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카이퍼

제 46장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새벽지기1 2021. 9. 19. 07:01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은 지적 훈련의 산물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여러분 영혼이 내적으로 인식하고 경험하는 것에서 출발점을 찾을 때에만 진실한 것이 된다. 여기서는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 일어난 접촉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온다.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빛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자신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발견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나가는 작용들에 의해 하나님의 존재를 정말로 느끼지 않는 한,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없다. 물론, 이 지식은 접촉하는 감각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영적이고 직접적인 인식에 의해서 알 수 있다. 그래서 추론에 의해서나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이야기하는 것에 의해서 알 수 없고,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은 크시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으로 부터 직접 알게 된다. 

 

이 점은 우리 조상들이 겪어온 신앙을 위한 영웅적인 투쟁 속에서 꾸준히 분명하게 고수한 바이다. 압박과 재난 가운데 주님의 장엄한 위엄 앞에서 예배드릴 때마다 영혼에 힘이 생기는 것을 느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 속에 하나님의 의식을 새겨놓으셨으며, 이 하나님의 의식 속에 모든 종교의 씨앗이 있다는 사실을 그처럼 강하게 주장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 사실이 달라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박해가 그치고 평화로운 상태가 다시 오자, 하나님에 대한 모든 참된 지식의 현실적이고 영적인 이 배경을 무분별하게 버리고 지나치게 관념적인 개념으로 치우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관념적인 지식, 곧 참된 하나님으로부터 추론한 지식이 영생의 지식을 대신하였다. 이 관념적 지식의 필연적인 결과는 책상물림의 교육이 참된 경건을 대신하고 교회의 생명이 약해지는 것이었다. 

 

교회는 이 지식으로만 서지 않았다. 현실에서 물러나 지성의 관념적 고안물들을 담고 있는 종이의 세계로 들어가는 태도가 고상한 생활의 모든 부문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예술도, 그리고 예술과 함께 시(詩)도 결국 이 악한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형태, 가사, 어구, 운율이 생명의 원천으로부터 솟아나오는 귀중한 언어를 대신하였다. 

 

그 다음에, 그런 태도에 반대하는 똑같이 일방적인 반응이 왔다. 이 반응은 감정 단순한 인상, 기분, 끊임없이 변하는 의견들만 가져왔을 뿐이다. 필연적인 그 결과로, 의식의 약화, 내적 인식의 불분명함, 사고의 혼동과 언어의 혼란이 왔다. 시와 문학에서 형편이 그러했고, 종교에서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또한 여기에는 불신자들을 범신론에 빠지게 하고 신자들은 병적인 신비주의에 떨어지게 하는 인식, 기분, 인상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종교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이 모든것이 인간 생활의 모든 면에 나타나는 강력한 감정의 흐름에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감정과 지성의 활동이 적절하게 균형이 잡히고 조화를 이룰 때에야 비로소 일이 바람직하게 된다. 

 

그러나 죄는 이것을 너그럽게 보아주려고 하지 않는다. 죄는 끊임없이 균형을 깨트리고 조화를 내쫓는다. 다음으로, 먼저 지성이 감정을 죽이는 시간이 오고, 이때로부터 감정이 지성을 잠재우는 시기가 온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에 직면하면, 모든 남용을 판단하고 균형과 조화의 회복을 열성적으로 강조하는 설교자의 신성한 외침이 늘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이같이 일련의 생각들에서 은밀한 교제의 활동이 모든 면에서 나타났다. 상상력, 영감, 의지의 작용, 사랑,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사람으로부터,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로부터 받는 인상이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을 갖는데 어떻게 기여하는가는 지금까지 충분히 생각하였다. 

 

첫째로, 하나님의 은밀한 활동의 현실은 명백하게 알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 시대는 이 방면에 배움이 있기 때문에 이 일이 더욱 쉽게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내적 활동의 현실을 이같이 주장하는 것은 이 시대의 대중적인 생각과 일치한다. 또한 종교의 영역에서, 개념들만 쓸데없이 만지작거리다 보니 결국 일반 지성이 배척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느낄 수 있고, 다룰 수 있으며 즉시 누리고, 우리 전 인격에 기분 좋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을 갈망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것에 만족하고 지낸다면 그것은 이내 사람에게 앙갚음을 할,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이 될 것이다. 성경은 이런 태도를 허용하지 않는다. 교회는 이것에 항의하고,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성경에서 여호와의 이름이 지닌 의미는 크고 광대하다. 그 이름이 우리를 감정의 조류에서 불러내어 더 고귀하고 더 분명한 의식에 이르게 한다. 감각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한 특징으로서 의식은 감각보다 훨씬 뛰어나다. 감각은 재료를 구비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할 수 없다. 의식은 이 재료를 통해서 생각하고, 이 재료를 배열하며 뚜렷한 형태로 바꾸어 놓는다. 식물도 감수성이 강하고, 동물이 갖는 감각은 때로 훨씬 더 훌륭하다. 그러나 동물도 식물도 받지 못한 것은 더 고등한 의식이라는, 영광스런 이 능력이다. 이 능력이 있으므로 사람은 자기 속에서 우주를 포착할 수 있으며, 그 우주를 통해서 보고 사물의 의미를 판단하며, 시물들을 감상하고 자기 생각에 반영 할 수 있다.

 

이 의식이 사람을 왕으로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의식을 가지고 사람이 행동하고 다스리기 때문이다. 의식은 온갖 형태를 갖는다. 예술을 위한 형태, 도덕을 위한 형테 그리고 종교 생활을 위한 형태를 갖는다. 그러나 이 모든 형태들이 있지만, 사람이 자신을 돌아보고, 그래서 위대한 행동을 할 수 있고, 영원한 말씀의 영역에까지 올라서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첫째로 그 형태들 속에 있는 의식이다. 

 

그러므로 신비주의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은 언제나 타락으로 끝이 났다. 그래서 우리 종교의 신성한 보물을 우리 의식의 정점에까지 높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때때로 신성한 외침이 나가야 한다. 그 이상의 것이 없다면, 신비주의는 어둠이요 혼돈이고, 밤의 암혹이댜 우리 의식에 빛이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위하여, 제일 먼저 하나님이라는 이름에 의하여 이 빛에 먼저 불이 켜진다. 여러분이 영원하신 분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이라는 우주적인 용어를 써서 그분께 말을 걸고, 이어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때, 여러분은 즉시 이 의식을 지각한다. 

 

뜻을 담아 하나님께 조용히 말을 걸고,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을 불러 “사랑하는 아버지여"하고 속삭이는 사람은 이 이름 안에서 한 사상의 세계가 마음에서 흘러나오고, 그로 말미암아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높은 곳에서 자기 영혼에게 가까이 오시는지를 즉각 인식한다. 이름이란 내가 어떤 사람에게 말을 거는 수단이고, 아는 사람 에게만 말을 걸 때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다. 그래서 이름은 그 사람의 지식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이름은 냐에게 인격으로 나타나는 존재를 한 마디로 간단하게 요약하는 것이다. 사람의 이름이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지 않아 더 이상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게 될지라도, 우리는 길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모르는 사람과,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 말을 거는 사람과 다르게 본다. 

 

여호와라는 이름이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는 표현인 한에는, 이 사설이 훨씬 더 고상한 의미로 우리 하나님께 적용될 수 있다. 하나님을 여호와라는 언약의 이름으로 불러 보라. 어린아이로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불러 보라. 혹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전체 이름으로 하나님을 불러 보라. 그러면 이 이름 안에서 그 존재가 표현된다. 여러분이 이 이름을 고안해 내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이 이름을 자신에게 붙였고 여러분에게 계시하셨다. 하나님을 여러분에게 더 가까이 모셔오고 하나님을 여러분의 의식 속으로 모셔 들이며 하나님을 여러분에게 설명해 주는 이 이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요약된 지식이 여러분에게 이른다. 

 

영원한 존재에 대한 이름이 없다면, 종교와 우상 숭배가 혼합 된다. 다음에는 모든 것이 어두운 종교적 인식으로 끝이 나고, 그 다음에는 범신론의 바다가 여러분에게 나타난다.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지식은 더욱 더 잃고 만다.  그러나 여호와의 이름이 있으면, 구별이 생긴다. 거짓과 참 종교가 대비된다. 여러분은 인격적인 하나님 앞에 사람으로 서게 되고 여러분이 상관하는 분을 안다. 물론, 여러분이 이 이름이 헛된 소리로 사라지도록 하지 않을 경우에 해당되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자기부인 / 바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