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스스로 하나님이 되기를 선택하다 (창3:1-13) / 김영봉목사

새벽지기1 2024. 4. 13. 06:30

해설:

창세기 2장과 3장 사이에는 거대한 시간적 간격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하나의 이야기와 다음 이야기 사이에 시간적인 간격을 상정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때로는 수 일, 수 개월, 수 년 혹은 수백 년의 간격을 전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이후 에덴의 완전한 평화와 행복이 얼마간 지속되었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3장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유를 만끽 하면서 낙원을 즐겼을 것입니다. 

 

그 ‘무한자유’에 권태를 느낄 즈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나무를 쳐다 보지도 않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나무에 자꾸만 눈길이 갔을 것입니다. “뱀은, 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서 가장 간교하였다”(1절)는 말은 소통 능력에 있어서 다른 짐승보다 뛰어났다는 뜻입니다. 타락 이전에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뱀은 아담과 하와의 마음에 죄를 향한 욕망이 형성되고 있음을 눈치 채고 그들의 마음을 흔듭니다. 뱀의 질문에 대한 하와의 대답(2-3절)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지 못하게 하신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담겨 있습니다. 

 

뱀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하와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의도에 대한 의혹을 제기합니다(4-5절). 뱀의 말은 절반의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선과 악을 알고 판단하는 것은 전지의 능력을 가진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선과 악을 아는 능력을 가지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선과 악을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인간으로서는 선과 악을 부분적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을 의지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뱀의 말에 혹하고 나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보는 하와의 눈이 달라집니다. 뱀의 말에 용기를 얻고 제대로 쳐다 보니, 매우 맛있어 보였고, 보기에도 아름다웠으며, 먹으면 지혜로와질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는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열매를 따서 먹었고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합니다(6절).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서로가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 몸을 가립니다(7절). 그 열매를 먹고 나서 그들이 처음 알게 된 악은 수치심이었고, 그 수치심은 사랑으로 하나 되었던 두 사람을 분리시켰습니다.

 

그들의 죄는 또한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을 깨뜨립니다. “주 하나님이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8절)는 말은 그분이 사귐을 위해 다가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하나님을 피하여 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9절)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왜 거기에 있느냐?”는 뜻입니다. 그분은 아담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자 아담은 자신이 벗은 것을 알기에 숨어 있다고 자백합니다(10절). 하나님은 아담이 사고를 쳤다는 사실을 아시고 확인차 물으십니다(11절). 두려움에 질린 나머지 아담은 얼떨결에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 그 여자가…”라고 말하면서 책임을 하와와 하나님에게 돌립니다(12절). 그러자 하나님은 하와에게 물으셨고, 하와는 뱀에게 핑계를 댑니다(13절). 

 

해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정체와 그것을 에덴에 심어 두신 하나님의 뜻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합니다. 얼른 생각하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좋은 나무처럼 생각됩니다.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피조물로서는 선과 악을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피조물로서 판단할 수 있는 선은 다만 ‘지금’ ‘여기서’ ‘자신에게’ 유익해 ‘보이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선이 아닙니다. 진정한 선은 지금 뿐 아니라 미래에도(언제나), 여기서 뿐 아니라 저기서도(어디서나), 자신에게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모두에게), 그렇게 보일 뿐 아니라 진짜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절대적 선과 악을 아는 것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리를 탐한다는 뜻입니다. 그 점에서 뱀의 말은 옳았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고 살겠다는 말은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부정한다는 뜻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은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피조물로서의 자신의 자리를 지키라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에덴의 삶은 그분이 창조하신 질서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위로 하나님을 모시고 아래로 모든 피조 생명들을 관리하며 마음에서 느껴지는 대로 행하면 그것이 의가 되고 선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하나됨으로 인해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묻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마음 끌리는 대로 살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렇게 사는 것에 권태를 느끼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싶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행위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거역한 것이기도 했지만,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살기를 선택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독립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그 행동은 완벽했던 에덴의 평화와 의와 사랑에 균열을 일으켜 놓았습니다. 자동차 유리에 금이 가면 서서히 번져서 유리창 전체가 무너지는 것처럼, 첫 사람들의 죄는 그렇게 하나님의 아름다운 피조 세계를 망가뜨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