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마이클호튼

'“아담 안에 있는 서사”와 “예수님 안에 있는 서사” / 마이클 호튼

새벽지기1 2018. 1. 20. 07:45


두개의 거대 서사가 있다. 그중 하나는 ‘아담 안’에 있는 서사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님 안’에 있는 서사다. 아담 안에 있는 서사는 선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 대한 무의미한 반역을 통해 오직 좌절과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서사이며, 예수님 안에 서사는 회복된 우주 안에서 삼위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완성되는 구속과 화해에 관한 서사다.

 

나쁜 소식은 만일 진정한 자아가 존재한다면 그 자아는 객관적으로 죄 있는 상태이며(여기서 끊임없이 괴롭히는 무가치함에 대한 의식이 비롯됨) 심판받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시점에 이르면 부유한 젊은 관리처럼 슬픈 기색을 띠고 떠나서 현재 상태에 대처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좋은 소식은 하나님이 세례에 관여하셔서 죄 있는 자아를 예수님의 죽음 안에 잠그신 다음에 새 생명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일으키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프로테우스는 풀려날 수 있기 위해 사슬에 묶인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프로테우스는 자유자재로 용이나 불이나 큰물로 모습을 바꿀 수 있는 신이었다. 미래를 예언하는 독특한 재능을 부여받았던 프로테우스는 그 입에서 자신들의 운명을 빼앗으려 시도한 마법사들을 쉽게 피할 수 있었다 프로테우스로 하여금 자신들의 명령을 따르도록 강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프로테우스를 붙잡아 사슬에 묶는 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고 나면 프로테우스는 자신을 체포한 사람을 피하기 위해 포착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변신하는 힘을 발휘할 수 없어서 모든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심리학자 로버트 립턴은 새롭게 대두된 우리 시대의 정신을 지배하는 ‘프로테우스적 양식’을 언급한다.

 

여기서 로버트 립턴과 다른 많은 사람이 설명하는 ‘포스트모던적인 경험’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우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벧전1:18)의 배역을 맡게 하는 대본이다. 근대성이 자아를 겸손한 종이 아닌 주권적 창조자로 만들기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탈근대성도 아담과 아담의 후손이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면서 늘 불가피하게 경험하는 환멸에 대한 증거다. 현대인은 외부 세계가 서사의 구상을 제공한다는 확신이 사라지게 되면서 내면으로 눈을 돌렸지만, 자기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자기 안에서 발견할 수 없게 되자 목적지 없이 떠도는 방랑자, 곧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는’(딤후3:7) 구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는 성경의 대본이 선포될 때, 단순히 성경이나 그리스도의 공동체 내부에서만이 아니라 각 사람의 내면에서도 어떤 일체성이 생겨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그 공동체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이야기로 꾸며지고 사슬에 매어 있음을 점차 깨닫는데, 예언하는 일은 고사하고 도리어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예언하심과 우리가 죄인으로, 하나님의 원수로,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외국인과 나그네”로 일컬어짐을 깨닫는다.

 

- 마이클 호튼, 『개혁주의 예배론』, pp 69-81

(청교도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