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타락, 그 이후 (창3:20-24) / 김영봉목사

새벽지기1 2024. 4. 16. 05:23

해설:

모든 것이 지나간 후, 아담은 여자의 이름을 하와라고 짓습니다(20절). ‘하와’는 “살아있음”(living)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인데, 그 이름이 헬라어와 라틴어로 음역되는 과정에서 ‘이브’가 되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후에 책임을 아내에게 전가하며 거리를 두었던 아담이 아내에게 다가가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했다는 의미입니다. 한 존재에게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불러준다는 것은 그 존재를 자신의 삶 속에 초청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에게 두 가지 일을 행하십니다.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신 것이 그 하나입니다(21절). 두 사람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은 후에 나뭇잎으로 부끄러운 곳을 가렸는데(7절), 그들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셨다는 말은 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변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명령을 거역했다고 해서 두 사람을 버린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두 사람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낸 것입니다(22절). 에덴 동산의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인간이 전지의 능력도 없으면서 스스로 신이 되어 선악을 판단하기를 선택했으니, 죄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 상태로 영원히 산다면, 죄는 한 없이 증폭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서 그들을 쫓아내고 생명의 길이를 제한하셨습니다(23절). “동쪽”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거리를 상징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2:17)고 하셨는데,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에덴 동산으로 되돌아갈 수 없도록 그룹을 세우시고 빙빙 도는 불칼을 두십니다(24절). ‘그룹’은 날개 달린 동물을 가리키는 히브리어인데, 천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나중에 하나님은 성막에 둘 언약궤 위에 그룹을 만들어 붙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언약궤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 한 것입니다.

 

묵상:

창세기 3장의 타락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이루어진 구원의 사건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원죄로 인해 깨어진 우주적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분 안에서 죄를 용서 받고 죄성을 치유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합니다.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요 1:12)는 말씀은 3장의 타락 사건을 되돌린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그로 인해 다른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피조 생명과의 관계가 모두 회복됩니다. 더 이상 깨어진 관계 안에서 투쟁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화해의 은총 속에서 서로 섬기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이 땅에서 경험하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완성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에덴의 동쪽에서 살고 있던 우리는 다시금 에덴으로 회복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생명나무에 이르지 못하도록 세워 두신 그룹과 불칼을 제거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성경의 첫 책은 창세기이고 마지막 책은 요한계시록입니다.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은 수천 년의 시차를 두고 각기 다른 사람에 의해 쓰여졌고, 후대에 한권의 성경으로 묶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창세기의 첫 세 장과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세 장이 정확히 대칭을 이룹니다. 

창세기 1-2장      하나님의 원창조  

창세기 3장            원죄와 타락

요한계시록 20장    심판과 회복

요한계시록 21-22장  원창조의 회복: 새 하늘과 새 땅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을 ‘수미쌍관법’이라고 부릅니다. 한 저자가 쓴 글이라면 저자가 그렇게 의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우연의 일치’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믿는 이들은 ‘우연’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우리에게 우연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까닭에 “성경의 실제 저자는 성령이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