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마이클호튼

찰스 피니의 부흥은 펠라기우스적인 흥분과 수단의 활용이었다 / 마이클 호튼

새벽지기1 2018. 1. 24. 07:16


19세기에는 신앙 부흥 운동이 미국 전역에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이런 모임은 큰 목조 예배당이나 천막 안에서 열렸다. 중심적 역할을 했던 장소들은 새롭게 대두된 대중문화를 본떴는데, 주점을 비난하면서도 주점의 양식을 도입해 무대를 설치하고, 민요풍의 복음 성가를 도입했다. 찰스 피니가 지지한 방법론적 실용주의의 저변에는 하나님, 인간 본성, 구원을 이해하는 전통적 형식의 신학과 결별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휫필드, 그리고 18세기 중반에 미국의 대각성 운동을 주도한 대다수 지도자에게 부흥이란 하나님이 하시는 놀라운 일이었으며, 통상적 방편(설교)을 통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복이었다. 하지만 찰스 피니는 이런 대각성 운동 초기의 관점에 대해 “교회가 번영하는 데 있어서 이만큼 위험하고 부조리한 교리도 없다”라고 말한다. 피니는 “부흥은 기적이 아니다”라고 언명한다. 실제로 “종교에는 보통의 자연력을 넘어서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는 단지 자연력의 올바른 행사에 불과하며 그 밖의 다른 무엇이 아니다 ...... 종교도 제정된 수단을 올바르게 사용해서 발생하는 냉철한 결과일 뿐이다”. 가장 흥분시키는 방식을 찾아라, 그러면 부흥이 이뤄질 것이다.

 

회심과 부흥이 초자연적 은혜에 의존하지 않게 되자 방식도 하나님의 명령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찰스 피니는 자신의 『조직신학』에서 “하나님은 그 어떤 특별한 수단도 결코 고안하시지 않는다”는 명제를 어떤 장의 부제로 사용한다. 따라서 회심과 부흥이 사람이라는 매개자(설교자와 정중)에 따라 좌우되는 것같이 방식도 “회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흥분”에 따라 설교자와 청중에 맞춰 조정될 수 있었다. 피니는 “그리스도인이 자주 새롭게 회심되지 않으면 부흥은 위축되고 중단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피니가 제안한 ‘새로운 수단’은 성공을 거두는데, 결국 교회는 그 획기적 방식을 받아들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부흥 집회의 부흥사에게 교인을 뺏길 수밖에 없었다.

 

찰스 피니의 신학에 나타난 펠라기우스주의적 경향은 자신의 획기적 방식에 편승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수단을 무시하는 태도를 정당화한다. 대단히 요란하게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많은 운동의 경우에서와 같이 이런 새로운 수단을 바탕으로 ‘회심한’ 많은 사람도 급속히 싹을 틔웠다가 오후 햇빛에 급속히 시들어질 뿐이었다. 자신의 목회를 마감할 무렵, 피니 자신도 종교의 상태에 대해 크게 탄식하면서 자신이 고안한 새로운 수단해 크게 의아해했다. 피니가 신앙 부흥 운동을 전개한 장소들은 무신론이나 비교(秘敎)에 곧 자리를 내주었다.

 

소비 지상주의, 치유주의의 승리, 현대적인 다른 도전들은 이런 미국적인 펠라기우스주의(자기 구원의 신학)를 더욱더 구미에 맞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부흥을 ‘촉진하는’ 수법과 기교로 넘쳐나는 오늘날에 우리가 절실히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이 자기 뜻에 따라 친히 세우신 통상적 방편과는 상관없이 일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령은 사람이 콘센트에서 전기를 사용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전용되시는 것이 아니며, 벤저민 워필드가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가령 목수에게 지시하듯 성령께 지시해서 우리를 위해 일하시게 하는 것”이 아니다. 더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흥분’과 ‘새로운 수단’이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은 설교와 성례와 언약적 양육만을 은혜의 방편으로 약속하셨다.

 

- 마이클 호튼, 『개혁주의 예배론』, pp 95-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