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마이클호튼

패배의 상징으로 보이는 십자가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발견한다/ 마이클 호튼

새벽지기1 2018. 1. 15. 05:38


근대성은 인간의 노력을 통해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고 지상의 혼란을 천국의 평화로 변환시키려는 추구였다. 그러나 기독교의 메시지는 그와 같은 아담적인 신화에 대한 최대의 도전이다. 기독교 메시지는 어떤 사람이나 민족이나 국가나 인종도 그 사다리를 기어 올라서 하늘에 오를 수 없음을 얘기하고 있다. 기독교 메시지는 오히려 상실한 세계를 구원 하시려고 그 사다리를 타고 내려온 사람에 대해, 아니 하나님 자신에 대해 말해 주고 있다.

 

세속주의는 초월성을 부인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초월적인 현존 속으로 뚫고 들어가 신비주의자들이 추구했듯이,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즉 데우스 누두스(Deus nudus, 벌거벗은 대로의 하나님)를 보려고 시도함으로써 긴장을 없애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아무도 하나님을 보고서는 살 자가 없다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정말 거룩하시며, 놀랍도록 초월적이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닌 모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초월성과 내재성은 하나님이며 사람이신, 한 위격 안에서의 두 본성이신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만난다. 승리는 인간성이 하나님이 된 것이 아니며, 어떤 사람이나 인종이나 국가가 구세주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이다.

 

현대의 모든 도그마와는 얼마나 다른가! 패배의 상징으로 보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는 죽음의 권세들과 하나님의 진노를 이긴 궁극적인 승리를 발견한다. 그 위대한 승리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성취되었지, 우리가 워싱턴에서 이룬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대중 집회와 행진을 통해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죄와 구속에 대한 설명으로써 선포된다.

 

교회에게 존재 의미를 가져다 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와 부활이지 무너져 내리는 아메리칸 드림을 치켜 세워 주는 것이 아니다. 그런 꿈은 이스라엘 자손이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순례길을 가는 데 있어서 그들의 눈을 흐리게 만들고 있는 또 하나의 바벨탑, 또 하나의 이교주의의 높은 성소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두려움 없이 참 소망을 가지고서 하늘을 향해 우리의 눈을 들 수 있는 것은 그 십자가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이다(히12:29).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성경에서 자신을 계시하셨고,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여 주신 대로의 그 하나님에게 우리의 믿음을 두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아주 중대한 핵심이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티(근대성)의 우상들의 유토피아들과 만병통치약들을 크게 반대하면서, 초월적인 해결책과 ‘영적인 것’ 으로의 복귀를 많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는 것은 인생에서 영적인 측면을 추구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분이시다.

 

하늘을 바라본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 손으로 만든 것을 바라본다는 것도 아니며, 우리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도 아니며, 대의명분과 운동을 바라보는 것도 아니며, 이데올로기나 전략을 바라본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영적 실재들을 바라본다는 것도 아니며, 예루살렘의 성문 밖에서 그 날 오후에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인간의 지혜에 대해 승리하신 역사상의 그 언덕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 된 교회』, pp 187-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