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예수의 주 되심과 우리의 종 됨 (고린도후서 4:1~6)

새벽지기1 2021. 2. 7. 07:04

“우리가 받은 직분 때문에 낙심하지 아니하고,
더욱 순수하고 정결하게 살아가면서
복음의 진리를 담대하게 전해야 합니다.”

 

최근 교회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일이 가장 소중한 일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표현대로 하면 “교회는 스스로를 추천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교회는 스스로를 추천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선행을 할 때만 세상의 소망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행이 필요 없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회에서 가장 선한 행실을 보이고, 가장 희생적인 섬김을 행하는 공동체입니다. 실제로 이 땅에서 선행을 행한 백성들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교회가 선한 행실 때문에 존재해 온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한 행
실을 할 때만 교회로 존재했다면 교회는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교회를 통해 전해 온 복음이 진리가 아니었다면 교회는 벌써 사라졌을 것입니다. 진리와 성도들의 삶이 얼마나 차이가 나느냐의 문제입니다. 성도들이 복음의 진리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한다고 해서 진리가 부정되거나 소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차이가 심하게 나기 때문에 비난받고 욕을
먹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 나는 안 믿는다”고 말합니다. 어리석은 판단입니다. 분명 진리인데 어떻게 믿지 않을 수 있고, 고백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복음의 진리와 우리 삶에 차이를 좁혀 가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왔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전하는 복음의 진리가 사람들에게 영향이 없으면 가짜는 생기지 않습니다. 그것이 분명 진리이기 때문에 모방해서 만든 모조품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상황에서 우리가 믿고, 고백하고, 전해야 하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바울이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해서 세운 교회들로부터 ‘ 무자격자’ 혹은 ‘ 거짓 사도’ 라는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매우 낙심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낙심’ 이라는 단어는 단지 힘이 빠지는 정도가 아니라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바울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를 우리의 신앙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포기하지 않았던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자신이 받은 직분(ministry) 때문입니다. 

직분이란 복음의진리를 전하는 직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이 직분을 받은 사실을 생각해 낙심하지않습니다”(1절). 바울이 고난 속에서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그를 지탱해준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직접 대면해서 계시받은 복음의 진리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직분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모여서 제도와 정관과 내용을 만들어서 믿기로 결정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가 인간으로부터 출발한 공동체였다면 수많은 역사적 과오로 인해서 벌써 사라졌을 것입니다. 교회가 역사 속에 행했던 수많은 과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세워진 직분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교회가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고, 복음의 진리에 합당하지 않으며, 세상의 시험과 유혹에 넘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계속 일어났던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낙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우리가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때로 “당신들은 믿는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지적을 받으면 우리는 “그렇습니다. 우리는 불의하고, 부족하고, 위선적인 모습이 여전히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일 뿐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바울은 쏟아지는 공격에 자신의 직분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부여된 직분으로 인하여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둘째, 하나님과 스스로의 양심 앞에서 살펴보아도 순수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순수하고 순결하다면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숨겨진 수치스러운 일들을
버렸고 간교하게 행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혼탁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의 양심에 우리 스스로를 추천합니다”(2절). 우리를 낙심하게 하는 것은 어려운 상황이 아닙니다. 진리를 몰라서 공격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반대자들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순수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순결함을 추구한다면 오해와 비난, 반대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을 본받아야 합니다. 숨겨진 수치스러운 일을 버려야 합니다. 간교한 행위를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혼탁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바울을 공격하는 이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탐욕을 이루기 위하여 왜곡해서 해석하고, 복음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전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임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혼탁하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또한 모든 사람들의 양심 앞에서 자신을 추천할 수 있을 정도로 순수함을 추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받은 직분,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일에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
우리는 ‘빛의 자녀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말씀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둠에 빛을 비추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와 같은 새 창조의 역사입니다. 하나님 창조의 빛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비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복음의 빛이 비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엄청난 어둠의 세력들이 있습니다. 4절의 ‘ 이 세상에 신이 하는
일’ 과 6절의 ‘ 창조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일’ 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들로 말하자면,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해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이 그들을 비추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4절).
“‘ 어둠에서 빛이 비치라’ 고 명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셨기 때문입니다”(6절). 4절에서는 ‘ 이 세상의 신’ 이 하는 일을 설명하고, 6절은 창조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신이 하는 일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불순종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이 비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믿는 이들의 마음에는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춰주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복음의 빛이 비치지 못하게 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계속해서 복음의 빛을 비춰주시는 것입니다. 이 같은 갈등과 대립의 역사가 세상 속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빛을 가리는 일을 하는 영적 실체가 있습니다. 보이는 사람들만의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적 실체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빛이 비치는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은 단순한 정신적
인 계몽이 아닙니다. 태초에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마음속에 재창조되고, 어두운 영혼에 빛이 비침으로 하나님과 자신을 알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스스로를 ‘ 세상의 빛’ 이라 하셨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빛의 자녀들’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신과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가 대조됩니다. 비교종교학에서는 이 세상에 있는 여러 종교를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교, 불교, 유교 등으로 한 문장에 나열합니다. 종교의 창시자들이라며 예수 그리스도, 무함마드, 석가모니, 공자 등을 한 문장으로 나열합니다.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정확한 분류법이 아닙니다. 영국 언론인이자 비평가 G. K. 체스터턴은 이런 분류법은 속임
수에 불과하고, 착시현상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와 창시자들은 서로 전혀 관계가 없고, 공통점이 없기 때문에 같은 문장에 배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철학으로 분류되는 종교와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한 문장으로 배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분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분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부활하셨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체스터턴은 “하나님, 그 외의 신들, 악마들, 그리고 철학자들로 분류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참된 인권, 자유, 인간됨의 회복


진화론적 사고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종교도 진화하고 발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등종교, 고등종교로 구분합니다. 기독교는 고등종교라고 인정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체계가 있고, 경전이 있고, 그것을 깊이 연구하는 체계가 있기 때문에 고등종교라고 합니다. 진화론적 사고입니다. 샤머니즘에서 다신교, 유일신 사상으로 발전했다고 생각합니다. 진화론적 사고방식입니다.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여러 문화인류학적인 증거들을 보면 진화론자들이 원시인, 미개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조차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성경이 그 증거입니다. 구약시대 백성들이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을섬긴 증거가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진화하고 발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인간들이
기억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지우면서 여러 우상을 섬기고 샤머니즘으로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샤머니즘에서 유일신으
로 발전한 것이 아닙니다.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샤머니즘으로 추락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신이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11장 마지막에서 “네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신이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해서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
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진리의 말씀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진리에서 떠남으로 사람들이 이 세상의 신에 의하여 사단의 역사로 넘어가고 샤머니즘으로 추락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음이 가려져 있다면 그것은 멸망하는 사람들에게 가려져 있는 것입니다”(3절). 이 세상의 신이 끊임없이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어둠에 빛이 비치라”고 명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끊임없이 그 빛을 어두운 마음에 비추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스스로를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빛이 아닙니다. 우리는 ‘ 빛의 자녀들’ 입니다. 해와 달과 별이 빛의 발광체 역할을 하는 것처럼 우리는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진리의 빛을 발광하는 발광체입니다. 빛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해와 달과 별을 통해 우리에게 빛을 전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빛이신 하나님께서 어두운 영혼들의 마음에 새 창조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왜 선교가 필요합니까? 이 세상을 혼미하게 하는 영들에 의하여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우상숭배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합니다. 정
말 인간다운 삶을 사는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의 하나님을 경험하는 이들입니다. 참된 인간 존중의 역사가
성경이 전해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말씀이 증거되고, 복음이 증거되는 곳마다 참된 인권, 참된 자유, 참된 인간 됨이
회복됐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제3의 종족’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 되신 것과 예수 때문에 우리가 여러분의 종 된 것
을 전파합니다”(5절). 바울이 믿고, 실천하고 있던 복음전파에 대한 견고한 반석입니다.

첫째, 우리 자신을 전파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빛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빛을 전달하는 발광체일 뿐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교회 조직을 확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세상의 어떤 집단보다 강력해지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중세처럼 교회가 국가권력 위에 존재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가 이기적인 집단으로 보이는 것만큼 비참한 일도 없습니다.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기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주 되심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의 주 되심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 주’ 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 큐리어스’ 입니다. 당시 로마 황제를 불렀던 단어입니다. 로마 황제가 자신을 신격화한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누군가의 종이 됨을 전파하는것입니다.

 예수님의 주 되심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누군가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전파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사람이 예수님이 주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그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려움이 많이 생깁니다. 우리 자신을 전파하지 않는 것, 예수님의 주 되심을 전파하는 것까지는 쉬운데 세 번째 단계가 어렵습니다. 누군가에게 예수님의 주 되심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내가 그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조선시대 이 땅에 찾아온 선교사님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조선인의 종처럼 섬겼습니다. 병든 사람, 힘든 사람, 어려운 사람들의 손과 발을 씻어주고 섬겼습니다. 종으로서 섬긴 그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이 나타났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님들은 그 민족, 그 나라 백성들의 종의 모습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주후 2세기경 로마 엘리트 계층에게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을 알려 주고 싶었던 한 사람의 편지가 있습니다. 그는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 제3의 종족’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제1의 종족은 로마인을 뜻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많은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 중에서 최고의 신은 로마 황제였습니다. 그래서 로마 황제를 ‘ 큐리어스’ , ‘ 주’ 라고 부른
것입니다. 로마는 수많은 우상을 섬겨도 상관없다고 했습니다. 황제를 주님으로 고백하면 무슨 신을 섬기든, 우상을 섬
기든, 어떻게 살든 상관없었습니다. 이 시대의 모습입니다. 제2종족은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여호와를
예배하고 그분께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문화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삶을 살았습니다. 종교적 율법의식이
그들만의 체계를 유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율법을 폐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율법을 지키며 자신
들의 문화에 고립된 사회에서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제3의 종족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들은 이웃이 쓰는 언어를
사용하고, 똑같은 옷을 입고, 그 지역 관습을 따랐습니다. 겉으로 볼 때 로마 사회에 동화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들은 로마 황제를 주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고백했습니다. 거기
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향락과 부요함에 도취되지 않은 외국인처럼 살았습니다. 이 땅에 살지만 다른 나라에
잠시 여행 온 순례자처럼 살았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닌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를 바라보며 살았습니
다. 그들은 종의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 제3의 종족’ 이라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황제를
주라 부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하고, 예수님 때문에 당시 사회 사람들이 가장 하기 싫어하고 피하고 싶어
하는 일들을 스스로 했습니다.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주 되심과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종 됨을
전파하면 복음이 온 세상에 더욱 전파될 것입니다.


우리는 제3의 종족이 되라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 서 있습니다. 이 땅에 살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면서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세상이 복음을 알지 못하기에 때로 교회를 공격할지라도 거기에 낙심하고 무너질 것이 아니라 우리
가 받은 직분 때문에 낙심하지 아니하고, 더욱 순수하고 정결하게 살아가면서 복음의 진리를 담대하게 전해야 합니다.
온 세상에 복음 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