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마이클호튼

십자가 없는 영광은 영광의 신학의 미국식 종교적 변형판이다/ 마이클 호튼

새벽지기1 2018. 2. 14. 07:33


지금 영광을 거머 쥐라. 십자가, 저주, 심판은 없다. 되고 싶은 대로 되어라.

우리는 타고난 자아도취에 호소하는 시대의 문화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오늘날 가끔은 자유주의자들과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나팔을 불고 있는 이러한 메시지의 종교적인 변형판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목적이 아니라,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변형은 많지만, 이것은 영광의 신학이다.

그러나 이 영광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치욕을 나눈 자들에게 복음이 약속하는 그런 영광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죄와 죽음의 현실을 부정하면서 취하려는 영광이다.

 

그리스도는 증상을 다루지 않으셨다. 그리스도는 근원으로 곧장 가셨다.

아담의 죄에 참여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율법이 정당하게 내래는 형벌인 저주를 다루셨다.

첫 아담이 죄를 가져왔다면, 미자막 아담은 영원한 생명을 가져왔다(고전15:20-24).

 

오스틴을 비롯한 요즘 활동하는 다른 많은 설교자들이 약속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리스도가 없어도 된다.

성경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복음서들에 약속된 구속과 같은 것도 필요 없다.

조엘 오스틴의 메시지는 복음과 문화를 비벼 놓는 일반적인 형상을 대언하고 있다.

우리가 동의할 만한 교리들이 있는지 없는지는 따지지 않는다.

그 안에 미국의 종교가 들어가 움직이고 그 특성을 가지고 있는 담론은, 보수주의, 자유주의, 침례교, 뉴에이지, 오순절 혹은 로마 가톨릭, 개혁주의 혹은 아르미니우스주의, 유니테리언 교회 혹은 루터교 등 가릴 것 없이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메시지를 실어 나르고 있다.


오늘날 이렇게 말하면 이단 시비가 붙겠지만, 미국인들에게는 더 나은 가정, 재정, 건강 혹은 나아가서 도덕성을 함양하는 위해서라면 굳이 예수가 필요 없다고 말해 줄 필요가 있다.

십자가로 나온다는 것은 회개한다는 뜻이다.

조연 정도로 예수를 취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코칭과 개선이 아니라 죽음과 부활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삶의 동기로 맞추려고 할 때는, 줄거리가 죄다 빗나가 버린다. 사소해지고 만다.

바울은 환경 때문이 아니라 복음의 약속 때문에 항상 즐거워했다.

복음은 우리가 잠시 고난을 당하고 나면 그리스도의 부활 영광을 나누게 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는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롬16:18)로 교회를 속이는 거짓 교사들에게 경고했다.

 

오스틴이 전파하는 건강과 부의 복음은 고난을 다룰 수 없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있는 세상 왕국을 제공하는 영광의 신학이다.

이 전형적인 미국 종교에는 현재에도 우리의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 혹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 우리의 고난 등 고난이 없다.

 

- 마이클 호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pp 125-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