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마이클호튼

설교가 효력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 마이클 호튼

새벽지기1 2018. 1. 26. 07:12


목회자나 성도, 음악, 각색과 조명, 드라마, 혹은 ‘말씀 선포의 미련한 것’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여겨질 수 있는 다른 수단 때문에 설교가 효력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다. 설교가 효력을 갖는 것은 하나님이 그때 그곳에서 자신의 영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나눠 주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설교는 죄인으로 하여금 순전히 의지력이나 노력으로 스스로를 구원하게 만드는 격려라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이 성취하신 일에 대한 선포이기 때문이다. 설교는 좋은 소식이지 좋은 충고나 좋은 연출이나 좋은 생각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심지어 사도의 사역도 영광이나 흥분이나 설득력이라는 장식물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선포된 복음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리라고 기대한 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겠다고 약속하신 곳이면 이가 빠진 컵이나 씻다가 내버려 둔 접시가 있든 아니면 그 밖의 다른 무엇이 있든 간에 하나님이 그곳에 계신다고 늘 확신할 수 있다. 성령이 베푸시는 권능은 하나의 약속과 이어져 있는데, 그 약속은 선포된 복음을 들음에서 믿음이 난다는 것이다(롬10:8,17).

 

우리는 모든 경우에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고 매주 똑 같은 정도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권능은 하나님이 객관적으로 주신 약속에 있는 것이지 우리가 주관적으로 내리는 판단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거기에 앉아서 복음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선포를 들을 때, 우리는 비록 자기 경험이 정반대로 말하는 듯 느껴질 때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객관적으로 받아 들이심을 알게 된다. 비록 스스로가 ‘그처럼 평안하고 마음 편한 감정’을 느끼지 못할지는 몰라도 나는 이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

 

우리가 더욱 창의적이고 적절하고 흥미진진하게 여길 수도 있는 다른 모든 것과 설교를 차별화하는 요소는 목회자나 목회자가 사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이 정하신 방편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2-13).

 

말씀과 영의 일체성은 성경에서 잘 입증된다. 에스겔 선지자가 뼈들에게 말해야 하는 내용에 주목하라. 더 정확히 말해 에스겔 선지자가 뼈들에게 말하지 않아야 하는 내용에 주목하라. 에스겔 선지자는 뼈들을 권고하거나 뼈들을 격려하거나, 무력한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뼈들을 지도하거나, 동정심에서 자신을 뼈들과 동일시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자기 개인의 능력이나 흥미진진한 방식을 동해 뼈들을 얻으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단순히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명령을 받는다.

 

- 마이클 호튼, 『개혁주의 예배론』, pp 10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