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마이클호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라는 질병의 증상/ 마이클 호튼

새벽지기1 2018. 2. 1. 07:25


조지 바나의 말이다.

“점점 더 많은 미국인들이 하나님은 인간을 기쁘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 거하지만 철저하게 우리의 편의와 유익을 위해서 존재한다. 우리가 너무 영악해서 드러내 놓고는 말하지 않지만, 진정 힘은 위를 바라봄으로써가 아니라 우리 안으로 돌아섬으로써 얻어진다는 개념으로 살고 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천사들에 대한 한 최소한의 지적인 동의를 보낸다. 이들은 성경이 중요한 이야기들과 교훈으로 가득 찬 좋은 책이라고 믿는다. 또한 종교는 자신들의 삶에서 소중하다고도 믿는다. 하지만 바로 이런 사람들이, 더구나 스스로 신앙을 고백하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인간은 선하게 태어났으며, 우리의 일차적인 목적은 가능한 한 삶을 즐기는 것이라고 믿는다.”

 

82%의 미국인(이 비율의 대부분은 복음주의자들이 차지하고 있다)은,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격언이 성경의 인용이라고 믿는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든 사람은 같은 신 혹은 영에게 기도드린다. 이 영적 존재에 어떤 이름을 갖다 붙이든 상관없다.” 나아가 “어떤 사람이 한 평생 착하게 살아가는 동안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선한 일을 많이 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이렇게 말한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닌 것이다. “무슬림이든, 기독교인이든, 아니면 다른 종교인이든 전 세계인이 같은 신에게 기도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이렇게 믿습니다.”

 

바나는 여러 보고서를 인용한 후에 아래와 같이 결론지었다.

미국의 영성은 명목상으로만 기독교적이다. --- 우리는 지식보다는 경험을 갈망한다. 절대적인 것보다는 선택의 가능성을 선호한다. 진리보다는 기호에 기울어진다. 성장보다는 안일함을 찾는다. 신앙도 우리의 조건에 맞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거부한다. 우리는 정의의 최종적인 결정권자. 경험과 운명의 궁극적인 통치자로 우리 자신을 옥좌에 앉혔다. 우리는 새로운 천년에 등장한 바리새인들이다.”

 

바나의 연구 결과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시간과 효율을 중시함을 보여 준다. 그 결과 장기적인 헌신을 기피하고, 제도, 사람 그리고 권위에 대해 회의적일 정도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독립성과 개별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귀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당신은 독특합니다.”라는 말이 들린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기대에 닿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당신의 감정이 당신을 이끈다는 걸 믿으세요. 절대적인 원리들을 의지하면 비현실적인 제한만 떠안게 됩니다. 오직 당신만이 그 어떤 순간, 어떤 환경에서 당신에게 무엇이 옳은지 혹은 최선인지 알 수 있어요” 여기가 압권이다. 그리고 이런 말로 마무리를 장식한다.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하세요. -- 즐기세요 --- 건강을 유지하세요. 당신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힘차게 달려 나가세요.” 바나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이것들이 오늘날 미국의 성인들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가치관이다. 그러나 바나는 자신이 내놓은 진단과는 달리 병증을 치료하기보다는 악화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처방을 내놓는다.

 

로버트 슐러 목사는 인터뷰에서 “자존심: 새로운 종교개혁”이라는 말을 거듭 입에 올렸다. 슐러는 교회가 하나님 중심보다는 인간을 중심에 놀려 놓는 일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칼빈이나 루터가 신 중심의 사고를 한 것은 적절하다. 하지만 지금은 저울추를 정반대로 놓아야 할 때다. 인간의 필요에 대해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고전적인 신학은 신학이 ‘신 중심’이고 ‘인간 중심’이어서는 안 된다고 고집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죄는 “나 자신 혹은 다른 인간 존재에게서 자존심을 박탈하는 어떤 행위 혹은 생각”으로 규정할 수 있다. “‘지옥’이란 무엇인가? 지옥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자존심의 상실이다. 자존심이란 우리 영혼의 자기 존중감의 궁극적인, 결코 마르지 않는 원천이다. -- 지옥에는 자존심을 잃은 사람이 들어간다.” “십자가는 자아로 향하는 길을 신성하게 닦아 준다.”

 

모순이다. 메닝거 같은 일반 심리학자는 죄를 주제로 책을 쓰고,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죄를 역기능으로, 구원을 회복으로 바꿔치기 하고 있다. 죄란 우리 스스로가 빠져나올 수 없는 하나의 조건인데도 말이다. 필립 리프는 베스터 셀러가 된 저서 ‘심리요법의 개가’에서 대중 심리학이 종교를 포함해 우리의 세계관 전체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를 밝히고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은 구원받기 위해서 태어난다.” 그는 이어 말한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인간은 즐겁게 되기 위해서 태어난다.”

 

로버트 슐러가 미국 개혁교회에서 안수를 받았다는 것은 역설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죄와 칭의와 같은 개념들을 수치와 자존심 등의 단어로 바꾸라고 선전한다. 세속주의를 연구하는 베어리 커즈먼은 말한다. “세속적인 사람들은 여전히 죄, 심판 그리고 형벌이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세속주의는 하나님이 세워 놓은 어떤 보편적인 기준도 무시하고, 이 하나님 앞에서 도덕적으로 별 허물이 없는 양 군다. 그러나 사람들은 실수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죄가 있다면, 형벌은 물론 내세가 아니라 현세에 내려져야 한다. 세속적인 사람들은 지옥에서 불에 붙어 신음하는 것이 아니라, 공중의 견해라는 재판정에서 불에 타고 있다.”

 

신앙을 포함해 자신의 인생을 심리요법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사람들은 풀어야 할 주요 문제가 하나님과의 화평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의 평화를 내세움으로써 전체 복음을 근본적으로 재정의한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심리요법의 세계관은 심지어 여전히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할지라도 복음의 용어들을 크게 왜곡한다. 기분 좋은 것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보다 중요하다. 아니 자아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규범적인 판단은 아예 들어설 자리가 없다.

 

심리요법에서 “죄인인 내가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이 되는가?”는 완전히 인식 밖의 문제이다. 원천, 재판관 그리고 인생의 목표로 자아가 등극한 이후로도, 복음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스스로의 유익을 위해서 조심해야 한다. 자기실현, 자기완성 그리고 자기계발은 오래 된 이단을 현대적으로 변형시켜 놓은 것에 불과하다. 바울은 이 이단을 공로를 통해 얻는 의라고 이름 붙였다.

 

- 마이클 호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pp 4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