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어디로부터 오는가라는, 예로부터 내려 온 질문에 대해 그리스도의 교회는 두 가지로 답해 왔다. 그 지식은 자연으로부터 고리고 성경으로부터 온다고 했다. 이것은 밖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리키는데, 추상적인 개념으로 표현될 수 있고, 그러므로 교회의 신조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지식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영적 경험을 통해, 성도들의 교제를 통해, 그리고 은밀히 하나님과 동행하는데서 개인적으로 오는,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아는 지식은 포함되지 않는다.
반면에 밖에서 오는, 하나님을 아는 이 최초의 지식에는 위엄이 있다. 지금은 자연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만을 살펴보자. 한 신앙고백서에서 선언하듯이, 우리 주변의 전 창조계는, 개별적인 피조물 하나하나가 글자로 쓰인 생생한 책과 같다는 것은 아름답고 참된 말이다. 그렇지만 이 자연의 책은 하나님의 속성들, 곧 그의 전능하심과 지혜, 선하심등의 속성을 알게 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데려가지 못한다. 영적 나라의 삶에 대해,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에 대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에 대해, 사랑이신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끄는 사랑으로 충만해짐에 대해, 심지어 신비한 묵상에 대해 자연의 책은 아무것도 말해 주지못한다.
교회의 신조는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이 영광스런 위엄으로 충만하신 분임을 명백히 써서, 세상 앞에 높이 들어 올리는 깃발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좀 더 친밀한 지식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친밀한 지식은 자기 인식으로부터, 개인 영혼의 경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좀 더 친밀한 지식이 전면에 나타나게 되었다. 경건한 책들은 이 세상에게 말을 걸지 않고, 성도들 가운데서 그리고 성도들에게, 곧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하였거나 적어도 향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에게 영혼의 경험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는 이 신비의 성소에서 병직인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고 거듭 말해 왔다. 그리고 이제 자연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다루게 되었는데, 이는 그 지식을 객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영적 생활에 짜넣기 위해서이다. 이 점에서 또한 방황하는 영혼은 종종 불쌍하게도 스스로 빈곤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자연의 움직임에 하나님의 속성들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배웠고 동의하였다. 나는 그 사설로부터 하나님은 능력과 지혜와 선하심이 크신 분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 되므로, 이제 자연의 책에 대한 관계는 끝이 난다. 이 책에서 오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이것이 전부이다." 이렇게 해서 이 책은 닫혀져 있다. 그래서 자연이 하나님의 위엄에 대해 우리에게 주는 개인적으로 깊이 통찰하는 인상이 없다. 사람은 그런 인상을 찾지 않는다. 그런 인상을 더 이상 중시하지 않는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의 피상적인 종교를 위해 되도록이면 자연에 호소하는 것을 보면 화가 날 지경이다.
사람들이 우졸한 태도로, 교회는 이제 전성기가 지나갔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 의미를 상실하였지만, “자연의 성전에서는’’ 종교적으로 더 풍성한 것을 향유한다는 말을 들으면 참으로 화가 난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신자들에게도 잘못이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신자들의 바른 평가가 아무리 칭찬할 만하고,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그들에게 오는 보배로운 지식이 아무리 풍성하다 할지라도,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자연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다"(롬 1:20)는 것도, 마찬가지로 마음에 담아두어야 할 사실임을 신자들이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발전하는데 세 단계가 있음을 본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자연으로부터 시작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사람에게 이르며, 최종적으로는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에 이른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시기(히 1:3)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이 지식은 자연으로부터 시작하고 사람에게서 확장되며, 메시야에게서 완성된다. 이 세 단계는 느슨하게 냐란히 놓여있지 않고, 이를 테면 솟아오른 피라미드 모양을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피라미드는 자연이 넓은 바닥 부분을 이루고, 인간 생명의 풍부한 전개가 그 위 부분을 형성하며 영원한 말씀의 성육선에서 정점을 이룬다.
사람에 대한 지식을 떠나서는 그리스도를 분명히 보지도 이해 하지도 못한다. 그리고 의식 없는 자연을 공감하는 태도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사람을 분명하게 보지도 알지도 못한다. 일이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면, 신자들은 항상 자연에서 하나님의 위엄을 보고, 인생이나 인류 역사가 자기들 안에서 반복된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럴 때에만 신자가 풍성한 은혜 가운데 하나님을 자기들에게 계시하시는 그리스도를 분명하고 완전하게 그리고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이 점이 신자들에게 맞는다는 것은, 이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자기 계시 가운데서 나왔고 또 계속해서 나온다는 사실 때문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의식 없는 자연 가운데서 자신을 계시하기 시작하셨다. 자연을 통한 계시가 완성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은 더 풍성한 자기 계시인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다. 그리고 사람이 타락하고 범죄하여 그 계시를 거의 파괴하였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가장 풍성한 자기 계시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다. 이제 신성한 이 세 연결고리가 어떻게 서로 조화를 이루는지 살펴보자
첫째로, 물질적인 세상이 있다. 그 다음에 이 세상 티끌로부터 사람이 창조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야 혈과 육신을 입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의 계시가 온다. 여기서 출발점은,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신다는 것이다. 이 점을 잘 알도록 하자.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영원한 분은 보이지 아니한다. 언젠가 우리가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라는 말을 명확하게 듣는다. 그렇다. 우리가 서로를 아는 것처럼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 가장 고상한 지식은 지적인 지식도 아니고, 영적인 지식도 아니다. 가장 고상한 지식은 통찰력, 곧 직접적으로 명확하게 보는 것이다. 중간 매개 없이 보는 것이고, 거울 없이 보는 것이다. 바로 본질적인 존재를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기관이, 아무리 잠복해 있다고는 하지만, 현재 영혼 속에 잠재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 일이 어떻게 우리에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영원의 신비이다. 지금 시대에는 이 기관을 사용할 수 없는 것 또한 확실한 사실이다. 지금은 제한의 시대, 유한의 시대이다. 즉 형태와 색깔과 차원에 묶여 있는 시대이다. 여호와 하나님께는 경계도, 끝도, 형태도, 차원도 없으시므로, 지금 시대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으시는 분이다. 우리는 이생에서 하나님을 명확히 볼 수 없다.
이 사실로부터 나오는 질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장엄하신 하나님이 이생에서 자신을 계시하여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볼 수 있게 되느냐는 것이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이 목적을 자연 속에서 이루셨는데, 그 자체로는 유한하면서 무한자에 대한 인상을 심어 주는 차원들을 통해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신성을 우리에게 계시함으로써 이루셨다. 이것이 소위 장엄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면서 사람의 인격적 존재 안에 하나님의 인격적 생명의 양태를 두심으로써 목적을 이루셨다. 그리고 셋째로,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훼손된 이 형상을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시의 순수한 상태로 회복하고 또 우리에게 보여 줌으로써 이 목적을 이루셨다. 그렇다면 자연 안에, 그리고 자연 뒤에 바로 하냐님이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은 하나님 밖에서 그리고 하나님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완성된 예술 작품이 아니다. 매일 밤 여러분에게 별이 총총한 하늘을 보여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빛의 색깔에서, 동식물계의 기이한 일들에서, 장엄한 바다에서, 태풍의 거센 소리에서 매일 하나님의 위엄을 보여 주시고, 심지어 우렁우렁 하는 천둥소리 속에서 때로 하나님의 위엄을 듣게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 모든 것 속에 여러분이 경배하는 하나님이 계시고 활동하신다. 자연계의 생명의 전율 속에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의 떨림이 있다. 이 창조계 안에서 움직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 창조 계속을 흐르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 창조계에서 솟아나 여러분 에게로 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활동하는 것이다. 그렇다. 모든 자연은 다름 아니라 살아서 맥박이 뛰는 휘장이다. 그 뒤에 바로 하나님이 숨어 계시면서 휘장의 주름을 통해 하나님의 위엄 있는 모습을 여러분에게 계시하시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자연 속에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분명히 본다고 말할 때, 이 진리를 그처럼 심오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분명하게 본다는 것이 중요한 점이다. 이 스크린을 통해, 이 휘장을 통해, 자연의 이같은 제공을 통해 여러분은 신성이 충만한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자연을 온갖 다양한 선과 형태로 이루어진 죽은 왕궁으로 보지 않고, 푸른 하늘과 구름 떼 앞에서 그 지상의 피조물 앞에 서면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임을 느끼고 알며, 이 모든 것 속에서 여러분에게 다가오고, 이 모든 것 속에서 여러분에게 말을 거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느끼고 알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장엄한 손을 보도록 해야 한다. 종달새가 여러분을 위해 노래하게 만드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바다를 갈라 거품이 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해를 그 장막에서 불러내고, 저녁 무렵에는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밤마다 별을 반짝이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천둥 속에서 그 음성을 여러분에게 울려내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느끼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분명히 보는 사람만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의 영광을 안다.
출처 자기부인 / 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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