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마이클호튼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 / 마이클 호튼

새벽지기1 2018. 2. 5. 07:12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의 병증의 신학적인 명칭은 펠라기우스주의이다.

4세기에 살았던 영국 수도사 펠라기우스는 기독교 국가의 중심지인 로마에 도착해서 그 타락상을 보았을 때 경악했다. 아프리카 주교 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의 전적무능력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강조가 문제의 뿌리라고 추측해서 펠라기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원죄가 문제의 뿌리라고 추측하면서 펠라기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원죄를 부인했다. 죄는 보편적인 인간의 조건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선택이다. 우리는 자유의지로 아담의 악한 사례를 따를 수도, 예수의 좋은 모범을 따를 수도 있다. 비록 펠라기우스주의는 교회(심지어 반 펠라기우스주의 형태를 취하고 있던)에 의해 공식적으로 정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존하는 위협이었다. 결국 펠라기우스주의는 우리의 가장 자연스러운 신학이다.

 

착하고 악하고는 우리 자신의 능력에 달렸다-영원한 생명이냐 죽음이냐 역시-고 말하면서도 반 펠라기우스주의는 하나님 은혜의 어떤 도움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16세기 후반에 출현하여 칼빈주의를 배격한 네럴란드 신학자의 이름에서 유래한 아르미니우스(Arminiamism)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던 확신에서 한 걸음 이탈해서, 은혜의 필요를 인정했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여전히 구원이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적인 노력이라고 주장 한다.

 

2차대각성 이후, 특히 찰스피니의 메시지와 방법론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미국 개신교는 아르미니우스주의보다는 펠라기우스주의적이었다. 피니는 원죄를 부인하면서, 죄를 짓기로 선택하는 순간에만 죄인으로 떨어지고 타락한다고 주장한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하신 일은 우리의 빚을 청산할 수 없고, 단지 회개를 권유하는 도덕적 모범과 영향력으로 작용할 뿐이다. “만약 그가 우리를 대신 해서 율법에 순종했다면, 왜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로서 우리 자신이 개인적인 순종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속죄는 “미덕을 권장하기 위한 자극제”일 뿐이다. “속죄가 빚의 실제적인 청산”이라는 견해를 거부하기 때문에, 피니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속죄 그 자체가 누구의 구원도 보장하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함으로써 발생하는 칭의는 피니의 말에 의하면 “어리석을” 뿐 아니라, 개인의 거룩의 촉진을 저해한다. 신생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죄에서 순종으로 돌이키는 합리적인 선택의 결과이다. 기독교인은 선택하기만 하면 하나님께 완벽하게 순종할 수 있고, 나아가서 이런 선택만이 의롭다 하심올 받는 길이다. 사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온전하게 나타나는 순종은 청의의 조건이다”. “어느 정도든 죄가 있는 한” 사람은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 피니는 종교개혁의 명제에 관련해서 이렇게 선언한다. “자발적으로 의롭다 하심도 받고 자발적으로 죄인도 된다”. 세상을 망쳐 놓은 모든 종류의 만인구원설보다 이 오류가 더 많은 영혼들을 살해했다고 보는 것이 내 견해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은 죄를 지을 때마다 정죄를 받고 회개한 후 처음에 했던 일들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멸망”하기 때문이다.

 

피니의 메시지는 분명히 도덕주의적이다. 이 복음 전도자는 자기 변혁을 만들어내는 부단한 위기 경험 등 여러 방법으로 회개를 끌어낼 수 있었다. 이것은 명백하게 심리요법적인 방향설정이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관찰한 대로 이것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의 종교 체계다. 구원과 도덕적인 개선은 복음 전도자와 회심자의 손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이신론적인 함의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형식적으로는 복음을 주장하지만, 복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정당한 진노가 충족되었고 보상을 바라지 않은 특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부여되었다는 선언보다는, 개인적이고 공적인 삶(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으로 격하된다. 피니의 가장 유명한 설교들 중 하나인 “죄인들은 마음을 바꿔야 한다” 의 제목에서 감지되듯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인격적이고, 기적적인 개입은 불필요해 보인다.

 

연합감리교회감독인 윌리엄 윌몬은 “자력 구원은 우리가 행하는 설교 중 상당수의 목표다”라고 간파했다. 윌몬은 주류교단, 복음주의를 막론하고 이 시대 설교의 다수가, 회심을 우리 자신의 말과 성례를 통해서 일어나는 어떤 일인 양 전제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이 면에서 우리는 찰스 피니의 후예다”. 우리는 회심이 기적이 아니라 “옳은 것으로 공인된 방법을 썼을 때 나오는 순전히 철학적(다시 말해서 과학적)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윌몬은 말한다. “안타깝다.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전도’ 설교는 더 깊은 자기주관에 빠지도록 끌어들이려는 노력이다. 사람들을 꺼내려는 시도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느끼든 못 느끼든, 우리의 실제 필요는 진리를 조직적으로 왜곡, 무시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외부에서 오는 말씀이 필요한 까닭은 이것이다 ---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복음을 발견하지 않는다. 복음이 우리를 발견한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 “이 이야기는 유앙캘리온, 좋은 소식이다. 은혜에 대한 소식이기에 그렇다. 복음은 물 흐르듯 오지 않는다. 복음은 예수에게서 온다.”

 

미국 기독교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 펠라기우스주의적 경향은 종교개혁에 역사적 뿌리를 둔 교회들에서조차 드러나고 있다. 크리스천 스미스와 제임스 헌터와 같은 종교사회학자들은, 루터파 교회와 개혁교회의 평신도들이 이와 똑같은 전제를 공유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기억시킨다. 로버트 슐러도 그렇지만, 노만 빈센트필이 미국 개혁교회에서 안수 받은 목사였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서 좀더 보수적인 장로교와 개혁교회들에서도 스미스가 지적한 도덕론적이고 심리요법적인 이신론에 딱맞아떨어지는 설교들을 들을 수 있었다. 시카고 대학에서 가르치는 주류교단의 신학자인 브라이언 게리쉬)는 위기의 본질을 이렇게 진술한다. “은혜에 대한 개혁주의자들의 증언이 16세기보다 현재 더 절박하게 필요하다. 지금은 개혁교회들에서도 펠라기우스주의가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 마이클 호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pp 65-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