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실낙원 (창3:14-19) / 김영봉목사

새벽지기1 2024. 4. 14. 06:08

해설:

창조 질서를 깨뜨린 죄에 대해 하나님은 뱀에게 세 가지의 저주로 벌을 내리십니다. 첫째는 배로 기어 다니게 될 것이고, 둘째는 흙을 먹고 살 것이며, 셋째는 여자의 자손과 원수가 될 것이라는 저주입니다(14-15절). 뱀을 징그럽게 여기는 인간의 집단 무의식이 뿌리가 여기에 있다 싶습니다. 뱀이 사탄을 상징한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은 “여자의 자손”을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의 세력에 치명상을 입히시지만 그로 인해 그리스도 역시 “발꿈치를 상하는” 피해를 입습니다.

 

하나님은 여자에게 두 가지의 저주를 내리십니다. 하나는 해산의 고통입니다(16절). 남녀 간의 성적 연합과 자녀의 출산은 원창조의 원리였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1:28)는 명령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죄로 인해 여인이 받은 벌은 해산하는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고통입니다. 다른 하나는 두 사람의 사랑의 관계가 지배권을 다투는 관계로 왜곡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는 말씀은 가부장적 문화에 대한 성서적 근거로 오용되어 왔습니다. 그것은 성서의 의미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남성 우위의 가부장적 문화는 죄로 인해 생겨난 창조 질서의 왜곡입니다. 싸움은 언제나 강한 쪽의 승리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힘은 상대방을 섬기는 도구로 주어진 것인데, 죄가 그것을 부리는 도구로 왜곡시킨 것입니다.  

 

남자에게도 두 가지의 저주가 내려집니다. 하나는 노동의 고통입니다(17-18절). 노동은 저주가 아닙니다. 타락 이전에 노동은 놀이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죄로 인해 피조 질서에 균열이 발생했고, 그 균열은 피조 세계를 왜곡시켜 놓았습니다. 그로 인해 인간은 땀 흘려 가꾸어야만 땅에서 먹을 것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죽음의 운명입니다(19절).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시면서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2:17)고 경고하셨습니다. 그 경고는 으름짱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당장 죽게 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은 죽음의 운명을 당해야 했습니다. 

 

묵상: 

창세기 1장과 2장은 하나님의 원창조의 원리가 무엇이었고 우주와 모든 생명 그리고 인간이 어떤 존재로 지어졌는지를 알게 합니다. 창세기 3장의 타락 이야기는 하나님의 피조 세계와 인간이 왜 지금과 같은 실존의 상태로 전락되었는지를 알게 합니다. 

 

그 모든 것은 죄에서 시작됩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거역한 것이고, 의미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살려는 선택이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이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아실 수 있는데, 피조물 주제에 그것을 스스로 분별하고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후에 아담과 하와는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좁은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서 선과 악을 분별했습니다. 그들이 택한 선은 다른 사람에게는 악이 되었고, 그들이 선택한 악은 다른 사람에게 선이 되었습니다. 결국 세상 모든 사람들이 신이 되어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택하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 사회입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완전한 조화와 평화를 깨뜨려 버립니다. 사랑으로 하나 되었던 부부가 갈라지고, 인간과 피조 세계가 깨어지고,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불화가 발생합니다. 타락 이전에 놀이였던 노동이 고역이 되고, 자신을 낮추어 섬기는 도구였던 힘은 다른 사람을 강제하고 지배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인간과 모든 생명체는 생로병사의 굴레 안에 갖혀 버리게 되었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인류가 혁파해 온 모든 제도들–남성중심의 가부장적 문화, 왕정제도, 계급제도, 노예제도 등–은 죄의 결과로 생겨난 왜곡 현상들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저주를 풀어 주시어 태초의 창조 질서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예수께서 죄에 주목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로마의 정치적 억압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질병과 장애가 제일 중요한 문제였다고 생각했고, 어떤 사람은 가난의 문제를 가장 크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문제들에 관심을 두기는 했지만, 결국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자신을 던지셨습니다. 그 모든 문제들의 뿌리가 죄에 있다고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우리가 갇혀 버린 온갖 저주와 불행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풀어 나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