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마이클호튼

일반 은혜로, 불신자들에게도 빛나는 하나님의 형상의 광채들이 있다/ 마이클 호튼

새벽지기1 2018. 1. 31. 07:09


타락의 영향에 대해 설명하면서 칼빈은 우리가 초자연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믿음,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참사랑, 의로움에 대한 열망 등)과 우리가 자연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재능, 지혜, 지식, 이성 도덕, 창조성 등)을 구분하고 있다. 하나님은 창조하시면서 이 둘을 다 지으신 분이시다. 그러나 우리의 초자연적인 부분은 타락과 함께 상실되었다. 그리고 그 소유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자연적인 개입으로써만 회복될 수 있다.

 

사람들의 의지가 죄에 노예화되어 있고, 심지어 사람들이 행하는 선행까지도 이기적인 사랑에 의해 왜곡될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안에는 건강함이 전혀 없다는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한 채로 세상에 태어난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최선의 행위들에서조차 사곡(邪曲)함을 보실 수 있다고 해서, 우리가 서로 상대방의 사곡함을 볼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비록 우리가 타락 이후에 본성상으로 영적인 의로움에 대해 무능력할지라도, 시민 사회적인 덕은 행할 수 있다. 인간의 부패를 뚫고서 빛나는 하나님 형상의 광채들은 ‘그가 이성적인 존재임을 보여 주고 있으며, 그가 이해력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그를 야수들로부터 구별시켜 준다.’ 물론 그 이해력도 무지로 얼룩져 있지만 말이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도 땅의 것들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늘의 것들은 이해할 수 없다(고전2:14).

 

불신자들이 의로운 법률들과 좋은 음악과 건전한 교육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불신자들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자들이며, 여전히 빛의 광선들이 빛나고 있다. 둘째, 하나님의 섭리적인 주권을 통하여 행사되고 있는 일반 은혜는 우리의 부패와 무지가 우리를 끌고 들어갈 수 있는 깊이까지 가지 못하도록 사악함과 악습과 무지를 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우파의 많은 지도자들은 오직 크리스천만이 국가를 다스릴 권리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는 비기독교인들의 글을 읽을 필요도 없으며, 그들의 말은 들을 가치도 없고 그들과 함께 하거나 그들의 작업도 즐길 만한 가치가 전혀 없다고 가정하고 있는 근본주의의 일반적인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한번 나는 다음과 같은 칼빈의 통찰들이 여기서 정곡을 찌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세속 작가들에게서 이런 내용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 안에서 빛나고 있는 진리의 경탄할 만한 빛으로 하여금, 인간의 마음이 비록 타락했으며 온전함으로부터 왜곡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탁월한 선물들로 옷입고 있으며 장식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도록 하자.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진리의 유일한 샘으로 간주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불명예스럽게 하지 않도록, 진리가 나타날 때마다 그 진리 자제를 거부하지도 그 진리를 경멸하지도 않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처럼 위대한 형평성을 가지고 시민 사회의 질서와 기율을 확립했던 고대의 법률가들 위에 그 진리가 비추어지고 있음을 부인할 것인가? 자연을 세련되게 관찰하고 솜씨 있게 묘사하고 있는 철학자들이 눈이 멀었다고 말할 것인가?  의학을 발전시켜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노고를 마다하지 않은 그 사람들을 실성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것인가? 그 모든 수학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그 학문들을 미친 사람들의 헛소리들로 취급할 것인가? 성경(고전2:14)에서 ‘자연인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그 사람들은 진실로 땅에 속한 것들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 예리하게 통찰을 한다. 따라서, 그 참된 선함이 훼손된 이후에라도 주님은 인간 본성에게 얼마나 많은 선물을 남겨 두셨는지를 그들의 예를 통해 배우도록 하자.(강조는 덧붙인 것임)

 

터어키의 무슬림들이 ‘기독교 세계’에 침공해 들어와서 유럽 전체를 삼킬 듯이 위협하고 있을 때, 마르틴 루터는 “차라리 나는 부정직한 크리스천보다는 정직한 터어키인의 지배를 받기 원한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비록 영적인 분별은 한 사람이 중생할 때까지 완전히 상설되어 있지만 불신자들도 가질 수 있는 자연적인 지혜와 탁월함과 덕성과 아름다움이 상당히 있다. 이런 선물들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온다. 비록 그 선물들이 그렇지 않은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또한 크리스천들 자신들도 중생했지만 여전히 죄인들이다. 그리고 분명 여전히 악하기도 하다.

 

구속은 문화에 대한 우리의 참여를 바꾸지 않는다.

오히려 구속은 우리를 바꾼다. 그러므로 그 참여의 성격을 바꾸어 놓는다.

 

우리는 ‘일반 은혜’의 시기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 이 시기에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신다”(마5:45). 언젠가 한 사마리아 마을이 예수님 일행을 환영치 않았다. 그러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렇게 물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그러나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셨다”(눅9:54-'56).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올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때는 세상의 마지막 때다. 지금은 올바른 때도 아니며, 우리 또한 올바른 재판장들도 아니다.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판단이 있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교회가 핍박을 받고 있지만, 교회는 통치자들과 세속 권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롬13장). 이는 사악한 통치자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일꾼들’이기 때문이다.

 

-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된 교회』, pp 230-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