일도 크다. 그러나 그 사람을 개인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은 더 큰 일이다. 여성들 사이에서, 어린아이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개인 이름 곧 세례명을 사용하고 성을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체로 남자들 사이에서는 성을 부르는 것이 유행이고, 그래서 개인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지극히 친한 사이임을 나타내는 표시라는 것이 차이점이다.
가족생활에서는 좀 더 격식을 갖추는 호칭은 사용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세례명에 의해 돌아가거나 다른 사람과 갖는 관계를 표현하는 전혀 다른 이름을 사용하므로 성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결국 어머니라는 이름과 아버지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우리는 남편이라는 말을 하고 아내라는 말을 하며, 부모들은 “내 아이”라고 말한다. 이 이름들이 가족 안에서 보통 사용될 때 그것은 단순한 소리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상호 관계의 본질 적인 어떤 것을 표현한다. 이 이름들은 우리가 의사나 목사, 교회 관리인 같은 사람들을 부를 때의 이름과 다소 같은 면을 갖는다. 그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의미하지 않고 그의 직무를 의미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는, 그 사람과 그 사람이 우리와 맺고 있는 관계가 분리되지만, 아버지라는 이름과 어머니라는 이름, 그리고 “내 아이’’라는 이름에는 이런 우수한 특성이 들어 있다. 이 이름들은 그 사람을 나타내고 또 그들과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를 냐타내며 따라서 이름이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을 표시한다.
그러면 이런 사실들을 알고 난 후에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 혹은 “아바,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아버지라는 이름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는 최고의 특전임을 전보다 훨씬 더 잘알게 된다. 우리가 영원하신 분을 가리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이름이 다 똑같이 애정이 담겨있고 친밀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란 막연한 이름은 아무것도 가깝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단순히 “하나남’이란 말은 인류를 초월하는 지극히 높은 존재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 말 자체는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고 아무것도 계시하지 않으며 어떤 독특한 관계를 전혀 표시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이라는 이름 앞에 “나의’’라는 말을 붙여 “나의 하냐님" 혹은 ‘‘언약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때, 그 단어가 의미 있게 되고 생기가 넘친다.
이 사실이 “지극히 높으신 이’’라는 이름에도 적용된다. 성경에서 이 이름은 특별히 이스라엘 밖에 있는 사회에서 사용된다. 이 이름은 멜기세덱과 관련해서, 다니엘이 지냈던 이교 세계에서는 느부갓네살과 관련해서(사 14:14), 그리고 선한 천사들과 악한 천사들과 관련해서 나온다. 시편 82:6에서는 천사들을 “지존자의 아들들’’이라고 부른다. 가브리엘은 마리아를 덮을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마찬가지로 귀선들도 예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눅 8:28)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극히 높으신 이라는 이름은, 우리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보다 훨씬 뛰어나선 분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하나님을 우리와 더 친밀하게 만들어 주거나 사람을 하나님의 은밀한 교제에 들어가게 하는 이름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전능하신 이로, 여호와로, 우리 주님으로 계시하실 때는 문제가 전혀 달라진다.
족장들이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이름으로 부르도록 허락을 받았는대 이 이름은 보호와, 위험한 때의 피난처, 주신 약속에 관한 보장, 우리를 위해 모든 반대를 깨트릴 언약의 또 다른 당사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나님을 높은 망대, 혹은 피난처, 우리의 반석, 그 장막 안에 우리가 거할 하나님으로, 우리의 은신처가 되시는 하나님등 다양한 이름으로 언급하는데서 이 이름이 풍부하게 발전한 것이 나타난다. 그것은 모두 이 한 가지 개념에서 발전한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의 유익을 위해 일하시는 전능하심을 의미한다.
똑같은 사실은 여호와라는 이름에 적용된다. 이 이름은 또한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존재를 표현하고, 특별히 하나님이라는 존재 안에 있는 것, 곧, 인생의 끊임없는 변화, 불안정, 변하기 쉬움, 결국 유한성 때문에 임하는 불안에 직면해서 우리를 위로하는데 필요한 것을 나타낸다.
-계속-
출처 / 자기부인 / 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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