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마이클호튼

두 왕국 사이에는 반립적 성격이 존재하고 있다/ 마이클 호튼

새벽지기1 2018. 1. 29. 12:21


화란의 신학자이자 수상이었던, 아브라함 카이퍼는 두 왕국의 관계를 반립(反立, antithesis)과 일반 은혜(common grace)의 맥락에서 설명하기를 좋아했다. 한편으로, 우리는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요일2:15)는 말을 듣는다. 나는 자라나면서 고등 학생들의 댄스 파티나 영화 제작, 소설가, 정치 및 가장 악하고 크리스천에게 있어서는기껏해야 시간 낭비라고 간주되는 여타의 분야로 진출하는 모든 일에 대해 이 구절을 인용하는 것을 들으면서 성장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이 말하고 있는 ‘세상’이 무슨 뜻인지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그 세상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2:16), 즉 ‘죄인의 욕망과 죄인의 눈의 정욕과 죄인이 가지고 있으며 행하고 있는 일에 대한 자랑’이다. 요한은 사람들을 미워하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다. 또한, 문화와 교육과 과학과 예술 등을 미워하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아야 할 것은 말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다. 사도 요한이 정죄하고 있는 것은 세상의 허영과 물질주의와 자기 연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과 비크리스천 사이에는 이런 반립(antithesis)이 있으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교회와 세상 사이에도 반립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동생을 죽인 일에 대해 가인을 심판하셨다. 만약 하나님이 자신을 그 땅에서 내쫓는다면, 자신이 살해당할 것을 염려하는 가인에게 하나님은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고 다짐해 주셨다(창4:15). 어째서 그런가?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의 일반 은혜 가운데서 가인으로 하여금 한 도성, 하나의 문명을 건설하도록 하실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여전히 문화적 활동을 중요하게 여기셨으며, 그래서 타락에도 불구하고 문명을 발전시켜 나가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이런 활동이 더 이상 ‘하나님 나라’ 활동은 아니었다. 그 활동은 하나님이 섭리로 정해 주시고, 인정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공통적인 일이지만 거룩한 일은 아니었다. 그 일은 더 이상 하나님 나라의 일부가 아니었다.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창4:15~16). 가인이 ‘약속된 땅’에서 쫓겨 나가서 ‘에덴의 동편’에서 살았음에 주목하기 바란다. 거기에서 가인은 한 도시를 건설했는데, 그 곳은 하나님 나라 밖이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물론 그 이야기의 끝은 아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했으니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4:25-26). 가인 후손들의 계보는 그 핵심적인 인물들이 어떻게 문화 가운데서의 다양한 활동의 창시자가 되었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였다(21-22절). 그러나 우리는 바로 다음 구절에서 셋의 출생과 그의 계보로 인도된다. 셋의 자손이 문화 가운데서 이룬 업적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에, 본문은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로써, 셋의 가문의 중요성을 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여기 우리 앞에 있는 것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두 개의 도성이다. 하나는 수평 지향적이며, 다른 한 도성은 수직 지향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한 가정(아담과 하와를 통한 인간 가정)을 통해서만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택받은 가정들을 통해 일을 하신다. 비록 셋의 자손도 문화에 동참하고 있지만, 그들은 하늘 약속의 상속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가인 족속과 통혼해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경우 그들의 신앙이 왜곡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구원은 도성을 건설하는 일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올 것임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어째서 이 모든 것이 중요한가? 왜냐하면 우리는 종종 이 두 왕국을 혼동해서, 비록 무의식적이라 할지라도, 구원이 그 도성을 건설하는 우리의 노력들을 통해 오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근대 시기 전체는 이 사상에 대한 하나의 실험장이었다. 즉 문화적 활동(정치, 도덕, 과학, 기술, 예술 및 교육 등)을 통해 우리의 맨손으로 우리 스스로 에덴(세계 평화와 고난과 고통, 질병과 빈곤의 종식)을 건설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보수적인 크리스천들에게 조차도 이 비전은 매우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서 이루어지는 구원을 선포하는 대신에, 우리는 옛날 이스라엘처럼, 정치적이며 도덕적인 승리들을 쟁취하고 미국을 ‘크리스천 국가’로 만드는 맥락에서 구원을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말해 , 크리스천 국가라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그 정도는 다양하겠지만, 기독교적인 신념들과 가치들의 영향을 받고 형성된 국가들이나 민족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지상에 더 이상 특별한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주 오래 전에 가인이 건설하기 시작했던 그 도성, 그 도시가 바로 오늘날 그 문화적 추구들을 통해 사람들이 건설하고 있는 바로 그 도성, 그 도시다. 그 도성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로 세워진 도시다. 그러나 타락 때문에, 그 도성은 마지막 때까지 구원의 영역너머 ‘에덴의 동쪽’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우리는 ‘소금’이 되도록 부름받은 크리스천들로서 사회를 보존하고 문화의 쇠퇴를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어떤 나라도 어떤 제국도 세상은 고사하고서라도 그 자신도 쇠퇴로부터 구할 수 없다. 이 말을 처음 듣는다면, 상당히 비관주의적으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전체적으로 본다면, 그렇게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제 말씀하셨다시피, “이 세상에서 너희는 고난을 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가인이 영원히 아벨을 핍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왕 국 사이에는 일종의 반립적 성격이 존재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이 애굽과 페르시아에 포로로 잡혀가 있었을 동안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체로 대접을 잘 받았다. 그리고 그 외국 문화의 관습들과 시민으로서의 생활에 참여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을 만한 새로운 지식과 기술들을 가지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왔다. 이런 사실은 동전의 또 다른 측면을 보도록 우리를 이끌어 준다. 만약 ‘반립적 성격’이 두 왕국 사이의 역사적이며 종말론적인 투쟁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고 한다면, ‘일반 은혜’는 신자와 불신자가 모두 함께 공동으로 유지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에 의해 공동으로 시도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

 

-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된 교회』, pp 226-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