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마이클호튼

도덕적이고, 심리요법적인 이신론 / 마이클 호튼

새벽지기1 2018. 2. 2. 07:56


2001년에서 2005년 사이에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현재의 노트르담)의 사회학자인 크리스천 스미스는 오늘날 미국의 십대들의 영성에 대한 놀라운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연구팀을 이끌었다. 스미스는 광범위한 인터뷰를 통해 미국 젊은이들의 종교 혹은 영성의 두드러진 형태는 “도덕적이고, 심리요법적인 이신론” 이라는 결론올 내렸다.

 

어찌 보면 형태가 없는 이 영성을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그리고 다분히 역설적이게도 “22%의 십대 ‘유신론자들’이 하나님에게 매우 혹은 극단적일 정도로 친근감을 느낀다”고 대답했다는 점에서 그렇다.(그러나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현실 세계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분명히 개인의 은밀한 내면세계에만 관여한다.

 

스미스는 복음주의 교회에서 자라 신앙이 “매우 중요하다”며, 자신의 삶에서 큰 차이를 만들어 낸다고 말하는 대부분의 십대들이 신앙의 실제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기겁하리만치 무지”함을 발견했다. “ 십대들을 인터뷰 하면서, 우리는 미국에서 종교적인 사회화의 동인들, 즉 부모, 목회자 그리고 교사들이 상당수 젊은이들에게 대단히 효과있고 성공적이라는 증거를 그다지 발견하지 못했다,” 최소한 성경과 기본적인 기독교 교리에 대하여 남아 있는 지식이나마 가지고 있던 전 세대들에 비해서, 자신의 신조를 진술, 반성 혹은 검증할 진지한 능력이 거의 없고 그것을 실생활과 연결시키기에는 한참 부족해 보였다는 것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또래 젊은이 집단에서 친구들에 둘러싸여 붕 떠서 사는 듯 보였다. 그들의 흥분한 모습과 집단주의 때문에 특히 대학에서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스미스는 “도덕적이고, 심리요법적인 이신론”이 아래와 같은 잠재적인 신학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규정한다.

1.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2. 하나님은 사람들이 착하고, 멋지고, 서로 공평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성경을 비롯한 거의 모든 세계 종교의 가르침이다.

3. 인생의 중심 되는 목표는 행복이고, 자신에 대해 뿌듯하게 느끼는 것이다.

4. 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할 때 외에는 사람의 삶에 굳이 간섭하지 않는다.

5. 착한 사람은 죽어서 천국에 간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제적인 신학에서 “종교적이라는 것은 멋지게 되는 것이지, 용서에 대한 것은 아니다 --- 보수적인 개신교 십대들의 상당 비율이 은혜와 칭의 같은 복음의 기초 개념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이는 것은 차마 믿기 힘들다 --- 이것은 교파와 교단을 망라한 현상이다.” 심지어 교회에 적극적인 루터교 젊은이들조차 은혜 혹은 칭의라는 용어를 정의하지 못했고, 교회에서 믿는다고 내세우는 바와 한 주 한 주 그들이 실생활에서 실제로 전해지는 바 사이에는 엄청난 격차가 드러났다고 그는 말한다.

 

교회가 이런 교리를 믿는다며 온갖 말을 해도, 그 사역을 맡은 자들이 제시하는 상충하는 해답을 보면, 자력 구원이라는 도덕 종교는 타락한 피조 세계의 기본값이라는 내 주장에 힘이 실린다. 교리에서 벗어난 가르침을 여봐란듯이 대놓고 받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늘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메시지를 자기 계발의 메시지로 바꿔 놓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영지주의적인 영성(개별적이고,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고, 은밀한)과 “도덕적이고, 심리요법적인 이신론”이 합류하는 모습을 본다. 기독교적인 세계관에 의하면 죄의 고백은 옳고 그름에 대한 것이다. 실제적인 죄는 우리의 일상에 살갑게 관여하시는 그런 하나님에 의해서 용서받는다. 심리요법의 세계관에 의하면, 하나님이 용서해야 할 죄와 죄책은 없고, 오직 자신 혹은 다른 인간 존재에 대한 기대만큼 살 수 없도록 막는 부담감과 죄책감이 있을 뿐이다.

 

달리 말해서, 기독교에서는 객관적인 죄책과 청의를 말하는 반면, 도덕주의적인 심리요법에서는 주관적인 죄책감과 단지 다른 누군가에게 이를 털어놓기만 하면 되는 카타르시스적인 해소만이 있을 뿐이다. 고백이 하나님에 대한 거슬림으로 인해 마음이 산산조각 나고 그분의 용서를 받는 문제가 아니라, 평균보다 더 나쁘지 않은 자신을 정당화하는 문제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지만, 자신과의 관계를 제외하고는 도무지 관계가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고백은 영혼에 좋다” 이 말은 일종의 심리요법이다. 예수님과 나의 인격적인 관계를 이리도 강조하는 것을 보면, 이것은 예수가 나의 분신(alter ego)이 되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완전히 다른 고백을 하고 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4-5,11절).

 

이 고백은 밧세바와 간통을 저지르고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살해하고 난 후에 한 것이나, 죄를 그토록 추악하게 만드는 사실은 그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슬러 저질러졌다는 데 있다. 우리가 고백을 이웃(도덕론) 혹은 우리의 내적 자아(심리치료)라는 수평선적 행동으로 축소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과의 이 수직적인 관계 때문이다.

 

- 마이클 호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pp 6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