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마이클호튼

조엘 오스틴의 가벼운 율법: 최선을 다함으로 구원받는다/ 마이클 호튼

새벽지기1 2018. 2. 9. 13:08


오스틴의 메시지에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율법을 지키지 못한 데에 따르는 정죄가 일체 없다. 그런가 하면 칭의도 없다. 이 두 메시지 대신에, 이 두 메시지의 중간 어디쯤 있는 낙관적인 도덕주의가 있다. 즉 최선을 다하라. 내가 말하는 지침들을 따르라.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의 인생을 성공으로 이끄실 것이다. “영거주춤 뒤처지 마십시오". 그는 경고한다. 그러나 부드럽게 애원하는 어조로, 그가 주는 충고를 따라야 할 유일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바를 얻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라고 제시한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존재하는 친구이자 파트너다.

 

“당신이 해야 할 몫을 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 몫을 하십니다". “물론 우리는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무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 판결을 받아들이고, 의롭다 하심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께로 달려가기는커녕 오스틴은 독자들에게 죄책과 정죄를 무조건 거부하라고만 권유한다.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렸다. 그런데도 쉽다. 오스틴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선한 사람들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아주 편안한 방안을 주셨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공하지 못한 인생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 보는 것 같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지금까지 행한 모든 선행을 차곡차곡 기록하고 계십니다". 마치 이것이 좋은 소식이라도 되는 양 오스틴은 말한다. “당신이 절박한 그 순간에, 당신이 행한 선행 때문에,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움직이셔서 당신을 돌보아주십니다".

 

가벼운 율법(Law Lite)이다. 그러나 결코 혼동하지 말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언급을 피하려는 미소 띤 얼굴의 베이비부머 복음 전도자 뒤에는, 복음을 율법으로, 승리의 선언을 승리해야 한다는 분발의 촉구로, 좋은 소식을 좋은 충고로 격하시키려는 결심이 도사리고 있다. 나쁜 소식은 옛날에 비하면 그다지 나쁘지 않은 소식이 된 반면에, 좋은 소식은 나쁜 소식을 살짝 완화시켜 놓은 것, 다시 말해서 더 열심히 해 보라가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주 쉽다! 하다가 잘 안 되면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은 당신이 최선을 다하기만을 바라실 뿐이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 주신다.

 

시장이 좌지우지 하는 문화에 대해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견고한 모든 것이 공기 중으로 사라져 버린다”. 하나님 역시 소비재가 된다. 우리의 개인적인 웰빙을 위해 사서 쓸 수 있는 제품 또는 심리치료요법이 되는 것이다. 도덕적이고 심리요법적인 종교 접근의 전범을 보여 주는 오스틴의 메시지는, 베이비부머들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비통해 하거나 하나님의 구원하는 자비의 해방하는 소식에 맞춰 춤출 수 없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달리 말해서, 모든 중력이 사라졌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 그리고 하나님의 가슴 벅찬 은혜라는 두 중력 모두가 사라진 것이다. 우리는 약간의 훈계와 동기부여가 필요한 선량한 사람들일 뿐이다.

 

이러한 심리요법적인 분위기 속에서, 죄는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잠재력을 최대한 계발해서 살지 않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은 ‘죄’고, 이러한 죄의 삯은 현실에서 최고의 인생을 놓쳐 버리는 것이다. 어쨌든 권면, 요구 그리고 부담은 끊이지 않고 제시된다. “내가 제시하는 대로 하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이 복 될 것을 내가 보증합니다”.

 

2006년 「타임」지는 한 기사를 통해, 한 루터파 교회가 사순철 내내 『긍정의 힘』을 묵상 자료로 따른 일을 한 예로 전하며, 오스틴이 좀더 전통적인 개신교 진영에서 더 성공적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기고자는 이렇게 꼬집었다. “예수는 당시 최악의 삶을 살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십자가의 신학을 표방하던 교회들조차 대중적인 미국제 영성이라는 환경에서 영광의 신학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우리는 자기도취적인 도덕주의의 바다에서 유영하고 있다. 자기계발이라는 경음악 편곡 구원관이 그것이다.

 

불신자의 비위를 거스르게 하는 말은 한 마디도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에게는 훨씬 더 그렇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우리의 정죄 혹은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그 정죄를 젊어지심에 대한 말은 전무하다. 오스틴의 메시지에는 삼위일체 혹은 죽은 자의 부활 그리고 오는 세상에 대한 말은 전혀 없다. 사실은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도 아주 드물다. 이 텔레비전 복음 전도자는, 사람마다 서로 다른 “은사들”이 있고, 자신의 사명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돕는 것이라고 한다.

 

거듭 말하지만 오스틴의 메시지에는 미국의 낙관주의 문화에서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요소란 거의 없다. 디즈니의 지미니 크리켓은 이 점을 아주 잘 표현했다. “별에게 소원을 빌어 봐요. 모든 꿈이 이뤄질 거예요". 오스틴의 메시지는 도덕적인, 심리요법적인 이신론의 최고봉이다. 복음 없는 복음 전도가 가능한가? 기독교적인 메시지 없이도 기독교적인 전도가 가능한가?

 

이런 메시지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사역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총과 복을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드는 일련의 일을 통해 주관적으로 예수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구원받는다는 결론을 쉽게 내리게 만든다.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감각을 상설할 때, 죄는 그것이 가리키는 바를 잃어버리고 만다. 죄는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롬3:23)이 아니라, 자아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상태다. 그리스도 없이도 모든 것이 잘 통제된다. 하나님은 여전히 점수를 매기시지만, 우리가 하는 선행에만 그렇다.

 

오스틴의 책 어디서도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의 중보자로 나오지 않는다. 죄인을 위해 율법을 완성하고 그들의 죄책을 짐으로써 자신의 의를 그들에게 전가시켜 준 대속자를 찾을 필요가 없다. 성육신하였다가 죽고 살아나 승천한, 불경건한 자들을 통치하는 구세주보다는 눈에 보이는 친구와 같은 이에게 모호하게, 또 정서적으로 밀착하는 결과가 나타난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는 그것이 무엇이든 당신 인생에게 되어 주었으면 하는 그런 존재가 된다. 나의 가장 큰 문제가 외로움이면 믿을 만한 친구 예수가 복음이다. 가장 큰 문제가 불안이면, 예수는 우리를 안정시켜 준다. 예수는 결혼과 가정을 단단하게 붙여 주는 접착제이다.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투쟁할 목적을 준다. 날마다 지혜를 공급해 준다. 이러한 호소에는 절반의 진리가 들어 있으나, 이것들은 결코 회중이 진정한 문제에 직면하도록 하지 못한다.

 

복종, 헌신, 결단 그리고 승리하는 생활이라는 이 복음은 하나님이 이루신 일에 대한 복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 구해 내려는 요구에 불과하다. 성경이 복음을 예수와 맺는 개인적인 관계로 말하는 법도 없으려니와 믿음을 예수께 내 마음에 들어와 달라고 부탁하는 결단으로 정의하는 일도 없다는 사실은 그렇다고 쳐도, 이런 구원관은 이미 모든 사람이 공정한 재판관 앞에 서 있는 선고받은 범죄자로든 아니면 그리스도와 더불어 의롭다함을 받은 공동 상속자 그리고 입양된 아버지의 자녀로든,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놓치고 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을 수 있을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보다 내 행복이 주요 관심사가 될 때는 더 이상 문제가 안 된다. 구원은 이 세상에 임하고 있는 심판으로부터 하나님의 구출을 받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최고 인생을 지금 살기 위한 자기개선의 문제다.

 

- 마이클 호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pp 98-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