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6 14

하나님의 방법! 인간의 방법!(수8:1-9) / 리민수목사

하나님의 방법! 인간의 방법!(수8:1-9)  본문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아이성 전투 재개를 명하시는 장면이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일러주신 아이성 공략 방법은 매복 전술이었다. 이러한 전술은 상대방을 기습적으로 공격하는 전술이다. 그런데 이 전술은 여리고 전투에 사용된 전술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즉 여리고에서의 전투가 오직 하나님의 이적에 의존한 것인 반면(6장), 아이에서의 전투는 인간적인 방법이 동원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때로 직접, 때로는 인간적인 방법을 통해 효과적으로 성도들을 돕고 계신다. 때로는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있다는 교훈이다.

엄마의 이름은 엄마?

엄마의 이름은 엄마?한 아이가 엄마와 함께 재래시장에 갔습니다.그런데 그만 한눈을 팔다 잡고 있던엄마의 옷자락을 놓쳤습니다.아이의 시야에서 엄마가 사라지자두려워진 아이는 엄마를 부르기 위해다급하게 소리쳤습니다.그런데 황당하게도 아이는 '엄마'를외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이름 석 자를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그러자 아이 엄마가 자기 이름을부르는 것을 듣고는 금방 아이를 찾았지만야단치기 시작했습니다."이 녀석아, 엄마라고 불러야지,주변에 다른 사람들도 많이 보는데엄마의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부르면어떻게 생각하겠어?"그러자 아이가 눈물을 글썽이며엄마에게 대답했습니다."엄마, 여기에 엄마들이 얼마나 많은데요.제가 엄마를 부르면 사람들이 다 돌아보지 않겠어요?그래서 엄마 이름을 불렀어요."결혼하고 어느덧 아이를 키..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렘13:15) / 이금환목사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 그가 어둠을 일으키시기 전, 너희 발이 어두운 산에 거치기 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어둠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으로 말미암아 은밀한 곳에서 울 것이며 여호와의 양 떼가 사로잡힘으로 말미암아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예레미야13:15-17)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귀를 기울이지 않는 유다의 교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어둠을 일으키시고, 어둠으로 장애물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사망이 그늘이 그들을 덮쳐서 침침한 어둠에 쌓이게 하시기 전에 회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촉구하셨습..

믿음과 영생 (요 3:1-15)

부활절 7주, 2024년 5월 12일 거듭남에 대해서 니고데모라는 이름의 바리새인이 어느 날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엘리트 중에서 최고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산헤드린 공회 의원으로서 유대교 신학자 계급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밤에 찾아온 이유는 자기 방문을 숨기고 싶었다기보다는 예수님과 긴밀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낮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과 어울려야 했으니까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예수 당신은 보통 평범한 랍비가 아니라 수준이 높은 랍비라는 뜻입니다. 불교식으로 ‘고승’이라는 뜻이겠지요. 그가 예수님을 이렇게 높이 평가한 이유는 ‘표적’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표적’은 ..

콩나물국 / 정용섭목사

오늘 저녁에는 콩나물 국으로 밥을 먹었다는 소식을 그대에게 전하오. 별로 관심이 갈 만한 소식은 아니겠으나, 내가 좋아서 하는 말이니 그냥 한쪽으로 듣고 다른 쪽으로 흘려보내면 되오. 콩나물국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말하지 않겠소. 그 맛이야 나보다 그대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 대신 국을 끓이는 방법만 말하겠소. 먼저 냄비에 물을 1천 씨씨를 넣었소. 그 양은 별로 중요하지 않소. 지금 우리 집에는 작은 딸이 부산에 가 있는 바람에 세 식구만 있어서 먹을 걸 만들어도 조금만 만드오. 모두 먹는 양이 적소. 1천 씨씨 물로 끓이면 아마 4명 식구로 딱 적당할 거요. 오늘 큰 딸도 먹지 않아서 국이 반쯤 남았소. 내일 먹을 생각이오. 우선 다시마라는 조미료 한 봉지를 물에 넣었소..

밥 먹기 / 정용섭목사

그대는 밥 먹을 때 옆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편이신지, 아니면 그냥 먹기만 하는 편이신지. 서양 사람들은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많은 편인 반면에 동양 사람들은, 특히 한국 사람들은 대화를 하지 않는 편이오. 요즘은 한국 사람들도 제법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소. 특히 젊은 사람들은 말없이 있는 거 자체를 불편하게 생각하오. 대학교 학생 식당에 들어가 보셨소. 시끄러워서 정신이 하나도 없소이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님으로부터 밥 먹을 때 말을 하지 말라는 충고를 들은 것 같소. 실제로 그런 충고를 들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내 무의식 한편에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특히 큰 소리로 떠들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이 자리를 잡고 있는 거는 분명하오. 그렇지만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을 때나 교회..

천당 방문기(3) / 정용섭목사

어젯밤에 갑자기 기억이 되살아난 사건이 있는데, 그걸 오늘 그대에게 하겠소. 천당 사무실의 어느 방에 들어가면 특별한 장치를 볼 수 있소. 각각의 사람들이 주님 앞에서 받은 심판을 확인할 수 있는 장치라오. 마치 사이버스페이스처럼 번호만 누르면 어떤 사람의 심판 결과와 그 과정이 입체 동영상으로 펼쳐진다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의 심판까지 미리 볼 수 있다는 거요. 천당은 시간 여행이 가능한 곳이라는 걸 그대도 알고 있지 않소. 내가 그대를 진작 알았으면 그대의 미래를 알아오는 건데, 안타깝게 되었소. 이제는 나에게 그럴 능력이 없소이다. 이름은 밝히지 않겠소. 김 아무개 목사의 번호를 눌러보았소. 김 아무개 목사는 그대도 잘 알고 있지 않소. 교회를 엄청나게 키운 바로 그 목사..

변함없는 하나님의 약속 (창세기 20장) / 김영봉목사

해설:그 즈음에 아브라함은 마므레를 떠나 네겝 지역으로 이사하는 중에 그랄 지방에 잠시 머물게 되었습니다(1절). 그곳에서도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소개합니다. 13절에 보면, 그것은 이주민의 삶을 시작하면서 아브라함과 사라가 택한 생존 전략이었습니다. 그 생존 전략 때문에 이집트에서 둘 다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이 흐른 뒤에 그랄에서 두 사람은 또 다시 그런 상황을 만납니다. 아비멜렉은 사라가 아브라함의 누이라는 사실을 믿고 후궁으로 삼으려고 데려 갑니다(2절). “데려갔다”는 표현은 강압적인 탈취 행위를 의미합니다. 당시 권력자들은 자신의 영역 안에 들어온 사람들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길들이곤 했습니다. 이 위기에서 하나님은 또 다시 전격적으로 개입하십니다(3-7절). ..

누구를 박해하지 않았느냐?(행 7:37-53)

스데반 집사의 구속사는 신약성경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걸었던 40년 광야는 바로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간있었으며, 공동체의 현장이었습니다.시내산에서 주신 말씀을 모세는 백성들에게 설교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모세의 설교를 듣지 않고 애굽에 대한 마음으로 가득차서 아론과 함께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듣지 않자 외면하시고 하늘의 신들을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습니다. 참혹한 심판을 받았습니다.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성막을 세우시고 거하십니다. 성막은 광야교회를 이끌었고 가나안에 들어갔고 다윗을 통하여 성전 건축 기도에 허락하셨고 솔로몬을 통하여 완성하게 하셨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은 ..

내일을 소망할 수 있는 원천이 있습니까? / 신동식목사

내일을 소망할 수 있는 원천이 있습니까? 내일이 없는 사람은 삶이 매우 불행합니다.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단지 사는 것이 개인적인 풍요와 평안뿐이라면 내일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내일이 기대되는 이유는 오늘보다 나은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삶의 이유가 단지 평안과 부요에 있다면 노동하는 것은 가치가 없어집니다. 노동은 의미가 아니라 기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노동을 통하여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간섭없이 혼자 즐거움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게 됩니다. 노동이 의미를 상실하면 삶은 매우 무의미하게 흘러갑니다. 공부하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삶을 관조하는 것도 쓸데없는 일입니다. 창조적인 생각을 만들어 내는 것도 부질없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