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마이클호튼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고, 만지고, 통제하고 싶어 한다 / 마이클 호튼

새벽지기1 2018. 1. 17. 11:09


하나님은 완전한 의를 요구하시는데, 바울 사도는 유대인들이 오직 예수님만 의지하는 믿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행위를 통해 그런 의를 얻으려 한다고 설명한다(롬10장). 바울 사도는 로마서 전체를 통해 은혜의 논리를 대단히 분명하게 산출하는데, 특히 로마서 8장 29절이 시작되는 대목은 빈틈없는 논리적 주장으로 바뀐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29~31).

 

그런 다음 바울 사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율법에서 난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가 도달하는 것과 정반대 결론에 이르게 된다고 부언한다. 이것은 최종적으로 로마서 11장에서 가장 간명하게 진술된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11:6). 그것이 바로복음의 논리다.

 

행위-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께로 올라갈 수 있고 예수님을 나에게로, 지금 내가 있는 곳으로, 나 자신의 경험 속으로 내려오시게 할 수 있을까?”라고 말한다(롬10:5-17). 용을 무찌르고 최종적인 보상을 받기 위해 광활한 바다를 건너는 율리시스처럼 행위-의의 논리도 구원을 개인적 정복의 각도에서 이해한다. 마르틴 루터는 사람들이 개인적 정복을 하나님의 현존으로 만들기 위해 오르고 있는 사다리에 관해 늘 이야기하는데, 루터가 염두에 두는 사다리는 신비주의, 공로, 명상이었다.

 

오늘 날에도 이와 똑같은 사다리가 많이 있다. 하나님을 하늘에서 끌어내리고 우리가 원하는 때에 우리가 원하는 바를 하시도록 하나님을 조종하기 위한 방법이 많이 있다. 그저 바른 기법과 영적인 원리만 알면 된다. 알맞은 일만 하면 된다. 그저 올바른 영적 지도자를 찾거나 참여하기에 안성맞춤인 영적 운동만 발견하면 된다. 그저 최근에 하나님의 이적이 나타난다고 소문난 성지로 여행만 하면 된다.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시도했던 방법이다. 하나님은 시내 산 정상에서 자기 종 모세를 통해 기록되고 선포된 말씀을 구속받은 자기 백성에게 주셨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자신들이 보고 만지고 통제할 수 있는 금송아지를 만드는 데 여념이 없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고, 만지고, 통제하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그런 ‘행동’ 이 나타나는 곳,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땅에 나타나시는 곳에 있을 수만 있다면 비행기를 타고 캐나다 토론토나 미국 펜사콜라나 심지어 프랑스 루드스로 가는 먼 여행이라도 개의치 않고 거의 모든 일올 하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 만족하지 못하는 탓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을 것”(출33:20)이라고 경고하신다. 하나님은 자기 영광과 대면하는 일이 기쁨보다는 도리어 선지자에게 죽음을 가져올 것임을 모세에게 알리시면서, 자기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선하심이 지나가게 하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짧은 설교를 선포함으로써 이렇게 하신다.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라는 구절은 서론과 본론과 결론이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우상 숭배는 큰 죄였다. 우상 숭배는 간음이나 간통, 탐욕이나 절도, 심지어 살인이나 부모에 대한 불순종이 아니었다. 이런 행위들도 극히 중대한 범죄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율법에 따라 제재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 숭배는 다른 모든 죄가 발원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죄였다.

 

가나안 사람들과 그 지역의 다른 민족들은 이스라엘 자손보다 훨씬 세련된 문화와 발전된 기술을 갖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가나안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스스로가 누리는 번영이 자신의 노력과 신들의 승인 덕분이라고 믿었다. 가나안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경우, 이런 신들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나타내는 표시나 이런 신들과의 접촉점은 땅 위의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세워진 거대한 석상과 제단의 형태로 존재했다.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일정을 소망가운데 인내로 기다리는 일에 상응하는 듣기만 하는 일에 염증을 느꼈다. 대신에 이스라엘 자손은 보기를 원했는데, 보기는 실체 자체와 상응한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경향은 태어날 때부터 불신하고 부정적인 본성을 가진 타락한 피조물인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8:24~25)라고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 마이클 호튼, 『개혁주의 예배론』, pp 5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