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넘치는 위로, 굳건한 소망 (고린도후서 1:1~11)

새벽지기1 2021. 1. 10. 08:12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면
넘치는 위로와 굳건한 소망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소망의 복음을 굳게 잡았던 대표적인 인물이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아시아와 유럽 일대를 여행하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영혼들을 양육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가 어떻게 복음을 전했고, 그를 통해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가 신약성경의 바울 서신들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바울의 서신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복음을 어떻게 깨달았겠으며,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교회가 어떻게 복음 안에서 바로 서야 하는지를 알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며 받은 고난은 귀한 열매입니다. 우리가 고난 앞에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소망의 복음을 굳게 붙잡아야 하는지를 그의 삶과 신앙과 사역을 통해서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가장 많은 고난을 받았던 지역이 에베소와 고린도입니다. 바울은 이 두 도시에서 에너지를 퍼부었습니다. 선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에 복음의 말씀이 전해지자 바울의 사역을 반대하는 소동과 폭동이 일어나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에베소에는 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아데미 신전이 있었습니다. 여신의 모형을 만들어서 파는 사람들이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그 도시에 들어와서 “사람이 만든 신은 신이 아니다”라는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했고, 호응을 얻자 바울 일행을 해치려고 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마케도니아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에서 겪은 사도 바울의 고난은 복잡합니다. 에베소에서의 고난은 물리적인 공격이었습니다. 복음사역에 반대하는 고난의 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에서의 고난은 바울에 대한 비판, 거절, 공격, 대적이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정신적인 고난을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개척해서 목회했던 고린도교회에서는 외부에서 들어온 거짓된 사람들이 그를 음해하고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도들이 여기에 동조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바울이 매우 큰 심적인 고통을 겪었습니다. 대개 육체적인 공격보다 충격적이고 힘든 것이 심리적인 공격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로부터 공격을 받은 여러 이유가 있는데 그것을 종합하면 “바울은 사도로서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기쁘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바울에게 매우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한 소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고 방문해서 고린도교회가 올바로 돌아올 수 있도록, 성도들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쓴 고린도후서에는 바울의 내적인 갈등과 고통, 고린도교회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서 많은 고백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서 소망의 복음이 발견되고, 바울이 어떻게 소망 가운데 거할 수 있었는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낸 네 번째 편지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네 번째 편지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와 주고받은 편지를 중심으로 그가 고린도교회와 어떤 관계인지,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를 아는 것이 고린도후서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입니다.
“나는 내 편지에 여러분에게 음행하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썼습니다”(고전 5:9). 바울이 개척한 고린도교회 성도 중에 음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편지를 쓴 것입니다. 문제 있는 성도에 대한 올바른 치리와 경고와 권면을 하라는 뜻입니다.
“내 형제들이여, 글로에의 집 사람들을 통해 여러분에 대한 말, 곧 여러분 가운데 다툼이 있다는 말을 내가 들었습니다”(고전 1:11).
“이제 여러분이 써 보낸 질문에 대해 말하겠습니다…”(고전 7:1).
바울이 들은 소식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분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 등으로 나뉘어서 서로 갈등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서 바울이 권면했던 성도들을 치리하기는커녕 다툼과 분열로 얼룩진 문제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두 번째 편지로 고린도전서를 쓰게 됩니다.
주후 54년 초 에베소에서 바울이 전해 듣고 또 질문받은 것에 대하여 응답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디모데라는 제자를 통해서 보냅니다. 편지를 보내고 다시 바울에게 돌아온 소식은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불신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편지에 대한 응답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에 있다는 것을 알
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듣고 바울이 곧바로 고린도를 방문합니다. 매우 긴급한 위기의식을 느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만났을 때 더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상황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니었습니다. 외부에서 들어온 소수의 무리가 성도들의 마음을 빼앗아가고, 믿음에서 떠날 뿐만 아니라 바울을 공격하는데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동조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바울이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바울은 그들과 싸우지 않습니다. 인내하고 침묵하며 고린도교회를 떠납니다. 바울이 두 번째 고린도 방문을 마치고 다시 편지를 씁니다.
“나는 큰 환난과 마음의 고통으로 인해 많은 눈물로 여러분에게 썼습니다. 이는 여러분을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 대해 넘치는 사랑이 내게 있음을 알게 하려는것입니다”(고후 2:4).
바울이 이 편지를 보내고 드로아라는 지역으로 올라갑니다. 하나님이 그곳에서 사역하도록 문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역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마음에 계속 억눌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디도를 통해 세 번째 편지를 보냈는데 소식이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큰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드로아에 갔을 때 주 안에서 내게 문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심령이 편치 않아 그들과 작별하고 마케도니아로 갔습니다”(고후 2:12~13).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한 염려와 근심이 바울에게 끊임없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드로라에서 마케도니아로 옮겨갔는데 그곳에서디도를 만납니다.
“우리가 마케도니아에 이르렀을 때 우리의 육체는 편치 못했고 사방으로는 환난을 당했습니다. 밖으로는 다툼이 있었고 안으로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낙심한 사람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께서 디도를 돌아오게 하심으로 우리를 위로해 주셨습니다”(고후7:5~6).


바울은 마케도니아에서도 고난을 겪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때 디도를 통해서 들은 소식이 바울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눈물로 고통 속에서 쓴 세 번째 편지가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편지로 응답한 것이 고린도후서입니다. 고린도후서는 성경의 순서대로 하면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네 번째
편지입니다. 주후 55년에서 56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한 사람에게 여러분은 이미 충분한 벌을 내렸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그가 더 큰 근심에 잠기지 않도록 오히려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십시오”(고후 2:6~7).
바울이 그 성도들을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권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고, 얼마나 연약했고, 얼마나 힘들었고, 진정성 있는 사도인지를 고린도후서를 통해서 전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세 번째 고린도를 방문하게 됩니다. 마케도니아 지방을 두루 다니며 격려하다가 고린도에서 석 달 동안 머무르게 됩니다. 그곳에서 로마서를 집필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에 머무는 동안 로마서라는 서신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의 마음이 평화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바울이 의지한 복음의 가치가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넘치는 위로


“하나님,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자비의 아버지,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서는 찬양받으실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 인해 우리도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는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
스도를 통해서 넘칩니다. 우리가 고난당하는 것도 여러분을 위로하고 구원하기 위한 것이요, 우리가 위로받는 것도 여러분을 위로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위로가 여러분 가운데 역사함으로 여러분이 우리가 당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고난을 당할 때도 잘 견뎌 내게 된 것입니다”(3~6절).
바울은 그 어떤 사도나 성도보다 심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받는 고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한 것을 ‘ 그리스도의 고난’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모든 고난 속에서 그가 경험한 것은 하나님의 위로였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며 새롭게 경험한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
지, 자비의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이 연결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그분은 자비의 하나님입니다. 바울이 경험한 자비의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독생자가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세상의 유일한 위로자가 되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여러분, 둘 중 하나의 삶을 선택하라면 

어떤삶을 선택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로를 충만하게 경험하는 삶과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지 않아도 좋으니 고난
이 없는 삶입니다. 대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지 않아도 좋으니 고난 자체가 없는 삶을 택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부
르심은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도록 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고난을 경험하지 않는 삶을 택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위로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얼마나 값있고, 능력 있고, 충
만한지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받는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로만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땅에 오신 분이 성령님입니다. 바울이 아홉 번이나 쓴
위로라는 단어는 ‘ 파라클레시스’ 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을 가리킬 때 쓰는 ‘ 파라클레토스’ 와 같은 단어입니다. 영어
단어로 성령님을 ‘ 컴포터(comforter)’ 라고 합니다. 우리는 늘 곁에 계셔서 ‘ 보혜사(保惠師)’ , 돌보고 위로하는 분이라
고 번역하는데, 영어로는 ‘ 위로자’ 라고 번역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사역은 고난 속에서 위로를 경
험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지 않으면 위로받을 일이 없습니다. 또한 성령님의 위로는 우리로
하여금 또 다른 사람의 위로자가 되게 합니다.


여러분, 고난 속에서 눈물을 경험한 사람은 세상을 보는 눈이 다릅니다. 세상을 볼 때 눈물 흘리는 자들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기대하지 않았던 고난을 허락하셨습니까? 예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가려고 노력
했는데 고난을 주시고, 왜 나에게는 눈물을 주시냐고 말하고 싶습니까? 눈물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
문입니다. 마른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위로를 이 세상에 전하는 통로 역할을 하
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넘치는 위로를 경험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넘치는 위로가 있었습니
다.
“여러분에 대한 우리의 소망은 굳건합니다. 여러분이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것처럼 위로에도 함께 참여하는 것을 우
리는 알고 있습니다. 형제들이여,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에 대해 여러분이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
는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질 지경이 됐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사형선고를 내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분
은 우리를 과거에도 그렇게 큰 죽음에서 건지셨고 또 미래에도 건지실 분입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이 이후에도 건져
주실 것을 소망합니다”(7~10절).


고난 속에서 경험한 소망의 하나님


바울이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 때문에 ‘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 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울이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습니다. 추정할 뿐입니다. 또 고린도전서 15장 32절에서는 ‘ 에베소에서 맹수와 싸웠다’
는 구절이 나옵니다.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자인데 당시 맹수에게 던져져 싸워야 하는 이들은 주로 노예 계층이었습니
다. 맹수는 아마도 바울을 공격한 대적들의 세력을 은유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울이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으로 인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때 바울이 어떻게 복음 안에서 소망을 발견했
습니까? 바울이 ‘ 마음에 사형 선고를 내려야 했다’ 고 고백했습니다. ‘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 는 것과 마음에 사형선고
내려야 한다는 것을 연결하면 바울이 하나님만 의지하도록하는 구절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하나
님 나라에 헌신하고, 복음을 위하여 수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스로를 의지하는 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고난
을 통하여 끊임없이 우리를 가르치시는 것은 교만을 꺾고, 스스로를 의지하는 것을 내려놓게 하시는 것입니다. 욥과
같은 의인이 왜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지만, 하나님이 욥기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욥과 같이 하나님이 사
랑하시는 많은 의인에게도 회개해야 할 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욥이 자신을 변호하다가 나중에는 ‘ 내가 죄인이다. 회
개해야 할 죄가 있다’ 고 고백한 것입니다. 욥기의 교훈은 욥과 같은 의인이 회개해야 할 죄가 있다면 하물며 의롭지 못
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죄를 회개해야 하는가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고난 속에서 살 소망까지 끊어
졌습니다. 그 해결책이 자신의 마음에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자신을 죽여야 된다는 것입
니다. 여러분, 왜 살 소망까지 끊어집니까? 죽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완전히 사형선고를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자신이 살아있기 때문에 살 소망이 끊어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절망을 왜 합니까? 죽지 않아서 절망합니다. 그리스도
의 십자가에 자신을 완전히 죽이면 절망이 사라집니다. 절망을 죽이는 유일한 힘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바울과 같이 마음에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입니다. 자신을 의지하는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쓰지만 효과적인 약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스스로를 의지하지 않고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
님만 의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서 소망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큰 죄악에서 건지신 하나님이 구원
하실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난 속에서 경험한 두 번째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입니다.
“이제 소망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믿음 생활 가운데 모든 기쁨과 평강을 충만하게 하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흘러넘치게 하시기를 빕니다”(롬 15:13).


바울이 소망의 하나님을 고백한 이유는 소망의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
들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에 대한 우리의 소망은 굳건합니다. 여러분이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것처럼 위로에도 함께 참여하는 것을 우
리는 알고 있습니다”(7절).


소망의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또 다른 영혼들을 향해서 소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소망이 오히려 굳건해집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넘치는 위로의 하나님과 굳건한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고난은 우리가
넘치는 위로와 굳건한 소망을 경험할 수 있는 곳입니다. 고난을 겪으면서 위로와 소망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넘치는 위로를 경험하고, 굳건한 소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넘치도록 역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