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생명 존중의 축복 (열왕기상 17:7~16)

새벽지기1 2020. 12. 24. 07:09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를 깨닫게 하시고,
삶을 의미 있게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라는 절망적인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상황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너져서 죽음밖에 길이 없다고 생각하는 절망적인 순간에도 소망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절망의 어둠을 이길 수 있는 소망의 빛이 존재합니다. 소망의 빛은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시고, 우리의 생명을 존중히 여기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
르는 병>이라는 책에서 ‘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 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빠져 있는 절망을 두 가지 종류로 구분했습니다.


첫째,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는 절망입니다. 현재의 자신을 싫어하고 거부하며 ‘다른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과거를 후회하고, 비현실적인 망상에 빠진 사람입니다. 키르케고르는 이것을 ‘연약함의 절망’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둘째,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는 절망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가 되려는 것입니다. 스스로 절대자가 되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절망을 키르케고르는 ‘반항의 절망’ 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때로 연약함이나 반항에 빠져 끊임없이 절망합니다. 절망이 곧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두 가지 절망 이면에 숨어 있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이 있습니다. 생명을 인간의 자유의지 영역이라고 여기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프랑스 혁명 이후 인본주의와 유물론이 전 세계에 확산되고, 생명의 주인이 자기 자신임을 주장하면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시대가 낙태나 자살을 용인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은 철저하게 유물론적 관점입니다. 인간의 생명 또한 물질로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속임수요, 전략일 뿐입니다.


엘리야를 그 가정에 보내신 이유


생명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살은 살인이고, 십계명을 어기는 것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생명이 존중되어야 하고, 어떤 절망 속에서도 생명을 지켜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분이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너를 만드신 분이 말씀하신다. ‘ 내가 너를 건져 주었으니 두워하지 마라. 내가 네 이름을 불렀으니 너는 내 것이다’”(사 43:1).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죽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의 절망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의 상황에서 죽을 각오로 하나님을 붙잡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소망과 구원의 빛이 임할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생명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를 볼 수 있는 사건이 열왕기상 17장에 나옵니다. 열왕기상 17장에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악한 왕이었던 아합과 이세벨을 상대해서 하나님의 사역을 했던 엘리야의 행적이 나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뜻을 전할 때 나타났던 사건 속에 생명을 존중하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섭리를 발견할 수있습니다.


열왕기상 17장은 아합 왕에게 엘리야가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엘리야가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전합니다. 비는 생명을 지탱하는 물의 근원입니다. 수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으면 기근으로 생명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시대의 악함을 징계하시고 심판하실 때는 인간들이 당연
하다고 여겼던 것들을 멈추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자연을 자동으로 착각합니다. 비가 내리는 것을 자연이라고 생각하고, 자동으로 비가 내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생명을 돌보시기 때문에 비를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해가 아침마다 자동으로 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해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지켜 주시기 위하여 비춰 주시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을 존중히 여기십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하고 떠나는 영혼들의 생명까지도 존중하십니다. 그래서 악인에게도 햇빛과 단비를 내려주십니다.

 

그러나 때로 하나님께서 악함을 징계하시고 경고하시기 위해서 인간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멈추는 것으로 징계하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엘리야를 아합 왕에게 보낸 것입니다. 무명의 시골 사람 엘리야가 당시 최대 권력자 앞에서 “수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죽음을 무릅쓴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지켜 보호하
시기 위해서 그릿 시냇가로 보냅니다. 그리고까마귀를 통해 먹을 것을 보내 주십니다. 이제 시내가 마릅니다. 하나님의 예언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사르밧’ 이라는 마을로 보내십니다. 사르밧은 이방 동네입니다. 시돈이라는 이방 나라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시돈은 이세벨과 아합 왕의 부인, 우상숭배의 진원인 이세벨의 나라입니다. 바알 숭배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지방이 시돈 지방입니다. 시돈 지방은 그릿 시냇가로부터 160km 떨어졌다고 합니다. 사르밧은 시돈에서 13km 떨어진 곳입니다. 이렇게 먼 마을까지 엘리야를 보냅니다. 시돈에 있는 사르밧은 하나님의 선지자인 엘리야가 돌봄을 받고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그곳에서 한 과부를 통해 돌봄과 공급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근이 없어도 당시 과부의 신분은 가장 고통받는 상황이었습니다. 기근이 오면 더 큰 고통이 있을 텐데 과부를 통해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이 매우 이상합니다. 그럼에도 엘리야는 순종했습니다.

 

엘리야가 사르밧에 도착했을 때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 한 여인을 만납니다. 그 여인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과부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야가 그 여인에게 “빵도 좀주시오”라고 요청합니다. 그때 그 여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는데 제게 빵은 없고 통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제가 나뭇가지를 주워 집에 가서 저와 제 아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 먹고는 죽을 생각이었습니다’”(12절).


마지막 구절을 주목하십시오. 그 여인의 상황이 절망적이었습니다. 누구를 도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가루 조금과 기름 조금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조금 남은 것을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을 것이라고 결심했습니다. 죽기로 작정하고 마지막 식사를 위해 나뭇가지를 주우러 온 것입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가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그곳에 보내신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엘리야가 두 사람의 장례식을 치러야 할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현실이 너무 맞지 않는 상황입니다. 

 

열왕기상 17장 전후에 나타난 사건을 우리는 엘리야에게만 초점을 맞춰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죽음의 위기에 있는 가정에 보내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생명을 얼마나 존중하시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엘리야를 그곳에 보내신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기다려주는 한사람, 자기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한 사람,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는 한 사람이 있으면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군가와 교제하고 관계를 맺으며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대상이 없다면 살 이유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그 한 사람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 여인과 아들의 생명을 지키는 한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합니다. 엘리야가 여인과 아들의 마지막 식사를 자신에게 먼저 가져오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 여호와가땅에 비를 내리는 그날까지 통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겠고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으리라’ 하고 말씀하셨소”(14절).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엘리야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가정에 음식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공급하실 것을 믿고 자신에게 음식을 가져오라고 한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 여인이 순종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같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가정에 음식이 끊어지지 않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한편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사르밧 과부를 통해 엘리야에게 공급하신 것이지만, 다른 한편의 더 중요한 메시지는 엘리야를 보내서 죽음의 위기에 처한 가정을 살리신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셨다


우리는 이 부분을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존중하시고 어떻게 살리시는지를 삶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가지 적용이 가능합니다.
첫째,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여인과 그 아들이 마지막으로 먹을 음식을 엘리야에게 먼저 가져오라는 것은 이기적인 요구처럼 보이지만, 그 여인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길로 들어가게 하는 방법입니다. 마지막 남은 것을 엘리야에게 주고 나면 아무것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언제 만났습니까? 하나님께서 진정 나의 모든 것 되신다고 고백하는 때가 언제입니까? 나에게 많은 것이 있을 때가 아닙니다. 조금 있을 때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없을 때입니다.

 

의지할 아무것도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가장 깊게 만납니다.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나에
게 있는 어떤 것을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절망으로 다가오는 고통은 무엇인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아무것
도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찾아옵니다. 나의 것은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만이 모든 것이심을 깨달으
면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며 받은 고난이 너무 커서 살 소망이 끊어졌던 적이
있습니다.
“형제들이여,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에 대해 여러분이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질 지경이 됐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사형 선고를 내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고후 1:8~9).

 

고난이 너무 심해서 결국 마음에 사형 선고를 내려야 했습니다. 거기서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소망이 끊어졌고, 절망
적인 상황에서 마음에 사형 선고를 내렸는데 그때 나 자신을 의지하는 삶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으로 변화되었습
니다. 하나님께서 이 진리를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그 여인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아무것
도 없는 상황, 죽음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을 때 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남은 식량을 모두 던지고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 들어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게 되었고,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모든 것 되신 하나님의 약속만을 붙잡
는 믿음의 삶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을 선택하고 싶다는 것은 밑바닥인 것 같지만 사실 가장
밑바닥이 아닙니다. 죽음을 선택하고 싶은 것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죽고 싶어 죽는 사람은 없다
”는 말이 있습니다. 고통을 피해서 죽음을 선택하는 잘못된 선택을 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여인이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붙잡고 의지하도록 믿음의 삶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혹시 죽고 싶은 절망이 찾아온 영혼이 있습니까? 아직
밑바닥이 아닙니다. 남아 있는 자존심, 나에게 남아 있는 그 무엇이라도 하나님께 내려놓고 완전히 밑바닥으로 내려가
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의 모든 것, 나의 생명까지도 전적으로 하나님
께 달린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때부터 살아 역사하시며 공급하십니다.


누군가를 도움으로써
인생의 가치와 목적 깨닫는다


둘째, 누군가를 도움으로써 인생의 가치와 목적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남은 음식을 먼저 엘리
야에게 가져오게 하심으로써 그 가정의 가치, 그 여인의 가치, 인생의 가치와 목적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풍
족한 빵을 먼저 주시는 기적을 베풀어 주지 않으시고, 섬김과 나눔과 돕는 인생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배부름을 주시
기 전에 먼저 누군가를 돕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인생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 극도로 가난해서 죽음을 선택한 사람
에게 누구를 도우라고 하고, 무슨 섬김을 요구하겠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인간 사고의 한계입니다. 내가
너무 어렵고 힘든 상황일지라도, 가진 것이 거의 없을지라도 우리는 누군가를 여전히 도울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
이 인간의 가치요, 고귀함이요, 삶의 목적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나의 어려운 상황을 바라보면 발견되지 않습니다. 어
떤 상황에서도, 아주 작은 것으로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인생의 목적입니다.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은 무조건 도움만 받는 인생이 아닙니다. 그들도 아주 작은 것이지만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것
을 알려줘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절망에서 빠져나오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우울하고, 어
려운 상황에 있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가치 있는 인생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한국정
서행동장애학회의 한 논문에서 포항, 경주, 영천에 소재한 남녀 중고등학생 642명을 대상으로 삶의 만족도, 행복, 회복
탄력성, 사회적 책임과 자원봉사와의 관련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청소년들이 누군가를 돕는 것이 인생의 행복, 삶의
만족도와 아주 의미 있는 연결이 있었습니다. 마음의 문제, 정신적 문제,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누군가
를 돕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도록 해 줘야 합니다. 엘리야를 통해 위기에 처한 가정을 돕는 하나님의 손길이 바로 그
과정입니다. 극한 가난으로 인해서 아들과 함께 죽음을 선택한 여인에게 엘리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음성은 생명을
존중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붙잡지 말고 하나님을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상황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라는말씀입니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거짓에 속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며
돌보십니다. 엘리야를 보내서 한 생명을 붙잡으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하나님이 붙잡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 공급하심을 믿으십시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를 깨닫게 하시고, 여러분의 삶을 의미 있는 삶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