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저술에서 그는 성서와 기독교를 비판하는데, 성서가 신에게서 온 책이라면 인간이 쓴 책보다 더 정확하고 더 잘 쓰여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사람마다 상이하게 해석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로 인해 성서는 삶의 안내서로서 제 역할을 다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기독교를 비판함에 있어 기독교의 이적(異蹟)을 이교도의 설화와 비교함으로써 그 신뢰성을 약화하는 고전적 방법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처녀잉태설을 우주에 의해 처녀의 몸에 잉태되어 태어난 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샴족(Siamese)의 설화와 비교함으로써 기독교를 한낱 미산으로 격하하고 있다. 그는 또한 반성직주의를 표방했고, 성서에 나오는 모든 기적과 계시 그리고 예언을 오리게네스 같은 초대 기독교 사상가들처럼 비유적으로 해석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이신론은 섀프츠베리와 달리 이신론의 구성주의적 측면은 거의 없고 주로 기성 종교에 대한 비판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그의 이신론은 섀프츠베리의 경우보다 더 내용이 빈약한 것이 되어버렸다.
울러스턴은 목사로서 은퇴한 후인 1722년에 출간한 『자연종교의 묘사』 (Religion of Nature Delineated)로 인해 이신론자로 알려졌다. 그는 은퇴한 목사답게 종교에 대한 누구보다도 사려깊은 성찰을 통해, 주로 기독교 비판에 주력한 다른 이신론자들과 달리 이신론의 구성주의적 측면에 관심을 기울였다. 울러스턴이 관심을 기울인 것은 자연종교의 윤리적 측면으로 허버트 경의 자연종교와 대동소이한 내용이었다. 그는 최초의 원인으로서 신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영혼의 비물질성과 불멸성을 주장했다. 그는 칸트가 『실천이성비판』(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1788)에서 주장한 것처럼 정의롭고 선한 사람은 항상 이승에서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하며 악한 사람 역시 그에 합당한 징계를 받지 못하기에, 이승에서의 부정의와 불평등을 시정하기 위해서 내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울러스턴이 기독교적 이신론자였다면 울스턴은 이산론자 가운데 가장 독설가이자 극단적인 반기독교적 인물이었다.
그는 콜린스처럼 주로 성서의 기적을 비판했는데, 콜린스가 그랬던 것처럼 초대 교부들이 기적을 우화로 이해했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성서의 기적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경우 그것은 매우 불합리하고 비개연적이며 우스꽝스러운 사건이 되어버린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성서의 기적을 이방 설화에 나오는 기적과 비교하는 방식으로 비판했는데,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바꾼 기적을 1세기경 소아시아를 떠돌던 현자 티아나의 아폴로니우스(Apollonius Tyaneus)가 행했다고 전해지는 기적 이야기와 비교함으로써 성서의 기적 이야기가 사실은 이방 설화에서 도입된 조작된 이야기임을 암시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강력한 기독교의 적대자였는데 다른 이신론자들이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면서도 그에 대한 존경을 표한 것과 달리 인간으로서의 예수조차 좋은 사람이라고 보지 않았다. 이러한 극단적인 반기독교적 견해로 인해 그는 여전히 기독교의 영향력 아래 살고 있던 당시 사람들로부터 반발을 샀다.
영국 이신론자들 중 가장 매끄러운 필체로 이신론적 견해를 전개한 인물은 오랫동안 옥스퍼드대학 변호사로 재직했던 틴들이다. 그에 따르면 신은 불변하는 완벽한 존재이기에 그가 인간에게 최초로 허락한 종교 역시 개선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이같은 사실은 신은 어떤 특정 민족을 선택하거나 편애하지 않는 공정한 존재라는 사실을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따라서 그는 신의 공정성에 비추어볼 때 일종의 편애라고 할 수 있는 특별계시나 특별은총이란 있을 수 없으며, 신은 모든 인간이 알 수 있는 방도(보편계시)를 마련해 놓았다고 보았다. 이런 맥락에서 창조시 인간에게 허락된 자연종교는 그 자체로 완벽한 것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인생의 문제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는가”이다. 죄를 용서함은 죄에 대하여 죽는 데 이르는 길이다. 다른 길은 없다.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죄를 품고 지낼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고, 위에 있는 아버지 집에 거할 수 있는가? 이것이, 그리고 이것만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그리고 영원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중대한 인생 문제이다. 그래서 세상의 수수께끼이며 우리 영혼의 수수께끼인 이 문제는 영원히 그리고 언제나 이 한 가지 사실로 귀착된다. “내게 은혜와 죄 용서함과 온전한 화목이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사죄를 구하는 짧은 기도를, 우리 자신이 용서해야 한다는 규정에 단단히 묶어놓으셨다는 사실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에 바로 이어서 여러분 영혼의 생명을 위하여 하나님의 사죄라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나온다. 그러나 이 기도를 구하려면 반드시 먼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라고 정직하게 말할수 있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것이다. 여러분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진심으로 용서하게 만드는 지극히 깊은 사랑을 가지고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같이 사랑하는 사람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하고, 여러분의 죄가 산처럼 높이 솟올지라도 바다 깊은 곳에 던져버리시는 그같이 지극히 고귀한 하냐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무 대담해서 말하기가 쉽지 않은 중요한 이 사상, 곧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지를 우리가 용서를 실행함으로써 배운다는 것, 말하자면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알기를 배운다는 사상 자체가, 바로 우리 하나님에게서 나타난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은 말이나 감정만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원수를 사랑하기 때문에 원수를 마음으로부터 전적으로 온전히 용서한다. 그는 원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고 하나님 알기를 배우며,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그 사랑이 도한 자기를 향한 사랑임을 배운다.
이 사랑이 여러분 자신에게서 시작되는가? 그래서 여러분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여러분속에서는 어떤 것도 사랑으로 시작하는 것은 없다. 여러분 영혼 속에서 사랑의 첫 불꽃이 타오르기에 앞서, 거기에 불을 붙이신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손이었다. 여러분은 좀처럼 솔선해서 사람을 용서하기가 어렵다. 여러분이 용서를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용서를 하는 가운데 죄 짓는 일을 할 수가 있다. 영혼이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 정도로 순수한 마음으로 사람을 용서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종종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이 용서한다는 말을 듣고, 여러분 자신도 세상 사람처럼 용서를 했다고 하는데, 사실은 우월감에서 한 경우가 많다. 여러분의 원수가 아주 하찮은 존재여서 그의 잘못을 들추어 낼 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에 대한 미움을 전혀 품고 있지 않은 데서 여러분이 얼마나 덕이 있는 사람인지를 보여 주기 위해, 마음에서 그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리고 더 이상 그 때문에 시달리고 싶지 않아서 용서를 한 것이다.
물론 그런 용서는 이름만 같을 뿐, 참된 용서로서 공통점은 전혀 없다. 반면에 우리 아버지께서 생각하시는 것은 아주 참되고 실제적인 깊은 사랑에서 나오는 용서이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용서하신다면, 나는 구원을 받았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그때 내 마음에 이 사랑을 일깨우셨고, 용서하는 이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일어나 내 영혼 속에 넘쳐 홀러들어오도록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전에는 하나님의 원수였으나 이제는 그의 자녀가 된 나에 대한 영원한 사랑 때문에 내가 자비를 얻었듯이 이렇게 내가 원수를 용서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요일 4:8) 라는 사도의 말을 들을 때, 대개 양심은 자기만족으로 잠이 든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범죄자들도 동물이나 자식, 아내를 사랑하며, 때로는 자기를 희생하기까지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라고 할 때 그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사랑으로 살지 않는 사람, 사랑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는 사람, 사랑하는 일을 기뻐하지 않는 사람, 불의 시련을 견딜 수 있는 사랑이 없는 사람을 듯한다.
그래서 사랑은 이 맹렬한 불의 시험을 받는데, 마음에 맞는 사람에 대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훼방하는 사람, 사실 원수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 시험을 받는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사랑의 진실함은 오직 용서하는 일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 여러분을 기분 나쁘게 하고 방해하며, 여러분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사람을 용서하는데서 사랑의 진실성이 드러난다. 사랑하는 것이 의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에 대한 사랑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는 이것만이, 하나님 아는 것을 배우도록 만드는 사랑이 여러분 속에 있다는 증거가 된다.
하지만 이런 사랑은 생각할 수 없고, 불가능하며, 간단히 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라고 여러분은 말한다. 하나님을 위해 용서하고, 내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용서하며, 그리스도인의 의무로서 용서하는 것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순전히 그 사람을 사랑해서 용서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그 사랑을 요구하신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라"(녹 6:27.28).
여기서 이 문제의 근본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 22:37-39). 그런데 이 이웃은 어느 때라도 여러분의 원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이웃을 사랑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 둘째 계명이 어떻게 첫째 계명과 같은가? 그 답은 이것이다. 여러분이 이웃 속에 있는 하나님의 것을 사랑할 때에만 그것이 가능하다. 그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없다. 그의 죄를 사랑해서도 안 되고, 여러분에게 지은 그의 죄를 사랑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그것들을 미워해야 한다. 여러분은 자연을 사랑한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신성이 자연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동물을 사랑한다. 하나님께서 동물을 그처럼 놀랍게 조직하고 동물의 본성을 심어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람으로서 여러분의 이웃을 훨씬 더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이고,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지으신 은사와 재능들 때문에, 그리고 사람 속에 심어놓으신 본질적인 존재의 배아 때문에, 사람인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망가졌고, 모든 것이 타락하고 못쓰게 되었으며 절망적으로 사탄적이 되었다면, 그의 속에는 더 이상 하나님의 것이 없고, 사랑이 고치며 미움으로 변한다. 사탄은 놀라운 피조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받은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자녀는 이 괴물을 미워한다.
그러나 아무리 철저히 타락했을지라도 사람은 이생에서 사탄과 같은 존재는 아니다.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기뻐하고 있다. 가장 멀리 떠난 사람을 예수께서는 다시 살리셨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적용되는 복음은, 모든 사람 안에 곧 여러분의 원수 안에, 생명에 이르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접촉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만 복음이 여러분의 구원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해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아주 멀리 떠난 죄인 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불꽃을 계속해서 사랑할 수가 있다. 그런 사람만이 죄인인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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