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카이퍼

제 44장 둘째도 그와 같다

새벽지기1 2021. 9. 17. 07:37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자연의 휘장 뒤에 숨어계신다. 그러나 그 휘장의 주름이 굽이치고 흔들리는 움직임을 통해서 우리는 그 뒤에 계시는 하나님이 우리 가까이에 계심을 인식한다. 자연에서 우리 눈앞에 살아있고 중얼거리며 맥박이 뛰고 움직이는 모든 것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의 약동을 느낀다. 성경은 자연을 결코 죽어 있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온갖 방식으로 자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고, 하나님의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땅이 떨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격노하시어 땅의 기초를 흔드시기 때문이다.

어두워진 창공에서 “하나님이 허리를 굽히고 내려오신다." 회오리바람 속에서 ‘‘하나님이 그룹을 타고 나셨다." "물의 깊은 심연이’’ 거품을 일으킬 때, 그것을 꾸짖고 “그 콧김의 바람으로’’ 물러가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번개 불은 하나님께서 창공으로 쏘시는 화살이다. 하늘이 어두워지면 별들이 나타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별들을 불러내시고, 그 가운데 하나도 떨어지지 않게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높은 데서 산에 물을 대신다. 하나님께서 샘들이 솟아나게 하시므로 물이 골짜기 사이로 흐른다. 하나님께서 가축들을 위해 풀이 자라게 하시고, 사람을 위해서는 땅에서 빵이 나오게 하신다. 바다를 갈라 거품이 일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영적으로 훈련받은 귀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선한 목자로서 자기 앞서 길을 인도하시는지 살피고, 지팡이와 막대기로 땅을 두드리며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을 듣고 그로 말미암아 위로받는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은 자연을 생생한 시인의 눈으로 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교 시인들도 그런 식으로 자연을 묘사하였다. 그것이 아니다. 자연에서도 모든 것은 신앙을 위해 존재한다. 즉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를 계시하고, 이 모든 자연의 생명체 속에서 살아계신 전능한 하나님께서 그의 전능하심과 신성, 위엄에 대한 장엄한 인상을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채우기 위해 여러분 주위에 계시고 여러분과 함께 계시다는, 따뜻하고 소중한 느낌을 여러분에게 전달해 주기 위해 이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곧 자연 속에서 언제나 여러분을 두르고 있고 여러분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은 만물의 영장으로 임명한 사람에게서 가장 풍성하게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서 생명을 계시하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신성하다. 그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고 말씀하시고 나서, 주님은 이 큰 계명을 전혀 다른 계명으로 바꾸어서 말씀하신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시며, 이 둘째 계명에 대해서 그것이 전적으로 첫째 계명과 같다고 선언하신다. 위엄이 있으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자신의 이웃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이고 같은 계명인 것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사랑하고, 사람 안에서 혹은 이웃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형태와 성취는 다르지만 계명으로서는 같은 한 계명이다. 잘못된 과학은 마치 죽은 물질로부터 저절로 서서히 식물이 진화하였고, 이내 식물로부터 동물이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동물로부터 저절로 사람이 진화하였다는 사상을 사람들에게 점점 더 강요한다. 이 지식에 진화론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다윈은 이 새로운 복음의 선지자라고 불린다.

이 전체 가설은 불신앙적인 사고의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가설에는 이 진리가 있다. 즉 온 창조계는 마치 사람이 제사장으로 봉사해야 하는 성전처럼 우리 주변에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사람을 가리키고 사람을 필요로 한다. 결국 사람이 이 자연의 성전에 나타날 때, 앞서 간 모든 것이 사람의 도래를 위한 준비에 기여한 것임을 알게 된다. 사람을 일컬어 세계의 축소판이라고 한 것은 전혀 헛된 말이 아니다. 오직 사람에게서 창조가 정점에 이른다. 자연 속에서는 휘장 뒤에 숨어계신 전능한 하나님이 사람안에서는 친히 자신을 계시하여 나타나시는데, 단지 권능과 위엄 가운데서만 나타나시지 않고 그 보다는 영으로서 더 많이 나타나신다. 사람에게는 자기 인식이 있고, 분명한 의식이 있다. 하나님을 따라서 하나님의 생각을 생각함이 있고 뜻을 드러냄이 있으며 거룩함에 대한 갈망, 천재성 의 번뜩임,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감상, 이상적인 것에 대한 추구가 있으며, 영원한 존재에 대한 진술, 인격적인 한 존재에서 보는 존재의 전체성(구체화), 영원한 존재인 하나님에 대한 생래적인 지식 등이 있다. 이 모든 것이 사람에게만 있는데, 이는 순전히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어떤 건축가가 지은 왕궁을 보고 그 건축가를 알 수 있다. 노래를 보고 노래를 지은 시인을 알고, 위대한 사상가를 그의 작품을 보고 알 수 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 대가들의 실제 모습을 보고 그의 얼굴 모양과 눈빛, 표정을 보았을 때는 그에 대한 인상은 전혀 달라진다. 실상이 그와 같다. 최고의 건축가이자 예술가께서는 먼저 자연에서 자신의 작품을 여러분에게 보이신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오셔서는 사람 속에서 그의 형상, 곧 자신의 형상을 여러분에게 보이신다. 단 한 사람으로 이것을 계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수세기가 흐르는 동안에 사람에게서 수 백 만명의 개인들이 태어나고 살다 죽었다. 이 수 백 만명의 사람들 가운데는 우슬초도 있고 백향목도 있었다. 백향목처럼 사람들의 숲에서 우뚝 솟은 소수의 위대한 예들에서 하나님에 대한 계시가 훨씬 더 뚜렷하게 나타났다. 여러분이 위대한 인물들 가운데서 나타났던 모든 덕과 우수성, 탁월한 재능을 모두 하냐로 합칠 때, 위대하고 압도적인 그 전체 모습은 자연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를 훨씬 더 초월하는 계시를 보여준다.

그것이 진실이다. 죄 때문에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되고 망쳐지지 않았다면, 일이 어떻게 되었겠는가?  지금은 혼란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비추는 거울이 깨어져 수많은 금이 가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 오래되어 손상되었고 흐릿해졌다. 그 형상의 특징을 이루는 선과 부분들을 여전히 알아 볼 수 있지만, 하나님 형상의 통일된 아름다운 모습이나 깨끗한 품격은 더 이상 볼 수 없다. 그럴지라도 이 형상이 여전히 여러분의 홍미를 일으키고 주의를 끌며 언제나 계속해서 따뜻한 공감을 채우는 것을 생각할 때, 아담이 자기 앞에 있는 하와에게서 손상되지 않은 이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을 때 그 모습이 아담에게 어떠했겠는가. 그리고 즉시 그리고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이 거룩한 형상을 훼손시킨 타락이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사실, 사람들에 대한 여러분의 경험은 매우 쓰디쓴 것일 수 있다. 주위의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사랑보다는 미움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최상의 것을 영구히 주는 역사가 있다 최상의 인간 삶에 대한 최고로 풍부한 이 계시로 인해 여러분은 다시 사람과 회목하게 된다. 역사의 미술관에서 일반 세상의 영웅과 믿음의 영웅들을 생각해 보라. 사도가 선언하듯이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야"(히 12:1)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인데, 타락한 사람에게서도 나타나는 계시이다. 여러분 속에서 사랑이 깨어난다면, 이것은 사람으로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묘사하는 말인데, 사랑은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하는 영광스런 미덕이다. 곧 사람의 재능과 사람의 천재성, 사람의 영웅적 행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데, 특히 인간의 사랑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인간의 사랑, 그것이 정점이다! 여러분 자신 안에 신비한 어떤 것이 있는데, 이것은 여러분이 인생의 길에서 만나는 또 다른 사람에게 있는 마찬가지로 신비한 어떤 것에 끌려 움직인다. 그럴 때 여러분은 그 사람의 약점을 눈감아주고 죄를 용서하며 못난 것을 더 이상 지적하지 않으며, 사랑이라는 신비한 능력으로 그를 감싸서 약점이 드러나지 않게한다. 이 사랑이 진실하지 않을 수 있고, 그래서 죄가 될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동정의 따듯한 불꽃이 여러분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키고,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가 여러분에게 나타나는 것은 바로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어 대한 이같이 사랑을 통해서이다.

첫째로, 이 사랑은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면 여러분의 사랑은 제한되고 편협하며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거부한다. 이 사랑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 어두운 무관심으로 주위에 짙은 그림자를 던지는 빛이다. 그것은 사랑이지만 이기심에 사로잡힌 사랑이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지만 하나님을 위한 사랑은 아니다. 우리가 사랑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몇 몇 사람을 위한 사랑은 이웃을 위한 사랑이 아니다.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피조물로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다. 그러나 성령은 이 사랑을 깨끗이 씻고 정련하는 일을 하신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같이 되어야 한다. 두 사랑 사이에 갈등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여러분 마음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뒤로 밀어낼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랑은 점점 더 걸러져서 순수해 진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께 속한 것을 사랑하고, 마찬가지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사람속에 있는 악한 것을 미워하며 악한 것을 견디지 못하고, 진지한 사랑의 힘을 발휘하여 마음에서 악이 사라질 때까지 악을 억누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모든 사람 속에 아무리 깊이 숨겨져 있을지라도 사람의 영혼 속에서 여전히 타오르고 있는 하나님께 속한 것은 무엇이든지 찾아내고, 이 불꽃을 점점 더 키워서 꺼지지 않도록 하는 길을 연다. 아무리 철저히 타락하고 죄로 말미암아 아무리 죽었다고 할지라도, 무덤 이 편에 있는 모든 사람 속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다는 증거가 여전히 남아있고, 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때 이웃에 대한 사랑이 절정에 이른다. 최고급 도자기를 사랑하는 애호가는 그 가치를 알기 때문에 깨어진 도자기 조각들을 다시 붙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아주 조심스럽게 조각들을 모은다. 그럴지라도, 이웃에 대한 사랑은 사람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하나님께 속한 것에 대한 사랑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둘째 계명은 첫째 계명과 같은 것이다.

출처 자기부인 / 바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