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사람의 추천인가 하나님의 부르심인가 (고린도후서 3:1~6)

새벽지기1 2021. 1. 23. 20:57

“하나님께로부터 온 확신, 하나님 향하여 가질 수 있는 충분함이
고난, 시련, 시험,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소망을 허락합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과 동시에 자신을 알아가는 여정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이 <기독교 강요> 제1장에서 가장 먼저 서술한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신을 아는 지식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내용입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만나야 자기 자신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우리 자신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영혼은 자기 자신의 영혼을 볼 수 없습니다. 정반대로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이해하는지가 곧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는지와 연결됩니다. 과도하게 자신을 확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늘 옳고 다른 사람은 늘 틀렸다고 생각하는 자기주장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자신이 세상의 구원자가 된 것처럼,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아무 일도 되지 않을 것처럼 행동하는 과도한 자기 확신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왜곡된 자기 사랑입니다. 정반대로 자신은 아무 쓸모가 없고 이 사회는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자기비하, 자기 거부, 자기 경멸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성공을 거듭한 사람은 지나친 자기 확신에 빠져 있을 것이고, 실패를 거듭한 사람은 자기 거부나 자기비하에 빠져 있기 쉽습니다. 과도한 자기 확신만큼이나 자기비하도 자기 사랑입니다. 왜곡된 자기 사랑입니다. 자기 자신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대해야 할 자기 자신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지나친 자기 사랑은 과도한 자기 확신이나 자기 거부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교만과 열등감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이면에 열등감이 숨어있습니다. 열등감이 표출되는 사람은 이면이 교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열등감을 느낄 이유가 없고, 교만할 이유도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복
음 아래서, 십자가 아래서 어떻게 이해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복음 아래서 우리 자신을 두 가지 관점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며, 기뻐하시는 대상입니다. 비록 우리가 죄 가운데 타락한 모습일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바라보시는 관점으로 자기 자신을 바
라봐야 합니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어야 하는 자기 자신을 바라봐야 합니다.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던 그 자아입니다. 완전히 영원히 사멸되어야 할 존재로서 자기 자신을 바라봐야 합니다.

 

자격 없다고 공격당하는 사도 바울


복음 안에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시험해보는 중요한 상황이 있습니다. 누군가 거짓된 음모와 왜곡된 사실로 모함할 때입니다. 어떤 갈등에 휩싸일 때입니다. 이때 우리의 자아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봐야 합니다. 옛 자아의 영향력대로 행동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사랑받고 존중받아야 할 자아가 여러 공격을 통해서 자기 거부, 자기비하, 자기 경멸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모함과 왜곡된 소문 등으로 인해 심각한 심리적 충격을 받고 스스로 생명을 끊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러한 위기와 도전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자격이 없는 자라고도전을 받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자신을 증명하는 도구로 사용했던 추천서가 사도 바울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명망 있고, 평판 좋은 사람들의 추천서를 가지고 신분과 능력을 증명하는 시대입니다. 당시 교회도 추천서 문화에 깊이 물들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에게는 추천서가 없었습니다. 아니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사도로서 자격이 있느냐는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당시에는 예수님과 동행하고, 일정 기간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며,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에게 ‘ 사도’ 라는 직임을 부여했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한 이력이 있어야 하고,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될 수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과 동행하기는커녕 사도들을 핍박하는 핍박자였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조건이 구비되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을 증거해줄 사람이 자기 자신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이 사역을 통해 나타난 분명한 증거를 알고 있었기에 바울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거짓된 사람들의
활동에 넘어가서 바울을 불신임하고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복음을 전해서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 자신이 개척한 교회 성도들로부터 무자격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자신의 자격을 변호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필요한 일처럼 보였겠습니까? 얼마나 어리석어 보였겠습니까?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바울의 안타까운 모습이 고린도후서 장마다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울은 분명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의 삶과 열매가 추천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증거였습니다.

 

바울이 누구의 추천서도 필요 없는 이유


바울이 누구의 추천서도 필요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자신에 대한 그리스도의 편지(추천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고 읽고 있는 우리 마음에 기록된 우리의 편지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섬김을 통해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이것은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돌판에 쓴 것이 아니라 육체의 마음 판에 쓴 것입니다”(2~3절).
여러분, 한 사람의 추천서를 받는 게 쉽겠습니까? 아니면 자신을 통해 변화시킨 한 사람을 만들어내는 게 쉽겠습니까? 명망 있는 사람의 추천서는 어떻게든 받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통해 변화된 한 사람이 있는 것은 추천서와는 비교할 수 없는 희생과 헌신과 노력이 요구됩니다. 바울에게 “문서로 된 추천서를 보여달라. 그렇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겠다”고 주장하고 있는 그들에게 바울이 “추천서를 원하십니까? 그대들이 바로 나에 대한 추천서입니다”라고 답변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으로부터 혹은 누군가로부터 추천서를 받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것이 사람이 변화된 열매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곧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고백하는 이유는 살아계신 그리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통해서 고린도교회에 역사하셔서 변화된 그들의 삶 자체가 자신에 대한 자격 증명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자격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의 역사로’ 너희 가운데 일어난 변화가 자신에 대한 추천서라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영의 역사, 고린도 지역을 다닐 때 나타났던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있었습니다. 물론 모든 복음 전도 역사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고린도라는 도시의 특성이 있었습니다. 고린도는 가장 번화했지만 가장 음란했고, 가장 퇴폐했고,
하나님 없는 우상이 가득했던 도시입니다. 그 도시에 어떻게 고린도교회가 생겨날 수 있었겠습니까? 강력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자격이 성령의 능력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통해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나타났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고린도교회는 다른 교회에는 없던 은사들이 나타나서 은사의
진위를 판별해 달라는 요청도 했습니다.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둘째, ‘ 바울의 섬김을 통해’ 서 그들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이 자신에 대한 증명이라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와 우리의 섬김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 이면에는 언제나 섬김이 있습니다. 종의 마음을 품고 행하는 섬김이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잠시 임했다가 떠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종의 섬김의 태도를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때 성령사역자로 쓰임 받았던 사람들이 잘못된 길로 가는 이유가 종의 마음, 섬김의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또 성령의 은사와 역사를 간절히 구하지 않았더라도 진정한 섬김의 태도와 마음을 가진 이를 하나님은 반드시 성령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에 대한 자격 증명을 요
구하는 이들에게 참된 사역자의 모습을 방증하고 있습니다. 타이틀(Title)이 아니라 타올(Towel)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수건을 두르시고 씻겨주신 섬김의 상징이 타올(수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섬김은 십자가에서 잠시 고통받고 죽으시는 차원이 아닙니다. 영원하신 그분이 시간 속에 오시고,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 피조물이 되시며,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모든 과정이 섬김의 여정입니다. 그 섬김을 통하여 성령님이 임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을 통하여 성령의 역사가 임했듯이, 바울의 섬김을 통하여 고린도교회에 성령이 임하셨고, 우리의 섬김을 통하여 또 다른 영혼들에게 성령의 역사가 임하는 것입니다.


셋째, 바울은 모든 성령의 역사가 섬김을 통하여 임하는 대상은 마음이라고 설명합니다. ‘ 육체의 마음 판’ 에 새겨져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영의 역사의 대상은 언제나 마음입니다. 인격의 중심입니다. 마음은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지식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모세의 시대 하나님이 돌판에 새겨주신 율법은 하나님의 진리였지만, 그 율법이
사람들이 읽고 생각하는 지식의 영역에만 머무르고, 그 지식을 마음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의 책임인데 그럴 능력이 없었던 이유는 마음이 비뚤어져 있고, 왜곡됐고, 부패했고, 어둠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는 대로 행하지 못하는 것은 지식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를 보여줄 뿐
입니다.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문자가 아니라 영으로 말미암는 새 언약의 일꾼이 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도록 하셨습니
다. 문자는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6절).
하나님 영의 역사는 우리의 마음을 다시 살리시고, 부드럽게 변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참된 지식을 우리 마음에 새겨
주심으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새 언약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기 자신을 설명할 때 ‘ 나는 새 언약의 일꾼
’ 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엄청난 자기 고백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나는 새 언약의 일꾼이다. 어떤 사람들의 추천서나
증명서로 증명되는 자원이 아니다. 나는 새 언약의 일꾼으로 지금 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들이 바로 나에 대
한 추천서이다. 나를 통해서 쓰신 그리스도의 편지 곧 그리스도께서 직접 쓰신 추천서”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자격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바울이 다른 사람의 추천서가 필요 없다고 설명하는 이유는 자신의 자격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확신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이 우리에게서 나온 것처럼 스스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격은 오직 하
나님께로부터 났습니다”(5절).

 

현명한 사람은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가 겸손하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 인식 자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선한 일이라는 생각조차 못하는 상태가 진짜 선행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사람
들에게 어떻게 칭찬받을지까지 계산합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자격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자격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추천서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자격 있는 사람이냐고 화내며 싸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은 자격이 없다고 했습니다. 자격은 오직 하나님께로부
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문단에서 쓰는 중요한 두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와 또 다
른 하나는 ‘하나님께 대해’ 입니다. 바울의 자격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하나님께 대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
나님께로부터 난 소명과 부르심이 바울을 움직였던 모든 동력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은 사람
들의 칭찬에 쉽게 넘어가지 않습니다. 또한 사람의 모함에도 쉽게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습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비춰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공격했을 때 바울은 자신은
옳고 저들은 틀리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을 돌아봤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상황을 허락하신 이유
는 바울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어떤 상황에서도 움직일 수 없는 확신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확신’ 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입니까? 다른 말로 표현하면 ‘ 충분하여 차고 넘친다’ 는 의미입니다. 바울에게
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차고 넘치는 믿음과 확신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만든 확신, 스스로 부여한 자격은 어려운 환경
과 공격에 모두 무너져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확신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
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확신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 시대 교회가 때로 오해받고, 공격받고, 공격받을 만한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 모든 상황에서 우리가 교회로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되새기게 됩니다. 우리 자신
을 성찰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공동체인지 돌아봐야 합니다. 만일 그런 확신이 없다면 교회
는 시류에 휩쓸려 갈 것입니다. 사회학자들이 “교회가 더욱 소멸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그런 기준으로 교회가 무
너질 거라면 교회는 벌써 역사 속에 무너졌을 것입니다. 지금과 비교할 수 없는 핍박이 교회의 역사 속에 있었습니다.
세계 역사 속에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들의 핍박을 시작으로 수많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교회가 핍박을 받았습니다.
사실 교회가 주류였던 적이 없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주변에 있었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핍박 속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가졌던 확신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공동체, 하나님께 대하여 존재하는 공동체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 진정 영원한 소망인지, 우리에게 복음을 붙잡고 죽음을 이길 소망이 있는
지, 이 세상 모든 시련을 이길 소망이 있는지, 시험과 고난 앞에서 기뻐할 수 있는지, 위기 상황에서도 자신을 먼저 생
각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넉넉한 사랑이 있는지가 바울의 확신에서 흘러 나오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에서
는 5절을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충분하고 넘치는
확신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교회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교회가 사람
들로부터 오해받고, 공격받고, 비난받습니다. 비난받을 일이 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비난받을 일이 없음에도
공격받으면 바울에게 있었던 확신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대하여 존재해야 합니다. 날마다 말씀 앞에
회개하고,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보고,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부름을 받은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인기나 추
천은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확신, 하나님을 향하여 가질 수 있는 충분함이 고난,
시련, 시험,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소망을 우리에게 허락합니다. 부르심 앞에 온전히 순종했던 바울의 확신을 경험하
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