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생명 돌봄의 축복 (출애굽기 2:1~10)

새벽지기1 2021. 1. 3. 07:52

“한 생명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은 이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삶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에 속한 삶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생명을 어떤 태도로 대하는 지를 보면 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은 생명을 경시합니다. 생명이 죽어가는 것에 대하여 무감각합니다. 또한 악한 권력자들은 대개 죽음의 영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때로 전쟁을 일으켜 생명을 앗아가고, 수많은 고아들이 생겨나게 합니다. 죽음의 영은 생명을 버리도록 유도하기도 합니다.


출애굽기 1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많은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왕이 권력욕에 빠지고 죽음의 영에 사로잡혀서 히브리인의 자녀로 태어나는 사내아이를 모두 죽이라는 끔찍한 명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이렇게 무섭고 고통스러운 현실이 주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으로 이주해서 번성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으로 이주해서 번성한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면 위험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것 또한 하나님의 섭리임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좋지 않은 일, 받아들이기 힘든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이스라엘은 절망 속에서 믿음을 잃어가고 있는 형편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믿음의 사람을 택하여 준비하십니다. 당시 애굽에 체류하던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문화에 동화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애굽 문화를 제거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는데 단 하
루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애굽 문화를 빼는 데는 40여년의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레위지파 아므람, 그 아내 요게벳을 통해 모세가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사단의 종노릇하는 악한 권세가 세상을 아무리 어둡게 만들어도 새로운 생명을 통하여 역사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막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돌보는 이들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십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믿음으로 모세의 부모는 모세가 출생했을 때 그 아이를 석 달 동안 숨겼습니다. 이는 그 아이가 남다른 것을 보고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히 11:23). 그들은 바로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히브리인의 자녀로 태어나는 사내아이는 모두 죽임을 당해야 하는 명령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내아이를 숨기는 행동은 바로의 명령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불의한 명령에 용기 있게 저항했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갈대상자에 아이를 담아 나일 강둑에 두었습니다. 아이를 갈대상자에 담아 나일 강둑에 두는 것 또한 위험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생명을 맡겨 놓았습니다. 갈대상자가 혹은 나일 강둑이 아이를 보호해 줄 거라는 믿음으로 갖다 놓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생명을 맡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믿음의 행동에 응답하셔서 모세의 생명을 돌볼 사람을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은 바로의 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을 통해서도 생명을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때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을 통해서도 역사를 이루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려고 준비하신 사람은 모두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인물이었습니다. 바로의 딸이 갈대상자에 누워 있는 아이를 발견하고, 불쌍히 여기고, 자신이 돌보기로 결정합니다.
“바로의 딸이 상자를 열어 보니 한 아기가 울고 있었습니다. 바로의 딸은 불쌍한 마음이 들어 ‘ 히브리 사람의 아기인가 보다’ 라고 말했습니다”(6절). 바로의 딸이 이 아이를 돌보는데 두 가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버지 바로의 명
령입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어떤 명령을 내렸지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아버지에게 저항하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또한 바로의 딸은 아버지에게 이 아이가 히브리 사람이라는 것을 숨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히브리어로 ‘ 모세’ 는 ‘ 물에서 건져냄’ 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이집트어로 ‘ 아들’ 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장 과정에서 히브리인의 자녀라는 것을 감출 수 없을 때가 왔을 것입니다. 모세가 어느 때에 친모로부터 양육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히브리인임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히브리인인가 이집트인인가 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혼란의 과정과 상황을 예상하고도 바로의 딸이 이 아이를 돌보기로 결심합니다. 둘째, 인종적 차이입니다. 당시 상황에서 히브리인의 아이를 데려다 키운다는 것은 엄청난 정치적 부담을 가지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종이나 타민족에 대한 경계심 또는 배타심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의 딸이 이 두 가지 장애물
을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이 무엇일까요? ‘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이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모든 장애물을 극복
하고 생명을 돌볼 수 있는 유일한 힘입니다. 구약에서 사랑이나 긍휼로 번역되는 단어 중에 ‘ 라캄’(racham)이 있습니다. 라캄이라는 단어는 여인의 자궁을 의미하는 ‘ 레켐’ 에서 나왔습니다. ‘ 불쌍히 여기는 사랑’ 으로 번역됩니다.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의 사랑을 표현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단어가 ‘ 불쌍히 여기셨다’ 입니다. 예수님이 치유의 역사를 일
으키실 때마다, 기적을 일으키실 때마다 거기에는 ‘ 불쌍히 여기셨다’ 는 마음이 표현됩니다.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도 이 단어가 쓰입니다. “그러고서 아들은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아들이 아직 멀리 있는데 그 아버지는 아들을 보고 불쌍히 여겨 아들에게 달려가 그의목을 껴안고 입을 맞췄다”(눅 15:20).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 아들
을 불쌍히 여긴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불쌍히 여기고 이미 그 아들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서에서 ‘ 불쌍히 여기다’ 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 스플랑크나(splaxna)’ 인데 몸의 창자를 의미합니다. 창자가 흔들리는 충격적인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 구약의 히브리어와 신약의 헬라어 모두 ‘ 불쌍히 여기다’ 는 단어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인간의 깊은 신체적인 특징으로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대하며 불쌍히 여기
는 마음은 자신의 몸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입니다. 어머니들이 자식이 아프면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하는 마음이 바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생명을 돌보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마음은 바로의 딸이 가지고 있었던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바로의 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모든 인간에게 부어주신 보편적 감정과 선한 감정이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돌보시는데 사용하시는 마음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 모두가 회복해야 할 마음이 바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지난 2012년 두란노서원에서 출간한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라는 책이 있습니다. 케이티 데이비스라는 미국 여성의 스토리입니다. 케이티 데이비스는 2007년 18세 나이로 대학입학을 연기하고 1년 동안 우간다에 단기 선교사로 들어갔습니다. 풍족한 가정에서 자랐고, 미래가 보장된 삶이 있었던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케이티 데이비스는 1년이 지나도 그곳에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빈민 아이들을 돌보면서 그곳에 머무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곳에서 만난 어린이들의 불쌍한 형편을 바라보면서 그 아이들의 엄마가 되기로 결정합니다. 그녀는 아이 14명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다섯 살배기 한 아이가 케이티에게 이런 말을 꺼냈습니다.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 엄마 없는 그 아이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 케이티에게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라고 했을 때 케이티는 그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엄마가 되기로 결정합니다. 선교사가 아니라 우간다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서 진짜 가족으로 그들을 돌보기로 결심합니다. 그녀는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라는 책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서부터 나 자신의 계획, 나를 향한 다른 사람들의 계획은 틀어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사랑이 내 안에서 꿈틀거렸고, 그 사랑이 나를 새로운 삶으로 이끌었다.”


하나님은 아무 힘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통하여 놀라운 사랑을 세상에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생명을 보호하실 때 사용하신 사람들은 모두 여인들이었습니다. 히브리산파들, 어머니 요게벳, 바로의 딸 그리고 모세의 누나입니다. 당시 남성 중심의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생명을 불쌍히 여기는 여성들을 통하여 모세를 보호하시고 또 사용하셨습니
다. 한 생명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은 이들을 통해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그것이 죄인과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대한민국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충만하게 흘러가되 교회로부터 흘러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고아들이 사라지고 건강한 입양 문화가 세워지기를 함께 기도해야 되
겠습니다. 온누리교회 ‘ 제이홈’ 이라는 사역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입양가정의 모임입니다. 현재 19가정이 25명의 아이를 입양했습니다. 알려진 것만 그렇고 그밖에도 여러 장로님과 목회자, 성도들의 입양이 있었습니다. 혹 입양에 관심을 가진 분들은 온누리교회 제이홈에 연락을 하시면 서로 격려 받고, 여러 가지 정보를 얻고, 입양을 통해서 일어 수 있는 여러가지 어려움들을 예방하고, 함께 기도하는 일들이 계속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