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3 12

삶의 지평을 넓히라 / 정병선목사

삶은 삶의 지평만큼 살 수 있습니다. 삶은 매우 정직해서 삶의 지평 이상을 살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해하고 바라보는 삶의 지평만큼이 곧 내 삶이 됩니다. 때문에 삶의 지평을 넓히는데 삶을 투자하는 것은 매우 지혜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삶의 지평을 넓히는데 삶을 투자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적인 삶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스위스 출신의 영화 감독 잉그마르 베리만은 “나이가 든다는 것은 등산하는 것과 같다. 오르면 오를수록 숨이 차지만 시야는 점점 넓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살아갈수록 삶의 시야가 점점 넓어지는 삶이야말로 정말 인간적인 삶, 삶다운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삶의 지평이 좁으면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요? 시야가 점점 넓어지는 삶을 살..

갈등의 물결, 부흥의 파도가 되다 (행6:1~15) / 이재훈목사

에 나타난 초대교회는 아무 문제가 없는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는 갈등이 언제나 존재합니다. 에 나타난 초대교회에는 교회 밖으로는 핍박이 있었고, 안으로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공동체 안에 서로에 대한 불평이 일어나 갈등이 생겼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 믿는 이들이 늘어나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임으로 인해서 생기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 성도들의 숫자가 많아짐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행정적인 문제입니다. 6장 1절에서 “음식을 분배 받는 일에서 누락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의도하지 않은 실수라는 뉘앙스를 보여줍니다. 어떤 이유로든 있어야 할 이름이 빠지고, 마땅히 돌봄을 받아야 될 대상이 누락이 되는 것은 단순한 행정적인 문제일 수 있지만, 관계 문제, 영적인 문제..

모두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시편56:10)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시편56:10)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해서 믿음이 생긴걸까요, 아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떨어져서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생긴걸까요, 아님 동시에 일어난 사건일까요? 우리의 믿음의 시작을 굳이 따지자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말씀이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렇게 말씀으로 계시하셔서 말씀으로 나타내주신 구원을 믿고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은 이제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의 진짜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구원,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모두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 자신 안에서 만들어지거나, 생성되거나, 스스로 터득한 것은 아무것도 ..

그가 살아나셨다(6)(막16:3,4)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막16:3,4) 예수의 ‘무덤으로’ 가면서 여성 제자들은 무덤 문을 막고 있는 돌을 걱정했습니다. 막 15:47절에 따르면 그들은 돌이 무덤 문을 막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들은 무슨 생각으로 무작정 무덤으로 간 것일까? 때가 새벽녘이니 그들을 도와줄 사람들도 근처에 없었을 겁니다. 여자 셋이서 돌을 치우기는 불가능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다른 복음서들은 여성들이 돌 문제로 걱정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무덤에 가 보니 돌이 굴려져 있었다는 사실만 전합니다. 여성들이 돌에 대해서 걱정했다는 마가복음의 이야기가 논리적 모순이라고 생각하고..

그가 살아나셨다(5)(막16: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막16:2) 솔직하게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보십시다. 우리가 무덤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로 실감이 날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겉모습만 본다면 죽음과는 전혀 무관해보입니다.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기나 할 것처럼 삽니다. 웬만큼 사는 사람들의 집에는 필요 없는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옷, 신발, 가방, 가구, 책, 음향기기 등, 우리가 죽을 때까지 아무리 써도 다 쓰지 못할 정도로 많습니다. 우리가 일주일 뒤에 죽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최신형 디지털 티브이를 새로 장만할 사람은 없겠지요. 1백만 원짜리 메이커 가방이나 양복을 살 사람도 없겠지요. 지금 갖고 있는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보일 겁니다. 집도 필요 없습니다. 이 ..

그가 살아나셨다(4)(막16: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막16:2) 이 여성 제자들은 지금 ‘무덤으로’ 가는 중입니다. 그 무덤은 예수님이 묻힌 곳입니다. 예수님은 삼일 전에 이곳에 묻혔습니다. 여성 제자들은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를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이 죽은 자를 위해서 살아있는 자가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요. 그 장면을 조금 더 심층적으로 봅시다. 세월이 흐르면 이 여성들은 모두 ‘무덤으로’ 가야 할 처지입니다. 이 여성들만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무덤으로 갑니다. 화장장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모두가 죽습니다. 시체가 되고 맙니다. 지금은 남의 장례를 위해서 무덤으로 가지만 아주 빠른 시일 안에 우리 모두는 내 장례의 주인공이 되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결국 언젠가는 무덤 속에 ..

스스로 하나님이 되기를 선택하다 (창3:1-13) / 김영봉목사

해설: 창세기 2장과 3장 사이에는 거대한 시간적 간격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하나의 이야기와 다음 이야기 사이에 시간적인 간격을 상정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때로는 수 일, 수 개월, 수 년 혹은 수백 년의 간격을 전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이후 에덴의 완전한 평화와 행복이 얼마간 지속되었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3장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유를 만끽 하면서 낙원을 즐겼을 것입니다. 그 ‘무한자유’에 권태를 느낄 즈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나무를 쳐다 보지도 않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나무에 자꾸만 눈길이 갔을 것입니다. “뱀은, 주 하나님이..

주님의 눈을 보았는가?

주님의 눈을 보았는가? 글쓴이/ 봉민근 오늘따라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였을 때 주님의 눈과 베드로의 눈이 마주치는 장면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그때에 주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베드로는 통곡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십자가 위에서 나의 죄를 짊어지시고 고통스러워하시면서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이 생각난다. 내가 죄를 지을 때 십자가 위에서 나의 눈과 주님의 눈이 마주치는 모습이 떠오른다. 아무 짓도 할 수가 없다. 슬픈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용서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시며 피흘리시는 주님의 눈을 생각하니 저절로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고백이 터져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기를 잡으러 간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이 오늘 내게도 찾아오셨다. 베드로가 "주여 나를 떠..

까마귀가 날자 배 떨어진다

까마귀가 날자 배 떨어진다 미술학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초등학생 아들이 일찍 퇴근한 저를 보더니 물었습니다. "아빠 '오비이락'이 뭐예요?" "왜? 그걸 어디에서 들었는데?" "미술학원에서 '까마귀가 날자 배 떨어진다'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라고 했는데 사자성어로 그게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고 선생님이 말했어요." 저는 아들이 뜻도 제대로 모르면서 어떤 그림을 그렸을지 궁금했습니다. "그래? 아들 어떻게 그렸니?" "까마귀와 바다 위의 배를 그렸어요. 그리고 (자기 배를 두드리며) 이 배를 그렸어요." 전 아들의 그림에 한참 웃고 난 뒤 아들에게 그 뜻을 설명해 줬습니다. 아들은 난감하고 속상한 표정을 짓더니 미술학원 선생님께 말씀드려서 다시 그려야겠다고 말했습니다. 며칠 뒤 아들에게 다시 그..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시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고난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다 고백하는 시인. 고난을 통하여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기에 고난 당한 것이 자신에게 유익이라 선언합니다. 고통의 씨줄과 행복의 날줄로 이루어진 삶. 생존적 고통과 절대 고독의 삶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생명과 구원의 은총이 내게 임함이 신비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이 은총을 깨닫게 하심은 신비입니다. 겸손히 그 은혜의 자리로 나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