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영광에서 영광으로 (고린도후서 3:7~18)

새벽지기1 2021. 2. 1. 07:10

“우리는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죄와 결핍과 문제로 인하여 쓰러지고 넘어지지만,
모든 것이 영광스럽게 되는 순간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 시대 악함의 특징은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조차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 뉴스보다 가볍게 여기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사람과의 만남보다 가볍게 여기는 모습이 하나님을 얼마나 가볍게 여기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행 7:2)이십니다. ‘ 영광’이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 카보드’ 는 ‘ 무겁다’ 는 뜻의 ‘ 카베드’ 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무겁다는 단어의 뜻이 ‘ 영예롭다’ , ‘ 엄위하다’ , ‘ 중요하다’ 는 뜻으로 발전되면서 결국 영광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분이고, 가장 엄위하신 분이며, 가장 무게 있으신 분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결정은 중요하게 생각하는 무게를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삶에 하나님의 무게가 얼마나 됩니까? 믿음의 삶이란 하나님을 우리 삶에서 가장 무게 있고, 중요한 부분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 영광’ 은 헬라어로 ‘ 독사’ 라고 발음합니다. 우리말로 독이 있는 뱀이라는 단어 ‘ 독사’ 와 발음이 같습니다. ‘ 찬양’ 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그래서 ‘ 독솔로지’는 찬양학, 찬송학이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두 단어를 합하면 ‘ 하나님의 중하심에 대한 찬양과 경배를 올려 드리는 영광’ 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새 언약의 복음과 영광스러운 직분


하나님께서는 ‘ 영광스러운 창조주’ 이십니다. 시편 19편 1절을 개역개정 번역으로 읽어 보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존재하심 그 자체로 영광스러운 분이지만, 창조를 통하여 그 영광을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최고로
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 1장 3절에서 “그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십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인간이 타락했을 때 잃어버린 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롬 3:23). 인간은 본능적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영광이 자신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채워야 할 빈자리를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많은 소유, 지식, 명예, 권력 등으로 영광의 무게를 대체하려고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하나님 영광의 무게를 대체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믿고, 그 안에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여정입니다. 사단이 끊임없이 훼방하고 숨기려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복음의 빛입니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행하신 일을 폄하하고, 왜곡하고, 그분의 영광의 빛을 가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로 말하자면 이 세상에 신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해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이 그들을 비추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고후 4:4). 예수님은 십자가를 영광스럽게 여기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영광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드린 요한복음 17장의 기도를 보면 영광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순간이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 죽음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짐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을 바라보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이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내 영광, 곧 아버지께서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하소서”(요 17:24).
그 영광을 제자들이 보기를 원했고, 제자들을 통해 믿는 우리들이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곧 그분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사람이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고, 그 영광에 사로잡혔고, 그 영광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고, 고난을
기쁘게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 앞에 직면했습니다. 당시 문화에서는 평판이 좋은 사람이나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의 추천서를 가지고 자격을 논했습니다. 그 문화로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 앞에서 사도 바울은 “나는 사도들의 추천서가 없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어떤 추천서도 없지만 나는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았고, 그분의 영광을 보았고, 그 영광을 위하여 나는 일하고 있다. 나의 자격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오늘 분문인 3장 후반부에서는 ‘ 내가 받은 직분은 영광스러운 직분’ 이라고 설명하면서 구약의 모세가 받은 직분과 비교합니다. 왜 구약을 인용하고 비교하며 설명했을까요? 사도 바울을 공격하는 이들은 틀림없이 유대인들이고, 예수님을 통해 도래한 새로운 시대와 새 언약의 시대, 하나님 나라의 축복과 능력을 잃어버린 채 과거의 율법에 얽매여서 올바른 복음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모세와 비교하면서 자신의 부르심을 ‘ 영광’ 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광이라는 단어 자체가 구약에 뿌리를 둔 설명입니다. 우리말성경 번역에서는 3장과 4장에서 영광이라는 단어를 17번이나 사용하면서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의 영광, 복음의 영광스러움을 설명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신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직분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더는 수건을 쓸 필요가 없는데
계속 쓰고 있는 모세처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돌에 새긴 문자의 직분도 영광스러워 모세 얼굴에 나타난 없어질 영광으로 인해 이스라엘 자손이 그의 얼굴을 주목할 수 없었다면 하물며 영의 직분에는 더욱더 영광이 넘치지 않겠습니까? 만일 정죄의 직분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의의 직분은 더욱더 영광이 넘칠 것입니다. 사라져 버릴 것도 영광스러웠다면 영원한 것은 더욱 영광 가
운데 있을 것입니다”(7~9절, 11절).
‘ 더욱더 영광스럽다’ 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옛 언약의 전달자로 부름 받은 모세의 직분도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그러나 지금 사도 바울이 전하고 있는 새 언약은 더욱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신 또한 더욱더 영광스러운 직분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옛언약이 영광스러웠다는 것을 증거하는 예로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 일어난 사건을 설명합
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진 율법을 받습니다. 증거판 두 개를 받고 산에서 내려왔을 때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얼굴에 난 광채로 인하여 백성들이 두려워서 모세를 가까이 할 수 없었습니다. 모세는 두려워하는 백성들을 보고 얼굴에 수건을 썼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그 수건을 벗었고 백성들 앞에 나올 때는
항상 수건을 썼습니다. 이 사건을 예로 들어서 지금 사도 바울이 처한 문제를 변증하는 것입니다. ‘ 수건’ 이라는 단어가 아주 중요한 모티브가 됩니다. 모세가 처음 이 수건을 쓴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에게 나타난 신비로운 광채로 인하여, 영광스러운 광채로 인하여 백성들이 두려워하자 백성들을 배려해서 수건으로 가리고 만났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
수건을 계속 썼습니다.
“모세가 없어질 것의 결과에 이스라엘 자손이 주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얼굴에 수건을 썼던 것과 같은 일을 우리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은 완고해졌습니다. 그들은 옛 언약을 읽을 때 오늘날까지도 수건을 벗지 못하고 계속 그대로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벗겨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까지도 모세의 글을 읽을 때마다 수건이 그들의 마음을 덮고 있습니다”(13~15절).
사도 바울이 모세가 수건을 계속 썼다는 것을 문제 제기하고 적용하고 있습니다. 처음 모세는 분명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수건을 썼습니다. 본문에서 모세가 백성들 앞에 나갈 때마다 수건을 쓴 이유를 변명하고 있습니다. 13절에서 그 이유를 “모세가 없어질 것의 결과에 이스라엘 자손이 주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얼굴에 수건을 썼던
것과 같은 일을 우리는 하지 않습니다”라고 설명합니다. ‘ 없어질 것’ 은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입니다. 어느 한순간 분명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없어질 것의 결과에 이스라엘 자손이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계속 썼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배려해서 수건을 썼는데, 나중에는 없어질 결과에 백성들이 주목하지 못
하게 하려고 계속 수건을 썼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계속 수건을 쓴 것을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얼굴에 광채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수건을 쓰고 나갔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자신의 얼굴에 광채가 계속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수건을 쓰고 나갔다고 보는 것입니다. 둘째,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고한 마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얼굴에 왜 광채가 나게 했을까요? 신비로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보여 준 것입니다. 모세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세가 받은 옛 언약, 율법이 중요하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알려 주려고 신비한 현상을 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신비한 현상을 모세에게 동반시켜 주셨
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없어졌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마음이 완고해서 내 얼굴에 광채가 나면 내가 전하는 율법을 하나님의 법으로 여기지만, 광채가 없어지면 또 다시 마음이 완고해져서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지
않을까봐 계속 수건을 썼다”고 설명합니다

 

선택은 어느 쪽으로 해도 괜찮습니다. 두 가지 해석이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게 있습니다. 영광의 광채는 일시적이었
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순간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수건도 일시적으로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수건이 그리스도 안에
서 벗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이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공격하고 있는 유대 율법주
의자들에게 예수님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계속 수건을 쓰고 있는 문제를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새로운
언약과 더 영광스러운 것이 주어져서 수건이 필요 없는데 수건을 계속 쓰고 있는 모세처럼 모세의 글, 하나님의 옛 언
약을 읽을 때 마음에 수건을 덮은 채로 읽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


“오늘날까지도 모세의 글을 읽을 때마다 수건이 그들의 마음을 덮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로 돌아갈 때마다 수건
은 벗겨집니다”(15~16절).
이 시대에도 수건을 쓰고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수건은 예수님을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깨닫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잘못된 세계관, 사고체계, 사상 등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진화론이라는 수건입니다. 사람들
은 오랜 시간 이루어졌다고 하면 그 중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면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진화론에 속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면 믿습니다. 그러나 기원에 관해서는 오랜 시간이든
짧은 시간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진화론이라는 수건이 이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덮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속임수입니다. 기간이 짧든 오래되었든 그것이 기원에 관한문제를 해결해 주는 게 아닙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워질 수 있다고 믿는 율법주의라는 수건을 덮고 있었습니다. 성경의 문화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는 문자주의로 인하여 수건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부르지 말자고 했습니
다. 이 시대는 예배당, 예배 처소입니다. 진정한 성전은 우리들이기 때문에 올바로 적용해야 합니다. 온누리교회에서는
성전이라는 말은 되도록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 전체의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한 구절이나 한 단어만으로 해
석하는 것도 수건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하지 않는 것이 수건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수건이 많이 덮여져 있으면 무엇인가 희미합니다. 그런데 주의 영이 계
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주께서는 영이시며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바라보는 가운데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 일은 주의 영으로 말미암습니다”(17~18절).
사도 바울이 수건을 벗을 수 있는 길을 제시했습니다. 주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입
니다. 주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되었음을 보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고,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셨습니다. 영광스러웠던 옛 언약을 십자가 부활로 성취하시고, 새 언약
의 시대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영광스러운 직분을 수행하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지혜롭습니까?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 사람들과 맞서 싸우는 게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덮고 있는
수건을 지적했습니다. 그것이 긍정적인 의미든 부정적인 의미든 자신의 얼굴에서 영광이 사라졌으면 수건을 벗어야 하
는데 모세가 계속 수건을 썼다고 지적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불필요한 일이었다고 지적하면서 새 언약의 영광
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담대합니까? 당시 유대인들에게 모세는 엄청난 신적 존재였는데, 모세가
불필요한 행동을 하는 것처럼 지금 당신들도 마음에 수건을 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 있느니라”는 말씀은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뜻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 주어진 복음 안에
서 자유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규정이 너무 많습니다. 자유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안에서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 자유함은 영광의 자유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바라보고 있다”고 합니다. 모든 피조물이 종노릇하는데서 자
유케 되는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서 영광의 자유
에 이르는 영광스러운 구원에 이르는 순간 피조물들이 해방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온전한 구속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고, 모든 것이 새로워지며, 피조물까지 구원받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죄로부터 자유케 되
는 칭의, 의롭다 함을 받는 구원, 현재 거룩함을 이루어 가는성화, 영광스럽게 되는 영화의 구원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구원을 바라보는 것이 소망입니다.


영원한 영광에 대한 소망


“우리가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있으므로 더욱 담대하게말합니다”(12절).
사도 바울에게는 영원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소망이 있습니까? 올 한해 소망의 복음을 굳게 잡으라는
표어에 나오는 소망은 영원한 영광에 대한 소망입니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이 땅에서는 죄와 결핍과 문
제로 인하여 쓰러지고 넘어지지만, 이 모든 것이 변화되어 영광스럽게 되는 순간이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것
을 바라보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담대했던 것입니다.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광에 대한 소망입니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
인지를 아는 사람은 ‘ 존엄성’ 을 절대로 하찮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려줘야
합니다. 존엄성을 높여줘야 합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 주면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우
리에게 주어진 영광을 깨닫고, 그 영광을 바라보십시오. 날마다 수건을 벗은 마음으로 주의 영의 도우심을 받으십시
오. 소망 가운데 승리하며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