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마이클호튼

하나님은 우리의 사고 방식과 생활 방식에 맞추기 위해 오시지 않는다 / 마이클 호튼

새벽지기1 2018. 1. 23. 07:06


우리는 깊고 어두운 동굴에 갇혀 있는 사람과 같아서 동굴을 헤매는 동안에 한 줄기 빛이 외부에서 우리에게 비추기 전까지는 출구를 찾을 수 없다. 히브리서 저자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듯이 “내세의 능력”(히6:5)이 우리에게 간섭하는 것은 우리가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고, 우리 자신이 참으로 어떤 사람인지를 자백하며, 자신을 죄인으로 하나님께 고백하고, 그 결과로 하나님이 돌아서셔서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입양된 상속자로 삼으시는 바로 그 순간이다.

 

이방인이요 외인이요 “어딘지 모르는 자신의 땅에 살면서 아무도 위하지 않는 자신의 무명한 계획을 세우는 무명인”이던 나는 더 이상 이 놀라운 드라마의 관객이 아니라 선택받은 이스라엘 자손의 고상한 이야기 속에 돌연 포함되는데, 그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모퉁잇돌” 이다. 혹은 비유를 바꿔 말하면, 나는 생명을 주는 포도나무에 붙은 살아 있는 가지가 되고,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몸의 중요한 일부분이 된다. 버림 받은 사람이 특권을 누리는 인물로 대본에 새롭게 참여하게 된다. ‘예수님 안’ 에서 그리고 예수님의 몸에 속한 모든 지체와 더불어 나는 선택되어 소중하고 구속받고 의롭다 함을 받고 성화되고 마지막 날 육체로 부활하고 영원토록 영화롭게 된다. 세월이 지나 내가 아무리 많이 변하더라도 이것이 나의 정체성에서 영속적인 부분이다.

 

그런데 이런 정체성은 언약적인 성격을 띤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은혜 언약의 머리이시며, 하나님의 백성은 만대에 언약 백성이며, 나 자신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와 더불어 맺으신 언약에 속해 있는 살아 있는 구성원이다. 그것이 바로 예배가 언약 갱신 의식인 이유인데, 그와 같은 하나님의 언약은 시연될 뿐 아니라 그 언약의 실재도 재연되고, 재비준되고,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설교자 개인의 기지와 지혜와 경험담 때문에 지루해지거나 즐거워하는 그런 설교에 더 이상 만족할 수 없다. 우리는 본문에서 진행되는 진짜 드라마를 무시하는 설교, 현재 질서에 대한 현세적 만족에서 비롯되는 프로테우스의 끊임없는 변화와 줄거리 없는 허무에 성경을 맞추는 설교, 그럼으로써 우리를 손에 넣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목표인 듯한 ‘실용적인’ 설교에 더 이상 감동하지 못한다. 우리는 사슬에 결박되어 자신에게 말씀을 걸어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까지는 새롭게 대본에 참여할 수 없다.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떨어진 자신감을 평범한 방식으로 지원하거나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겪는 불쾌한 일들을 바로잡기 위해 오시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이미 확립된 우리의 사고 방식과 생활 방식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오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어리석은 소망을 좌절시키고, 우리가 느끼는 필요를 사소한 것으로 폭로함으로써 우리에게 훨씬 위대한 새로운 소망과 필요를 제공하고, 그런 후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뛰어나게 그런 소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오신다.

 

- 마이클 호튼, 『개혁주의 예배론』, pp 90-92

(청교도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