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죽음의 냄새인가 생명의 향기인가(고린도후서 2:12~17)

새벽지기1 2021. 1. 19. 07:42

“우리는 이미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에
포로된 종으로 참여함으로 그리스도가 주님 되심과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는 존재입니다.”

 

매서운 한파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겨울이 없다면 맺히지 않는 열매가 있습니다. 고난의 추운 겨울은 고통스럽지만 통과해야만 맺히는 열매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추운 겨울을 통과함으로 맺히는 열매를 기대하시고 우리에게 고난을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통과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바라보며 나아가야합니다.


18세기 찬송작가이자 시인 윌리엄 쿠퍼가 찬송시를 작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시절부터 겪었던 병마 때문입니다. 그는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20대부터 깊은 우울증과 정신쇠약으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스스로 벗어나기 어려운 절망과 매일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가 깊은 고통 속에 있으면서 고통받는 수많은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열매가 맺어졌습니다. 동시대 인물이었던 목회자 존 뉴턴도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윌리엄 쿠퍼의 아픔을 공감하고 잘 이해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15년 동안 목회자, 상담자, 친구, 동역자로서 함께 주옥같은 찬송가를 많이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고통을 통한 열매에는 역설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자만할 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보잘것없게 만드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작고 연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갈 때 그 모든 것을 크게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사라를 통해 약속의 자녀를 보내주시고, 기드온의 300용사를 통해 미디안의 10만 군대를 무찌르게 하셨습니다. 목동 다윗을 통해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리셨습니다. 처녀인 마리아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소망하는 자들을 통하여 열매 맺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게는 항상 고난이 함께 했습니다. 바울은 그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 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며 복음 때문에 받는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고난은 바울이 스스로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신비로운 인도하심과 능력을 체험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
난 속에서 복음의 능력을 체험했고, 고난을 기쁘게 감당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고난을 감당할 때 고통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마음 깊은 고통을 담고 있는 책이 <고린도후서>입니다. <고린도후서>에 나타난 그의 고백들은 매우 정직하고 진솔합니다. 각 장마다 그의 근심과 고통이 조각조각 나타납니다. 모든 마음의 고통을 끌어모아 쓴 책
이 <고린도후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과 함께 고난받고, 때로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건져주실 것을 소망했습니다. 역설입니다. 살 소망까지 끊어질 지경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소망하는 역설을 경험했습니다. 외면적으로는 패배와 절망 가운데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영적 승리를 경험하는 모습입니다.

 

고린도교회에 대한 근심, 염려, 충격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드로아에 갔을 때 주 안에서 내게 문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않아 그들과 작별하고 마케도니아로 갔습니다”(12~13절).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디모데를 통해 보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가 매우 심각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고린도를 방문하게 됩니다. 에베소는 지금의 터키 지역입니다. 바다를 건너 직선거리로 가면 최단거리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고린도를 방문했습니다. 바울이 그때의 방문을 ‘ 매우 고통스러운 방문’ 이라고 했을 정도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대적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었고, 믿게 하였고, 양육하였고, 권면했던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외부에서 들어온 일부 사람들의 선동과 거짓된 주장에 넘어가서 바울을 불신임하고, 대적하고, 사도 자격이 없다고 주장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고린도에서 돌아와 바울이 눈물의 편지를 씁니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세 번째 편지입니다. 그 편지를 디도를 통해 보냈습니다.
“나는 큰 환란과 마음의 고통으로 인해 많은 눈물로 여러분에게 썼습니다. 이는 여러분을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 대해 넘치는 사랑이 내게 있음을 알게 하려는것입니다”(고후 2:4).
바울은 큰 충격을 받고 눈물로 편지를 써서 디도를 통해 보냈습니다. 그러나 디도는 곧바로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소식이 궁금해서 마음이 근심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드로아로 가서 복음 전도의 문이 열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드로아에서 사
역하는 동안에도 마음은 고린도교회에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마음에 깊은 근심이 있으면 하나님이 열어 주신 사역의 문임에도불구하고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울이 그런 상태였습니다. 드로아에서 열매가 맺어지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충격이 바울에게 여전히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마케도니아로 올라가게 됩니다. 마
케도니아에서도 성도들과 함께 환란을 받고있었지만, 여전히 바울의 마음은 고린도교회에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에서 디도가마케도니아로 와서 바울을 만나고, 바울이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위로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때까지 바울의 모든 여정에는 고린도교회에 대한 근심과 염려, 충격 속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이 기간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또 다시 역전을 경험합니다.


개선장군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행진을 따라가면


“그러나 우리로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승리하게 하시며 우리를 통해서 모든 장소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낼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14절).
‘ 승리하게 하신다’ 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원문에는 ‘ 승리한다’ 는 단어가 나타나 있지 않고, ‘ 인도함을 받고 따라간다’ 는 의미의 단어가 쓰였습니다. 그 단어를 개선장군을 따라 함께 행진하는 일원으로 참가할 때 쓰기 때문에 ‘ 승리하게 하신다’ 고 번역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 군인들이 아주 중요한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을 때 로마 전체 시민들 앞에서 개선행진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모습을 연상하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윌리엄 바클레이라는 성경학자는 당시 로마의 개선 행진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승리한 장군의 개선행진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로마의 거리를 지나 주피터 신전 있던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향했다. 맨 앞에서는 주행정관과 원로원이 섰다. 그다음에는 나팔수들이 섰고, 그 뒤로는 점령지에서 가져온 전리품들을 든 사람들이 따라갔다. 그다음에는 사로잡힌 군주들, 지도자들, 장군들이 사슬에 묶여 걸어갔다. 그 뒤에는 행정관들, 곤봉을 든 관리들이 있었고, 수금을 든 악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다음에 제사장들이 향기로운 향이 타고 있는 향로를 흔들면서 갔다. 그다음에 사두마차 위에 서 있는 개선장군이 나타났다. 그의 뒤에는 가족이 타고 있었고, 마지막으로 온갖 장식을 한 군대가 ‘ 이오 트리움페(Io triumphe)’ 라는 승리의 구호를 외치며 따라갔다.”

 

개선장군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시키려고 오신 사령관이십니다. C.S. 루이스도 <순전한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령관으로 묘사했습니다. 구약에도 보면 여호수아 앞에 나타난 군대장관이 성자 예수님께서 잠시 이 땅에 임재하신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경건한 학자들은 바울이 포로로 잡혀가고 있는 종의 일원으로 자신을 해석하고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사령관으로 오셔서 사단의 종으로 묶여 살아가던 자신을 구하셔서 이제 그리스도의 포로된 자로,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신을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승리의 일원이 되어 포로된 종으로 끌려가고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고백하는 승리는 잘못된 승리주의가 아닙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의 포로된 종으로, 때로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연약한 자로, 사람들이 보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자로, 실패와 절망을 경험하며 그리스도의 승리의 대열에 참여하고 있다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 승리의 전리품으로, 자신이 예수님의 포로가 되어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행진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비록 약하지만 나를 이끄시는 분은 곧 승리하신 개선장군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함으로 그 승리의 행진을 따라가면 항상 승리하게 된다는 것을 믿고 감사하는 승리의 확신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는 존재


승리의 개선 행진에 중요한 흔적이 있습니다. 개선 행진을 따라 향을 태우는 것입니다. 개선장군의 행렬 직전에 계속 향을 피우는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향 냄새를 후각적으로 기억하게 해서 승리를 기념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냄새를 만나면 승리가 기억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절 후반부에 “우리를 통해서 모든 장소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낼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드립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는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냄새입니다. 승리의 개선 행렬이 지나는 곳마다 향이 태워
져서 이 냄새를 맡는 모든 사람들이 그 승리를 기억하고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으며 복음을 전하는 소명을 그리스도의 냄새로 비유한 것입니다. 자신의 사도로서의 부르심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냄새를 내게 하는 역할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는 사람들에게나 열망하는 사람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15절).
누가 어느 집에 어느 정도 사는가에 따라서 냄새가 뱁니다. 이것을 영적인 생활에 적용하면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면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지 않는다면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입니다. 자
신이 죽고 온전히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면 당연히 그리스도의 향기가 날 것입니다. 바울은 고통스러운 모든
상황이 그리스도의 냄새,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또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진정 살아 계시고, 계속 살아계시기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바울이
레위기의 제사 제도를 기억하면서 ‘ 향기’ 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레위기 제사 제도에는 다섯 가지가 있습니
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입니다. 이 다섯 가지 제사 제도를 설명한 레위기 5장까지 내용을 보면 번제, 소제, 화목제에는 ‘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향기로운 제사’ 라는 설명이 붙습니다. 속죄제와 속건제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죄와 관련된 제사이면서 동시에 의무적이자 강제적으로 드려지는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번제와 소제, 화목제는 자발적으로 드려야 하는 헌신의 제사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향기란 강제와 의무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자원함으로 드릴 때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향기 날 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도록 자원함으로 기쁨으로 그분을 모셔 드리고, 그분이 내 안에 사시도록 나의 모든 삶의 주인으로 기쁘게 자원함으로 고백할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바울은 ‘ 그리스도의 향기’ 라는 단어를 빌립보에서 사용했습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빌립보교회의 성도들로부터 받
은 헌금에 대한 확인과 감사의 편지로 보낸 것입니다. 바울의 재정 원칙은 자비량이었습니다. 복음 전도에 훼방 받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스스로 모든 생활비와 사역비를 충당하며 사역했습니다. 그런데 그 원칙을 무너뜨리면서까지 예외
적으로 헌금을 받았던 교회가 빌립보교회입니다. 빌립보교회는 먼저 사람을 보내서 바울의 문제가 무엇인지, 도울 일
이 없는지, 기도제목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추적하며 동행했던 교회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1장에 빌립보교회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다면서 “너희가 첫날부터 복음 안에 교제함을 인함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교제를 뜻하는 ‘ 코
이노니아’ 는 영적인 관계이기도 하지만 물질적인 지원도의미합니다.
“지금 나는 모든 것이 풍족하고 넉넉합니다 여러분에게서 온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받은 것으로 인해 풍족하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향기로운 제물입니다”(빌 4:18).
레위기에 썼던 ‘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향기로운 제사’ 라는 것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입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헌금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우리의 드림이 향기로운 제물이어야 합
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로부터 받았던 비난, 오해, 대적 가운데서 자신의 소명을 굳게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그
리스도를 아는 냄새,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향기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냄새가 됩
니다.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냄새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죽음의 냄새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죽음의 냄새이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냄
새입니다. 누가 이런 일들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16절)
복음을 전하는 것은 생명과 죽음을 구분하는 일이기 때문에 승리의 행진에서 피어나는 냄새를 맞고 그 행렬에 동참
하는 이들은 생명에 이르게 되지만, 승리의 냄새,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고도 그 생명의 행진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은
곧 죽음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사람들을 죽게 한다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고도 생명의 행진, 승리
의 대열에 믿음으로 참여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자는 죽음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큰 고통 속에서 도리어 그리스도의 승리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지키는 승리입니다.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포로된 종으로서 자신을 온전히 기쁘게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는 승리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절망합니까? 온전히 드리지 않아서입니다. 왜 좌절합니까? 자신의 소명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우리의 발걸음은 우리 자신을 드러내는 행진이 아닙니다. 승리하신 그리스도, 포로 된 종으로서 그분을 드러내고, 그분이 나타나고, 때로는 우리가 곤란하고 고난을 당해도 그분의 향기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기쁨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빌립보서 1장에서 “자신을 질투하고 공격하므로 복음을 전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의 승리가 필요합니다. 도처에서 교회의 흠을 잡고, 교회를 부정평가하고, 부당하게 공격하는 세력들
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승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억울함과 답답함, 고난 속에서 오히려
그리스도의 향기,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내는 존재입니다. 교회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향기가 난다고 평가받는
것이 승리입니다. 세상의 거짓과 소문과 부당한 방법으로 공격하는 일과 동일하게 싸워 이기는 것은 그리스도의 승리
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에 포로된 종으로써 참여함으로 그리스도가 주님 되심을 나
타내고,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시국일수록 우리를 부인해야 합니다. 내 안에 그리
스도께서 온전히 사시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승리이자 소망입니다. 약한
자로서 경험하는 능력의 승리입니다. 때로 살 소망까지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을 때 경험하는 우리를 건져주시는 하나
님께 대한 소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