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말씀대로 살면 매일이 축제입니다(느헤미야 10:28~33, 12:43~47)

새벽지기1 2020. 11. 24. 04:59

“우리의 삶에 어떠한 고통이 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다면 인생의 절정입니다.
하나님이 기쁨의 기름 부으심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매일의 삶이 축제가 됩니다. 예루살렘에 오랜만에 즐거운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크게 즐거워했습니다. 어린아이들까지 즐거워했습니다. 즐거운 소리가 멀리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라했으니 예루살렘 성안에 기쁨의 소리가 충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즐거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하나님과의 바른 관
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경험만이 기쁨의 즐거움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회복되면 그 가정에 기쁨의 소리가 울려퍼집니다. 공동체 안에, 교회 안에, 그 나라와 민족 안에 기쁨이 샘솟습니다. 기쁨은 의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 기쁨이 없는 것은 의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
님과의 올바른 관계,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 자연과의 올바른 관계가 의로운 것이고, 거기서부터 기쁨이 흘러나 오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적인 쾌락이 주는 순간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즐거움입니다. 여기에는 여정이 있습니다. 느헤미야 10장부터 12장까지는 어떻게 이러한 즐거움을 경험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설명해 줍니다.


참된 기쁨으로 가는 여정


성벽 완공은 52일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기간이 더 중요합니다. 성벽 재건 이후 일어난 백성들의 변화, 회복, 회개와 부흥의 역사, 영적 성벽 재건의 역사가 더 중요합니다. 그 절정이 오늘 본문입니다. 참된 기쁨으로 가는 여정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듣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말씀 앞에서 회개했습니다. 공동체적으로 함께 회개했습니다. 과거의 역사를 회고하며 회개했습니다. 자신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조상들의 죄까지 회개했습니다. 기억나는 모든 것들을 돌아보며 회개했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가장 긴 기도가 느헤미야서에 나옵니다. 회개의 기도입니다. 우리 기도 중에서 가장 긴 기도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필요를 아뢰는 간구도 기도입니다. 그 기도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필요를 구하는 기도가 죄를 회개하는 기도보다 훨씬 길다면 합당하지 않은 기도일 것입니다. 우리의 필요는 짧게, 우리의 회개는 길게 드리는 기도가 참된 기쁨으로 가는 여정의 출발입니다.

 

참된 기쁨으로 가는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삶을 바꾸는 순종을 서약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들부터 시작해서 모든 백성들이 서명했습니다. 그 언약을 지키지 않을 때 합당한 벌을 각오할 정도로 엄격하게 서약했습니다. 가정과 일터와 신앙공동체에서 삶을 바꾸겠다고 서약했습니다. 가정에서는 이방인과 통혼을 금지하는 법을 지키기로 서약했
습니다. 이방 신을 들여오는 결혼을 금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가정에 우상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것으로 인하여 가정이 흔들리고, 가정이 흔들리면 나라가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한 것입니다. 일터에서의 서약은 안식을 지키기로 한 것입니다. 안식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속한 것입니다. 창세기 3장 인간의 타락 이전에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만드신 질서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6일 동안 일하고 하루를 쉬도록 하셨습니다. 6일 동안의 노동과 하루의 안식을 통해 멈추게 하신 것입니다. 안식이 건강에도 얼마다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까? 쉼 없이 매일 일하는 사람은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건강문제뿐만 아니라 일의 효율도 떨어집니다. 적절한 휴식과 안식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7년마다 땅을 쉬게 하고, 50년마다 모든 빚을 탕감할 뿐만 아니라 원래 토지로 회복되고, 종들도 해방케하는 것은 사회경제 질서를 회복하는 하나님의 질서였습니다. 우리 일터에도 이런 회복이필요합니다.

 

신앙의 영역에서의 서약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제사들이 제대로 회복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제정된 대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성전에서 역할을 감당하고, 올바른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성전에 나올 때는 율법을 듣고, 제정된 제사를 드리며, 성전세, 구제, 나눔의 십일조를 내게 했습니다. 우선적으로 급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신앙공동체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중세 이후 유럽에서는 그것을 국가가 책임지겠다며 국가를 교회화 했습니다. 그러다 교회가 생명력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들이 제대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자체 공동체를 유지하기 힘든 교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매우 심각
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도울 수 있는 성도들과 교회들이 감당해야 합니다. CGNTV가 비대면 예배가 한창일 때 3백여 교회에 장비를 설치해 줬습니다. 그러나 해 주지 못한 교회가 더 많습니다. 우리 주변에 보이는 작은 교회, 연약한 교회, 도움이 필요한 교회들이 있다면 도와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원리는‘언약’


가정과 일터와 교회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원리는 언약입니다. 가정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 질서가 최초로 세워진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가정을 이루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결혼생활의 부정은 두 사람 사이의 문제 이전에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린 것이기 때문에 엄청난 충격과 아픔이 옵니다. 가정의 행복은 언약을 지키는 데 있습니다. 결혼의 언약을 지키고,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고,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분류할 수 없는 성, 제3의 성이 존재합니까? 과학적으로 남자와 여자 염색체 외에 또 다른 염색체가 나타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어떤 논리, 수많은 이념과 사상, 차별받는다는 프레임을 가져와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너뜨리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일터에서 안식이라는 질서를 잃어버렸을 때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언약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예배드리고, 각자 은사를 통해 섬기고,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 되기로 서약한 것입니다. 이 언약에 충실한 백성이 될 때 하나님은 그 개인과 가정과 일터와 교회를 견고하게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참된 기쁨으로 가는 여정 세 번째 단계는 거룩한 성에서 예루살렘 백성들이 거주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들은 당연히 예루살렘에 거주하도록 했습니다. 자진 헌신, 당연 헌신, 우선적 헌신이었습니다. 백성들 가운데서는 십분의 일을 제비 뽑아서 거주하게 했습니다. 자원해서는 그곳에 거주할 인원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비를 뽑은 것 같
습니다. 자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인원이 형성됐습니다. 의무가 기쁨이 됩니다. “그 성은 크고 넓은데 성안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 없고 제대로 지은 집들도 아직 얼마없었습니다”(느 7:4). 예루살렘은 세상적인 이점이 전혀 없는 도시였습니다. 성전이 있기에 율법에 더 철저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상업 도시가 아니었기에 돈을 더 많이 벌 수도 없었습니다. 농사짓기에도 적합한 땅이 아닙니다. 그래서 당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것은 큰 헌신이 요구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살고 싶지않은, 살아서는 안 되는,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지도자들이 먼저 살기로 헌신했고, 제비 뽑아 택함을 받은 이들이 기꺼이 헌신함으로 이스라엘 역사가 재건되었습니다. 느헤미야서 11장과 12장에는 그때 헌신한 이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미 있는 헌신이기 때문에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 삶에도 이러한 헌신이 있을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할 이들이 확정된 이후 비로소 성벽을 봉헌하는 예식을 합니다. 52일만에 성벽이 재건되었다면 바로 봉헌식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씀 앞에 모여 듣고, 회개하고, 가정과 일터와 신앙공동체의 질서를 회복하고 예루살렘에 거주할 이들을 정하고 나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하나님 앞에 봉헌하는 예식을 했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외
곽에 있는 레위인들을 다 모읍니다.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레위인들을 불러 모아서 백성들을 두 그룹으로 나눕니다. 한 그룹은 학사 에스라가 인도해서 좌측으로 행진하고, 한 그룹은 느헤미야가 인도해서 오른쪽으로 행진해서 만나도록 했습니다. 성벽 위에서 나누어 행진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도비야는 반대 세력의 주동 세력입니다. 토브(좋
다)와 야(여호와)는 여호와는 선하시다는 좋은 이름을 가졌지만, 교활한 이방 민족이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느헤미야를 괴롭힌 사람입니다. 도비야가 “이 성은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것”이라고 조롱했습니다. 느헤미야가 그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모두 올라가도 무너지지 않는 성벽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나서 12장 43절 이후 이 기쁨이 임했습니다. 이 기쁨은 자신들의 성취로 인하여 얻은 기쁨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인한 기쁨이요, 거룩한 기쁨이요, 희생하며, 헌신하며 얻은 기쁨입니다. 대가가 주어진 기쁨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여정에서 경험하는기쁨입니다. “또한 그들은 그날 희생제사를 크게 드리고 즐거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 큰 기
쁨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내들과 어린아이들도 즐거워했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에서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습니다. 그리고 그날 예물과 첫 수확물과 십일조를 모아 두는 창고를 맡을 사람들을 임명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위해 율법에 정해진 몫을여러 성들의 들에서 거둬들이도록 했습니다. 항상 준비하고 서 있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유다가 기뻐했기 때문입니다”(43~44절).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회복된 공동체에 임한 하나님의 충만한 기쁨입니다. 드림으로 기뻐하고, 헌신하며 기뻐하고,
순종함으로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로 작정하고, 헌신하고, 서약까지 하고 나서 이 기쁨이 온 것입니다. 아
직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과정, 서약하는 단계까지만이라도 하나님이 주신
기쁨이 충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이 항상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백성들이 기뻐하고 즐
거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를 행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 될 때 이러한 모
습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말씀에 대한 순종은 고된 일이 아니라 기쁜 일입니다. 삶의 기쁨과 참된 환희를 가져옵니다. 우리의 의무(duty)가 기쁨(delight)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내가 해야 할 의무이지만 이 의무가 기쁨이 됩니다. 환희가 됩니다. 거기에는 대가가 요구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순종하는 기쁨입니다. 말씀에 헌신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즐거움의 기름, 기쁨의 기름을 부어주십니다.

 

기쁨의 기름 부으심


“아들에 대해서는 ‘ 하나님, 주의 보좌는 영원무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의로운 규입니다. 주께서는 의를 사랑하시
고 불법을 미워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께서 기쁨의 기름을 주께 부어 주의 동류들보다 높이 뛰
어나게 하셨습니다’ 라고 하셨고”(히 1:8~9). ‘ 기쁨의 기름’ 을 개역개정에서는 ‘ 즐거움의 기름’ 을 부으셨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예수님께 기쁨의 기름 부음을 주셨습니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위해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게 되셨습니다”(히 12:2). 예수님은 십자가 후에 찾아오게 될 영광스러운 기쁨을 바라보셨기에 고통을 참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정반대로 말하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은 십자가의 고통이 찾아올지라도 그 너머에는 반드시 기쁨의 기름 부으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셨기에 바라보시며 십자가 고통을 참으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인생의 고통 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 만한 것이 있을까요? 어떤 고통도 십자가의 고통 만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 가운데 기쁨의 기름 부으심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든 고난을 이겨낼 힘과 능력이 우리에게 부어집니다. 미래의 기쁨을 미리 갖다 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능력
입니다. 믿음의 능력은 우리에게 주어질 부활의 영광과 능력을 미리 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질 영원한 새 하늘
과 새 땅의 충만한 삶을 미리 가져다 쓰는 것입니다. 그것이믿음의 능력입니다. 이 시대 세상이 약속하는 기쁨은 인스턴트 즐거움입니다.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 먼저 즐겁게 해 주겠다는 것은 반드시 그 뒤에 고통스러운 대가가 따라옵니다. 쉽게 얻어지는 즐거움은 반드시 그 뒤에 고통의 대가가 따라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언제나 고통스러운 것 같은 단계를 거칩니다. 그러나 후에는 영광스러운 기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순간 즐겁고 후에 고통의 열매를 딸 것입니까? 아니면 고통스러운 단계를 통과하며 도리어 기쁨의 여생을 살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에는 환란을 이길 힘이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분으로 인해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기뻐합
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합니다”(롬 5:2~3).
이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은 환란을 이기는 기쁨의 기름 부으심이 하나님께로부터 임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기쁨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기쁨의 기름을 부어주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유일
하신 분이요, 홀로 존재하시는 분이요, 자신의 존재와 그분의 행위로 인하여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기쁨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고, 구원한 인간을 통하여
기뻐하시고, 우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하나님이 우리
와 함께 기쁨을 경험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에 어떠한 고통이 있을지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갈 수 있다면 그것이 인생의 절정입
니다. 하나님이 기쁨의 기름 부으심을 우리에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한 기쁨의 은혜가 우리에
게도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으로 나갈수 있기를 바랍니다. 환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기뻐하십시
오. 재난의 한복판에서도 충만한 기쁨을 날마다 누리며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