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마이클호튼

현대 교회 설교가 보여 주는 세속주의적인 경향 / 마이클 호튼

새벽지기1 2018. 2. 6. 07:57


우리 시대의 대중적인 기독교에서 감지되는 펠라기우스적인 경향, 즉 스미스가 “도덕론적이고 심리요법적인 이신론”이라 부른 경향성은 사회학자 마샤 위튼의 연구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위튼은 「다 용서되었네: 미국 개신교의 세속적인 메시지」라는 저서에서 1986년에서 1988년까지 미국 장로교회와 남침례교단, 두 교단의 여러 설교자들이 행한 47편의 탕자 비유(눅15:11-32) 설교 본문을 분석한 연구 결과를 내놓는다.

 

자신을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밝힌 위튼은 마태 수난곡과 새로 개척하는 교회의 전단이 대조가 된 이 일화를 면밀한 연구 끝에 도달한 결론과 수미상응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마태 수난곡이 진정한 믿음을 얻기 위한 고투뿐 아니라 하나님의 위엄, 거룩 그리고 자비로 가득 차 있다면, 새들백 교회 전단지는 제품을 소개하는 여느 광고지와 마찬가지로 “낙관적이고, 고통 따위는 없고, 시시콜콜할 정도로 일상적”이다. 오늘날 미국의 기독교는 “영적인 것과 심리학적인 것, 초월적인 것과 실용주의적인 것” 사이에서 좌충우돌하고 있다.

 

막스 베버의 유명한 “세속화 이론”에 의하면, 근대화의 상황에 놓인 종교는 여러 단계를 통과한다. 먼저, 종교는 사적 영역으로 후퇴한다. 은밀한 주관성이라는 무인도로 영역을 축소하는 것이다 “예수는 살아 계시다”와 같은 진술은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객관적이고 공적인 주장으로 더 이상 취급되지 않고, 사람의 개인적인 경험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예수는 살아 계시다”는 유명 복음성가의 가사가 말해 준다. “그분이 살아 계신 걸 어떻게 아냐고요? 그분은 내 마음에 살아 계신답니다”. 판에 박힌 “예수는 주님이시다"는 말은 내가 예수를 내 주님과 구주로 삼기로 결정했다는 뜻이다.

 

사도들은 그들 스스로가 증인이 된 역사적 사건들을 증언한 반면에,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들에서 “간증해 주시지요"라는 말은 더도 덜도 없이 자신의 내면적인 경험과 도덕적인 변화에 대해 말해 달라는 뜻이다. 종교는 한번 사적 영역으로 후퇴하고 나면 상대화 과정을 밟는다. 더 이상 진리가 아니라 너의 진리다. 종교적인 신조들은 더 이상 공적인 사건에 대한 주장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들은 각 개인이 의미 있고 유용하며 그리고 변혁을 일으킨다고 인정하는 조건 아래서 정당화될 수 있다.

 

전근대기의 기독교인들 대부분이 거의 이단이라 간주했을 현상이 미국인들의 경험에서는 정통성의 전형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유럽에서 전통적인 기독교(즉 교리적인) 신앙과 실천의 거부를 가져온 이 동일한 근대적 세속화의 과정이 미국에서는 꼬리를 물고 일어난 종교 부흥의 동력이 되었다. 그 결과, 종교적인 언설이 개인의 변혁과 웰빙을 위한 규칙, 절차, 기법 그리고 프로그램이라는 실용주의적 합리성으로 격하됐다.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적시했듯이, 진리는 “경험적 조건 안에서 그것이 갖는 현찰 가치”로 검증된다. 그러나 아주 오래 전에, 이미 상대주의의 역사는 기독교의 주장을 실용주의적인 효율성으로 동화시켜서, 회심자의 숫자 뿐 아니라 돈의 액수로도 측정 가능한 무엇으로 만들어 놓았다.

 

기독교가 영원한 말씀을 통해 전달된 공적 진리에 대한 것이라면 사역과 복음 전도는 자신들의 돌봄을 받는 자들의 유익을 위해 그 진리를 연구하여 적용할 수 있는 교육 받은 지도자들에 의해 전개되어야 한다. 반면 기독교가 개인적인 경험으로 축소된다면, 지도자들은 가장 성공적인 기업가와 비범한 무대 행사의 기획자들이 될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가 하버드에서 실용주의적 유용성의 기세등등한 가치를 선언했다면, 피니와 그의 계승자들은 이미 미국 개신교에게 실용주의라는 세례를 그 즉시로 베풀었다. 효율성은 비즈네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종교에서도 성공의 철칙이다. 그리고 복음주의자들은 그 이후로 주관적인 경험과 도덕적인 변화를 바탕으로 ‘사역’하는지 아닌지로 새로운 운동을 판단하게 됐다.

 

위튼의 연구는 이 해석을 지지한다. 첫째, 능력과 거룩함의 초월적인 하나님은 가벼운 친근함으로 전락한다. 둘째 종교가 심리요법적인 유용함이라는 개인적 영역으로 졸아들면, 죄와 구속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범주로 옮겨 간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적의 혹은 죄책의 상태가 아니라 나쁜 기분을 해소하는 답이 된다.

 

더 이상 그리스도의 성육신, 삶, 죽음 그리고 부활 안에서 역사로 들어오신 하나님의 독특한 개입을 주장하는 순교자-증인-는 없으며, 우리는 예수와 우리의 개인적인 관계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개선하였는지 간증하는 만족스러운 소비자들이 되었다. 실용주의와 심리요법이 득세한 상황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14:6)이요 그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는, 예수를 논하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다.

 

성장하는 교회와 성장하는 기업은 실용주의적 효율성이라는 똑 같은 표준 절차를 따르고 있다. 위튼은 말한다. “이 담화는 극단으로 흘러 하나님 혹은 신앙, 기도 등을 슬쩍 끼워 가끔 언급해 줌으로써 ‘종교적’으로 보이게 했지만, 개인 만족을 위한 ‘스스로 해보세요’ 지침이 된다.” 위튼은 이런 과정의 결말로서 “종교의 가르침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사는 추종자들의 삶에 의미를 주지 못한다. 오히려 세상에서의 삶이 그들이 지닌 신조의 의미와 중요성 모두를 결정한다.”

 

위튼의 연구는 주류 장로교와 남침례교 설교에 차이가 거의 없었음을 폭로한다. “식민 미국의 칼빈주의적인 종교 관행의 뿌리”는, 인간이 “자신의 구원에 기여할 바가 없다는 견해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는 견해를 내세움으로써, “자력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실용주의라는 인기 높은 이념들”에 의해 점점 갉아 먹혔다고 쓰고 있다.

 

설교 샘플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과도한 사랑을 보이는 연인으로 다루고 있다. 사실 사랑이 율법을 압도한다. 하나님은 어떤 공로, 의무 혹은 업적을 한쪽으로 치워 놓고, 탕자를 받아 주신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행동은 언제나 예측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질리게 하는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설교들에 의하면 중재자가 필요하다는 어떤 조짐도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거룩, 공의 그리고 공평과 연결해서는 안 된다. 만사형통이다. 화해의 유일한 길로서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에 대한 언급도 필요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법칙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공평과 거룩을 뒤로 물러가게 한다. 여기 제시된 “복음”은 복음서가 기록한 실제 이야기를 무용지물로 만든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공평, 거룩 그리스도 공의를 그렇게 쉽게 외면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참담한 낭비로 보인다. “초월적인, 위엄에 가득 찬, 경외감을 자아내는 루터와 칼빈의 하나님, 인간과 신의 관계에 관하여 초기 개신교도들의 상념을 형성한 이 두 사람이 지녔던 이미지는 미국인의 개신교 경험을 통해서, 그것도 단지 사소한 끼어듦 정도일 뿐, 부드러운 모습으로 깎여 나갔다.”

 

하나님을 우리 자신의 경험 그리고 행복과 동일시하는 인간 중심의 접근 방법을 따를 때, 세상은 더 이상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니다. 세상은 마치 하나님처럼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안녕을 위해서 존재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소비되기 위해 거기 있다. 예를 들어 약물 남용과 성적 문란은 하나님을 거스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이런 설교 대부분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하나님의 방법을 좇아 사는 기쁨과 행복과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 모든 강조점은 축제와 행복에 있다. 어떤 설교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죠” 하고 외친다. 심리치료에서 말하는 변혁 따위의 물건을 팔려고 할 때, 모호함은 있을 수 없다. 불안, 긴장, 그리고 망설임은 말도 안 된다.

 

이런 설교들에서 재차 강조되는 또 하나의 강조점은 인간이 희생자이고 잃어버린 영혼으로, 더 이상 저주받은 존재가 아니라 인생의 방향을 잃었을 뿐인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설교에서 지적되는 탕자의 실책은 요약하자면, 그가 자신의 존엄성과 자존감을 거절했다는 것이다. “반면 장로교 설교자들에게는 죄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의무감에 충실하고, 종교적으로 순종적이나, 기쁨이 없었던 큰 형이다.”

 

설교에서 죄에 대해 말할 때는, 죄를 비인격화, 일반화하고, 그것을 외부인들에게로 돌려 버린다고 위튼은 지적한다. 한 남침례교 목회자는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는 않고,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 흑인들, 라틴 아메리카인들, 술에 중독된 사람들, 그리고 이혼한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라고 외쳤다. 죄를 “외부자들”에게 돌리는 것이 은밀하고 교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류 장로교의 전략은 평가를 꺼리고 형과 동생 모두를 동정하는 것이었다. 신학적인 용어로 죄에 대해 말하는 어떤 설교도 “원죄라는 근본 교리의 누락을 보여 주는 예가 된다.”

 

마지막으로, 위튼은 이런 설교들에서 주요 강조점으로 보이는 “변혁된 자아”를 집어낸다. 미국의 초기 설교에서도 변혁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지만, 그것은 옛 자아의 죽음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자아의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이었다고 그는 지적한다. 그러나 이 언설들은 곧 “현재를 계속 이어 가는 개선”에 눌려 버리고 말았다. 초기에는 자기 사랑이 원죄의 뿌리로 여겨졌으나, 부흥사들은 자기 사랑을 회심의 동기로 호소했다. 인간의 능력을 좀 더 광범위하게 신뢰하는 분위기 그리고 “자유의지라는 아르미니우스 교리의 강조”로 말미암아, 죄는 “행동의 실수, 적절한 도덕 교육으로 바로잡을 수 있는 개념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다른 모든 행등들과 마찬가지로, 죄는 예측 가능한 원리들을 따라 조절될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과 부흥주의자들 모두는 하나님의 초월을 막후로 돌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밖으로부터 한 사람에게로 다가오는 그 무엇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솟아나는 그 무엇으로 보는 경향이 짙다. “따라서 구원의 열쇠는 자아 안에 있다. 개인을 추동하는 힘은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죄는 크게는 실수 혹은 무지로 간주되기에 행동의 변화가 윤리적이든 도덕적인 주제에 관련한 교육을 통하여 나올 수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로써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현실 세계의 요구들과 관련하여 사람들을 돕는 일종의 심리요법”으로 이해하는 심리학적인 이해에 문이 열리게 됐다. 회심은 기본적으로는 자기성취다. 회심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얻기 쉽다. 회심은 “정서적인 자기발견, 개방성, 그리고 수용성”만을 필요로 한다.

 

한 남침례교의 설교는 아래 인용문과 같은 말로 결말을 맺고 있다.

부를 얻으려고 애쓰다가 부를 얻을 때,

세상에서 왕이 된 듯 기쁜 일이 있을 때,

거울 앞으로 달려가서 당신을 들여다 보세요.

거울에 비친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보세요.

당신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내도 아닙니다.

당신이 통과해야 할 판단을 내리는 사람은,

당신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칠 판결을 내놓는 사람은

거울에서 당신을 응시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칠 판결을 내놓는” 측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말에 주목하라. 변혁에 대한 이 같은 강조에서 발견하는 더 심각한 요소는 “개방성, 신뢰와 자기폭로, 진솔함의 심리학”이다. 초점은 하나님 중심적이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인간 중심적이다. 아울러 인간관은 기본적으로 펠라기우스주의 또는 적어도 반(半) 펠라기우스주의적이다.

 

한 목회자는 탕자 비유를 통해 인지, 자각, 책임 그리고 회복이라는 공식을 만들어 놓았다. 회복은 기본적으로 의지와 행동을 통한 인간 성취이다. 아니, “다양한 인간의 노력”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효과적인 과정”을 논하는 한에서, 회심은 “떠들어 댄 것처럼 그렇게 쉽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전형적인 설교의 맺음말 가운데는 이런 것이 있었다.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이 베풀기 원하시는 구원에 당신 자신을 여십시오”.

 

그러므로 비단 탕자의 비유 설교 외에도 이러한 설교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비로 몸을 굽히시는 위엄의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기는커녕, 도덕론적이고 심리요법적인 이신론으로 요약될 수 있는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그 결과, 하나님 경험은 소비자가 왕이라는 믿음과 함께 팔릴 수도 살 수도 있다. 따라서 전 세대의 주류 개신교인들이 경악할 선언들이 조지 바나가 “메시지가 아니라 청중에게 주도권이 있다.”고 변호한 것처럼 오늘날에는 심지어 복음주의자들에게조차도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다.

- 마이클 호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pp 71-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