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멈추지 않는 거룩한 열심 (느헤미야 13:1~14)

새벽지기1 2020. 12. 2. 05:45

“선과 악의 기준을 분별하고, 옳지 않은 일에 분노하고,
그 분노 뒤에는 반드시 깊은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이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거룩한 영적 성벽도 재건했습니다. 말씀 앞에서 회개하고 영적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거룩한 성예루살렘이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도 다시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재임하는 12년 동안 일어났습니다. 전 국가적인 회복과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영적 체험과 부흥 이후
무너진 거룩한 영적 성벽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 32년에 왕에게 보고하기 위해 페르시아로 잠시 돌아가 있는 기간이 있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도움에 감사하고,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보고하고, 아직 아닥사스다 왕의 신하이기 때문에 왕에게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잠시 페르시아로 돌아간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페르시아로 돌아가서 체류한 시간이 정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적어도 1년 이상 되었지만 오랜 시간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충격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성벽이 불타 무너진 것보다 충격적이고 심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자리를 비운 동안 영적 성벽들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건물을 세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거룩한 영적 성벽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습관, 거룩한 습관을 형성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그 습관이 무너지는 것은 매우 짧은 기간에 이루어집니다.


교회 역사적으로 대부흥 직후 침체기가 찾아오는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갱신과 부흥 직후 찾아오는 침체가 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께서 부흥과 갱신을 허락하시는 곳에 숨어있습니다. 새롭고, 변화되는 모든 것을 망가뜨리려고 일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시내 산에서 모세가 하나님과 40일 동안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을 때입니다. 40일이라는 기간을 참지 못해서 산 아래 있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구한 신”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40일 동안 사람들이 이렇게 변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대각성운동이 있었던 해가 1735년입니다. 대각성운동의 불씨가 되고 중심역할을 한 곳이 보스턴의 노스햄턴교회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라는 분이 목회했던 교회입니다. 어느 날 그분이 조용한 목소리로 ‘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 을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그 설교가 성령의 충만하고 강력한 역사로 회중에게 놀라운 회개가 일
어나고, 그 불길이 미국 전역에서 타오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교회에서 5년 뒤인 1740년 담임목사 조나단 에드워드를 해고했습니다. 해고 이유가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성도가운데 합당하지 않은 모습을 한 직분자를 권직했다는 것이 해고 이유였습니다. 학자들은 그 권직이 합당했다고 평가합니다. 그런데 담임목사를 회중들이 힘을 합해서 쫓아내는 일
이 일어났습니다. 5년 전에 그 놀라운 대각성 운동의 불씨가 되었던 바로 그 회중들이 그런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시내 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하나님과 모세를 배역한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영적 부흥과 갱신이 일어난 직후 우리에게도 이런 시험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경계해야 합니다. 사탄이 영적 성벽을 무너뜨릴 때 사용하는 방법은 겉으로 볼 때는 나빠 보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는 율법을 더욱 철저하게 지키자고 합니다. 그것이 신앙처럼 보입니다. 속는 것입니다. 광신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차가운 이성으
로 따져보자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더욱 합리적이고, 더욱 철저해 보이고, 더욱 열심히 보이는 것들이 율법주의, 광신주의, 회의주의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 서로 좋게 지내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냐’ 는 타협과 평화주의입니다. 사실 이런 것들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세상속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바다 가운데 떠 있는 배와 같아서 끊임없이 바닷물이 들어오고 스며드는 것을 막고 퍼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부흥의 은혜가 부어졌을 때 사탄은 재빨리 뒤에서 그 부흥을 무너뜨리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바로 그런 일들이 느헤미야 13장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회개와 부흥과 백성들이 하나 되어 하나님의 절기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는 일을 경험한 백성들이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모습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책망할 수밖에 없는 문제점이 나타났습니다. 느헤미야 13장에서는 세 가지 문제를 지적합니다.

 

책망할 수밖에 없는 세 가지 문제점


첫째, 부패한 제사장들이 성전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었던 도비야에게 하나님의 집 창고를 내어 줬습니다. 하나님의 집 창고는 필요한 기구들과 곡식, 제물, 레위인들에게 나눠줄 물건들을 보관하는 장소입니다. 도비야는 성벽 재건을 방해하는 세력입니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창고를 쓰라고 내어준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합당한 삯을 받지 못한 레위인들이 모두 흩어져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안식일에 여러 상인들이 장사를 하도록 허용했습니다. 당시 무역을 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까지 와서 온갖 종류의 물건들을 안식일에 팔았습니다. 유다 귀족들이 안식일을 모독하고, 허용하고, 함께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셋째, 우상을 섬기게 하는 이방인과의 통혼을 하지 않겠다는 언약을 깨뜨리고 아스돗, 암몬, 모압 여인들과 결혼했습니다. 솔로몬과 같은 죄를 지었습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자손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느헤미야의 반응은 분노였습니다. 

 

분노한 느헤미야의 모습을 주목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가장 먼저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에게 내 준 하나님의 창고에 들어가서 모든 기구들을 밖으로 내던져 버리고, 지도자들을 꾸짖고 경고하고 교훈합니다.
“그래서 나는 관리들을 꾸짖으며 ‘ 하나님의 집이 버려지다니 어떻게 된 일이오?’ 라고 묻고는 그들을 소집해 각각의 자리에 복직시켰습니다’”(11절).
또한 안식일을 범하는 귀족들은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유다 귀족들을 꾸짖으며 말했습니다. ‘ 당신들이 안식일을 모독하다니 이게 가당하기나 한 짓이오? 당신들의 조상들도 똑같은 짓을 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이 성에 이 모든 재앙을 내리신 게 아니오? 그런데 당신들이 지금 안식일을 더럽히며 이스라엘에 더 큰 진노를 부르고 있소’”(17~18절).
이방인과 통혼한 사람들에게는 더 크게 진노하고 심지어 때리기까지 했습니다.
“나는 그들을 꾸짖고 저주를 내렸고 그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은 때리기도 하고 머리채도 잡아당겼습니다.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게 하며 말했습니다. ‘ 너희는 너희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시집보내지 말고 그들의 딸도 너희 아들이나 너희에게 시집오게 하지도 말라’”(25절).
“그러니 이제 너희가 이방 여자들과 결혼해 이 모든 끔찍한 악을 저지르고 우리 하나님께 죄 짓고 있다는 말을 우리가 들어야겠느냐?”(27절).


열매 맺는 거룩한 분노


느헤미야의 분노를 보면서 떠오르는 장면이 신약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의 상을 뒤집어엎으시며 그들을 책망하시고, 저주하시는 모습입니다. 성전에서 팔던 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성전에서는 하나님께 드려질 제물을 팔았습니다. 흠이 없는 것을 드리기 위해 합당한 제물을 가지고 오면 제사장들이 확인하고 판단하는데 무조건 흠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이 판매하는 제물을 사면 흠이 있어도 없다고 도장을 찍어줬습니다. 그러니 누가 합당한 물건을 가지고 오겠습니까? 엄청난 비리와 부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상을 뒤집어엎으신 것입니다. 성전 제물로 인하여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을 뒤집어엎으신 것입니다. 또 모든 상인들이 내야 할 성전세를 환전하는 일을 만들어서 부정한 이득을 취했습니다. 하나님의 전에서 비리와 부정을 일삼는 일이 일어난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상을 뒤집어엎으시며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있었던 거룩한 분노처럼 느헤미야의 분노는 거룩한 분노였습니다. 뿌리 깊은 죄악은 거룩한 분노에서 나오는 징계와 책망이 없으면 좀처럼 교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적당히 상황을 넘기고 상황에 만족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개혁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분노가 거룩한 분노에서 이탈해서 자신의 죄성과 연합하면 분노만 하고 열매 맺
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의로운 분노는 언제나 불의를 고치고, 죄악을 끊습니다. 자기 분풀이가 아니라 열매 맺는 분노입니다. 

 

느헤미야의 분노는 열매 맺는 거룩한 분노입니다. 느헤미야 13장에는 느헤미야의 거룩한 분노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거룩한 기도가 함께 나옵니다. 그가 분노한 이후 기도를 한 구절씩 적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분노하며 개혁을 이루는 한편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그의 분노가 열매 맺는 거룩한 분노가 될 수 있었던 까닭
은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불의에 대해 분노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기도 없는 분노는 자기 의에 빠지기 쉽고, 스스로 재판장이 되어 판단자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의 거룩한 분노가 열매 맺는 것은 이 기도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이렇게 한 것을 기억하소서. 제가 하나님의 집을 위해 또 그 직무를 위해 일을 성실하게 수행한 것을 잊지 마소서”(14절).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이들을 책망하고, 개혁하고 난 뒤에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레위 사람들에게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성문을 지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이렇게 한 것을 기억하시고 주의 큰 사랑을 따라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22절).
이방인과 통혼한 사람들을 책망하고 난 뒤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그들을 기억하소서. 그들은 제사장의 직분과 제사장의 언약과 레위 사람들의 언약을 저버린 사람들입니
다”(29절).


분노 뒤에 있는 깊은 기도


느헤미야는 계속 개혁을 이루고, 다른 사람들을 책망하면서 동시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느헤미야는 다른 사람을 책망하며 개혁을 일으키지만, 자신 또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올려놓았습니다. ‘ 하나
님 나를 기억하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은 본인이 분노하는 기준으로 자신 또한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을 것을 안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분노의 기준이 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기준에 합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분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준으로 자신 또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아야 합당한 분노입니다. 의로운 분노입니다. 자신은 그 기준에 해당하지 않고 다른 사람만 그 기준에 해당한다면 의로운 분노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소서. 제가 이렇게 한 것을 기억하소서”라는 기도는 자신도 이 기준에 따라심판 받을 것을 안다는 겸손인 것입니다.

 

둘째, 느헤미야가 악과 외로운 싸움을 하면서 얼마나 큰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그 고통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갱신과 개혁을 이룬다는 것은 때로 사람들에게 반대를 받는 길
을 가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엄청난 압박 속에서 하나님
께 신실하고 거룩한 열심으로 사는 사람들은 때로 사람들에게 호의적으로 대접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목회자이자 교육자이자 정치가였던 아브라함 카이퍼가 이루었던 개혁 때문에 당시 국가 교회지도자들에
게는 ‘ 카이퍼에 대한 공포증’ 까지 생겼다고 합니다. 당시 국립 교회, 국가 교회지도자들은 매우 옳지 않은 방향, 형식
적이고 건조하고 무의미한 세속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본주의적이고
무신론적이고 유물론적인 신학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카이퍼가 그것을 갱신하려고 노력했을 때 모든 것을 압박했습니다. 마치 마틴 루터가 올바른 진리를 드러냈을 때 로마 교황청에 의해서 엄청난 압박을 받았던 것처럼 개혁하
는 사람들을 잔인하고 불법적이고 심지어 폭행까지 했습니다. 폭력배들을 동원해서 집에 돌을 던지는 일들이 있었습
니다. 카이퍼와 개혁을 하는 사람들을 ‘ 돌레안치(애통)’ 라고 했습니다. 애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슬퍼하고 통탄
하며 올바른 진리를 따르지 않는 교회의 모습을 슬퍼하면서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수백 개 교회에 감동과 양심의 가책
을 불러일으켜서 결국 국가 교회에서 독립한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 개혁 교회가 미국으로 건
너가 미국의 교회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카이퍼가 수상이 되었을 때는 부당한 파업과 싸워야 했습니다. 고등교육법을 제정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인본주의적이고, 유물론적이고, 무신론적인 학문으로 물들어버린 시대에 자유대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그런데 자유대학교는 학위를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학위를 인정해 주는 것이 고등교육법의 중요한 내용이었습니다. 엄청난 반대에 휩싸였습니다. 결국 싸워서 승리했습니다. 느헤미야처럼 싸웠습니다. 카이퍼가 그 싸움 과정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사람들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 정부에 관련된 문제들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정신에 대항
하는 것이다.”

 

사람들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정신에 대적하여 싸우는 것입니다. 이 시대 사회 전반에 보이지
않게 스며들어 있는 죄와 악과 싸우는 느헤미야와 카이퍼의 믿음과 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멈추지 않는
거룩한 열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만 두려워했습니다.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 있게 행동했습니다.
느헤미야서의 마지막 구절은 이 기도로 끝납니다.
“하나님이여, 저를 기억하시고 은총을 내리소서”(31b).
느헤미야가 자신의 의와 공로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알려드
리는 자녀의 심정으로 기도한 것입니다. 이 또한 요한복음 17장 예수님의 기도가 연상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하신 일을 이루어 내가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으니 아버지여 아들을 영화롭
게 하옵소서.”


이 시대의 위기는 거룩한 열심을 품은 성도들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옳고 그름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입니
다. 옳고 그름이 여론에 의해 결정됩니다. 여론조사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옳고 그름은 하나님의 말씀
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 시대에 느헤미야처럼 선과 악의 기준을 분명히 분별하고, 이 땅 위에서 옳지 않은 일이 일어나
는 것에 분노해야 합니다. 그 분노 뒤에는 반드시 느헤미야의 깊은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분노가 거룩
한 분노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을 저버리는 백성들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느헤미야
와 같이 멈추지 않는 거룩한 열심으로 헌신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