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카이퍼

제 41장 네 힘을 다하여

새벽지기1 2021. 9. 14. 06:50

이 각박한 사회생활에서 아직 선한 것으로 간주되는 사랑에 대해서 피상적인 얼버무림을 하거나 흥분해서 거만을 떠는 것처럼 기독교인을 성나게 하는 것은 없다. 하늘과 땅에서 가장 고귀한 것을 취급함에 있어서, 불신앙적인 그룹이나 절반쯤 믿는 그룹에서, 그것도 특히 전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해방된 여성들이, 점차적으로 복음적 신앙고백에 항거하기 위해서 몇 번이고 고귀한 사랑의 이상을 남용하는 것을 들었을 때엔 더욱 그러하다.

 

그때에 사랑은 종교의 전부라고 일컬어진다. 아무것도 더 이상 요구되지 않는다. 구약은 아주 무자비스럽다. 잘못한 사람들을 징계하는 바울은 때때로 너무나 가혹하게 보이지만 고린도전서 13장에 있는 사랑의 찬가만은 인기를 끄는 것이다. 사랑의 사도인 요한 한 사람만이 흠모할 만한 대상이다. 왜냐하면 그가 예수를 반대하는 자들을 멸망시키고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것을 원했다거나 요한 2서 10절에 분명히 기록된, 그리스도의 교훈을 부인하는 자를 집에 들이지도 말라는 충고는 사실이 아니며, 그의 서신서들은 근거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랑의 옹호자들은 예수님이 단지 온유하고 친절한 사랑에 의해서만 행동하셨다고 주장한다. 비록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는 엄격하게 심지어는 예리하게 비판적으로 대하기도 했지만 이것은 바리새인 자신들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오늘날 판에 박힌 형식주의 기독교인들이라 할 수 있는데 그들은 용서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바는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은 법의 밖에, 그리고 사랑의 법 외곽지대에 서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 잘못된 사랑관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말씀하신 주님으로부터 냉혹한 판단을 받게 되리라고 생각지 않는가? 오! 확실히 사랑이, 단지 사랑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사랑이야말로 가장 고상한 것이며, 유일하며 최대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서가 있다. 즉 모든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부터 나와야 한다. 말하자면 여러분의 사랑의 삶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제일 앞에 있고, 그리함으로 하나님을 위한 사랑이 자신의 모든 사랑을 지배하게 됨으로써,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 그런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마음과 목숨과 뜻만으로는 아주 명백하고 명확하게 표현되지 않았다는 듯이, 주님께서는 여기에 네 번째 요구를 덧붙여 여러분의 양심에 명령하신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여러분의 힘을 다한 것일 때에만 비로소 고상한 이념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예수께서는 많은 형식적 그리스도인들이 빈번히 범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나 또한 그의 거룩하심을 중요시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구세주는 사랑 위에 또는 그옆에 다른 아무 것도 놓지 않으신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만으로 아주 충분하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랑이 대체로 이웃을 향해서만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신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위한 사랑이 가장 우선될 것을 요구하시며 원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을 위한 사랑에는 한계점이 없다는 것과 그 사랑은 힘을 다하는 것이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원하신다. 

 

목숨 마음,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느낌에서 끝나거나 아니면 생각에만 머물러 있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한다고 할 때에 그것은 실제적 삶, 인격적 존재, 인격과 삶의 모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힘은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모든 능력이다. 그것은 의지에 따라 표현할 수 있는 능력 자질 수단과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 주어진 시간, 가진 힘을 냐타내 보일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인 것이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이 모든 능력들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책임감을 의식하며 우리가 그 능력들을 행사함에 있어서 무엇보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으뜸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예수님은 명령하고 계신다. 이것을 잘못된 영적 의미로 해석하지 말라. 현재 유행하고 있는 인간적 사상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우리가 단지 종교적이고 영적인 일에 몰두하게 될 때에만 표현된다는 생각이다. 

 

이에 따르면 하나님 말씀의 사역자가 되는 사람은 법학이냐 약학을 연구하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욱더 사랑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선교에 전념하는 사람은 인쇄업에 전력을 기울이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더 헌신하는 것이 된다. 불행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기관은 과학적 연구를 하는 기관보다 더 우월한 것이 된다. 요약해서 말하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광범위한 일반은총 범주의 생활에서보다 특별은총 영역에서 예배에 의해 보다 더 우월하게 표현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전능하심은 영혼 구원의 좁은 영역에만 제한되고 얽매이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모든 삶에 적용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우리 모든사람들에 의해 각자의 재능과 소명에 따라 인생의 전 활동 영역에서 동동한 열심과 능력을 다해 표현되어야 만한다.

 

화가나 조각가는 선교사나 자선가처럼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께 진실된 영광을 돌려드리도록 해야만 한다. 어떤 천한 직업이라 하더라도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것은 없다. 교회 외양간을 지키는 농부는 교회 관리라는 의무감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사랑으로 인해 늘 힘을 다하여 외양간과 곡창에서 하나님을 섬겨야만 한다. 가정주부는 가정의 훈련된 보모, 또는 외지에서의 여선교사처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성스러운 소명을 받은 것이다. 가정주부나 하인은 일반적인 생애라고 경시하고 간호원은 성스러운 직업이라고 단언하는 잘못된 이원론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타락시키는 것이다.

 

세 가지 죄악이 우리의 삶을 유혹한다. 즉 우리에게 부여된 능력을 사용하지 않거나 오용, 또는 남용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늘의 별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 않는 것이 없듯이 하나님께서 주신 금가루를 갖고 있는 모든 사람은 아이나 어른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빛을 발하며 반짝거려야만 한다.  그러나 별들도 하지 않는 것을 게으른 사람은 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달란트를 갖고 있으나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수익을 증진시키는 대신에, 파묻어 두는 사람을 종종 보게 된다. 여기에서 영원하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찾아볼 수 있을까? 분명히 각자의 숨겨진 달란트를 충분히 개발하는 데는 노력과 자기 부정이 요구된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사랑하는 하나님을 위해서 이러한 노력, 희생, 자기부정을 할 수 없을 때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만일 이 은밀한 금가루들이 자기충족이나 나태함의 먼지에 가려져 있는 대신에, 대중이 보는 앞에서 반짝인다면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이 훨씬 더 영광스럽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재능의 오용은 또 다른 것이나 이것 역시 하나님 앞에 죄악되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결여된 것이다. 이 경우에는 모든 노력과 희생이 아낌없이 경주되지만, 그 목적이 자신의 지위 확보와 세상에서의 출세,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하는데 있으며 하나님을 향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촌경을 받는 가운데 부유해지기 위한 것이다.  이 경우에 사람들은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고 수고한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부터가 아니라 이기적인 동기에서 그렇게 한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말미 암아, 천부께서 자기의 모든 요구 사항을 공급해 주시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아이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예처럼 일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그것은 재물을 위한 것이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사람은 하나님과 그의 거룩하심에 반대하는 가운데, 재능의 남용이라는 더 악한 죄에 빠져 들기가 쉽다. 오, 누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일등성처럼 반짝였던 사람들과, 거룩한 것을 파괴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하고 신앙을 거부하며 마침내 교만을 부리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의 신앙까지 파괴하는데 자신들의 뛰어난 재능들을 남용했던 사람들을 구별 할 수 있을까? 방종과 허무를 일삼고, 영혼을 하나님으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재능을 남용했던 가수들과 화가들을 누가 모르겠는가? 얼마나 많은 재치들이 거룩한 것을 조롱하고 그것을 가소롭게 보이게끔 하기 위하여 남용되었는가? 얼마나 많은 날카로운 통찰력이 거짓말과 부정직을 부추김으로써 속임수와 교활함으로 빠져 들어 갔는가? 얼마나 많은 수줍은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이 순수하지 못한 의도와 쾌락을 위한 욕망에 의해 죄악을 범했는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항하는 증오심이 이 모든 남용들을 통해 나타나 보여진 것이다. 우리에게 맡겨진 은사와 재능들을 사용하지 않거나, 오용 및 남용하는 것에 반대해서 예수께서는 여러분에게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셨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세상 사람들의 양심에 호소하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을 알지 못하며 모든 참된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거룩하신 성호를 고백하는 신자들에게 조금의 부족도 없는 완전한 요구를 하고 계신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서, 여러분이 영원하신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사랑을 깨닫고 또한 모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기 전에는 여러분을 결코 놓아 주시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