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마이클호튼

도덕주의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변두리로 몰아낸다/ 마이클 호튼

새벽지기1 2018. 2. 27. 07:55


스티브 초크는 대리 형벌이 “하나님의 아동 학대”라고 말한다. 맥클라렌은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전래적인 견해’를 한껏 희화화한 후에, 그의 대안적인 ‘새롭게 떠오는 견해’를 제시한다. “하나님은 은혜롭게 모든 이, 자신의 길을 돌려서 새로운 길을 따르는 그 누구라도 초대하신다. 이것이 좋은 소식이다.” “예수가 인간의 역사 안으로 결코 사그라지지 않을 은혜, 진리 그리고 희망의 씨앗을 심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희망과 진리를 발견하는 모든 이들을 개인적이고 전 지구적인 변혁과 악과 불의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그리스도의 계속 되는 일에 동참하는 영예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 견해가 놓치고 있는 것은 과거에 우리를 위한, 우리와는 상관 없는, 우리 밖에서 일어난 그리스도 단번의 영원한 사역, 그리고 영광 가운데 돌아오실 때만이 이루실 수 있는 사역의 유일무이성이다. 예수와 그의 공동체, 그의 사역과 우리의 일은 하나의 구원하는 사건으로 합쳐진다. 이 떠오르는 종교적인 좌파는 예수를 국가적이고 전 지구적인 구속이라는 우리 자신의 프로그램들을 대표하는 하나의 마스코트로 끌어들이는 데에 아주 능숙한 듯 보인다.

 

오스틴은 구원을 전적으로 지금 여기서의 형통이라 말하는 반면 맥클라렌은 주로 지금 여기에서의 평화와 정의라고 말한다. 두 경우 모두에서 이 구원을 가져오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복음은 그리스도가 죽음, 정죄 그리고 죄의 폭정을 종식시켰고, 장차 영광과 권세 가운데 다시 오셔서 먼저 심판하신 후 이어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는 하늘의 선언과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선교와 사역의 초점이 자신의 왕국을 가져왔고, 가져오고 있으며, 우리와 우리의 청자들을 자신의 복음을 통해 자기 왕국으로 데려가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살아 있는 왕국(kingdom living)에 맞춰질 때, 최소한 실천의 차원에서는 모범인 그리스도가 구세주인 그리스도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체할 수 있다.

 

말과 행동이 달라 복음을 욕되게 사는 것은 참으로 비극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는 훌륭했지만, 노예 제도, 인종차별주의, 물질 만능주의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지 않는 이런저런 생활방식을 잔뜩 가지고 있었던 기독교인들은 언제나 있어 왔다. 젊은 복음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헌신을 말하면서도, 소비주의, 탐심, 군사주의 깊이 빠져 있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청지기로서 무관심한 태도 등을 보이는 운동의 모순과 위선에 상당히 민감하다. 킴벌은 마하트마 간디를 인용함으로써 정곡을 찌른다. “나는 당신들의 그리스도를 좋아한다. 그러나 당신들 기독교인은 좋아하지 않는다. 당신들 기독교인들은 당신들의 그리스도와는 다르다”. “기독교인들은 좀 모자라고, 생각이 없으며, 심지어는 사교 집단에 빠진 사람들처럼 보인다. 사회악을 일소하겠다며 성난 운동을 벌이고 사람들이 자신들의 견해에 동조하도록 돌려놓는다. 그런데도 목사 혹은 사제가 성범죄로 대중이 지켜보는 앞에서 체포된다.”

 

율법과 복음을 온당하게 선포하는 것만이 모든 자기 의를 진정시키는 바른 해독제가 된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성적 부도덕, 위선, 분쟁 그리고 교만 등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편지를 써야 했을 때, 복음을 완전히 다시 선포함으로써 포문을 열었다. 교회가 특정한 윤리 문제로 혼란을 겪고 있다면, 복음 메시지를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일 수 있다고 전제한다. 다시금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를 전파하고 나서야,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고상한 부르심에 맞게 살라는 실천적인 권면으로 들어가곤 한다.

 

어느 경우든, 도덕주의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변두리로 몰아내는 것은 마찬가지다. 우파, 좌파 그리스도 중도를 가릴 것 없이 우리는 전적으로 궤도를 이탈했다. 아무리 좋은 모범과 교훈이라 하더라도, 설령 그것이 최고의 교리라 할지라도 그것들은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도 내 안에 거하는 죄와의 싸움에서 나를 건재 내지 못한다. 내가 예수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내가 기독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를 데려가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기에 기독교인이다. 나는 복음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복음이다.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나를 의롭다 할 뿐 아니라 나를 자신의 부활 생명 안으로 세례 주심으로 나를 구한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감(성화)은 자아에 대해 죽고(죽임) 하나님에 대해 살아나는(살림) 과정이다. 이 일들은 그리스도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복음 이야기에 정기적으로 잠길 때에 나오는 결과다. 달리 말하면 탈출(아담과 죄 그리고 죽음의 통치로부터)과 정착(그리스도 안으로)이다. 내 삶이 복음이 아니라는 말은 나와 내 이웃에게 좋은 소식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파한다. 성경이 펼치고 있는 신비로서 그리스도에 대해 더 말할수록, 그리스도 우리 자신의 변혁에 대해 덜 말할수록, 우리는 자기 의에 빠지거나 절망에 빠지지 않고 실제로 변혁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기질에 반하면 반할수록, 복음은 의롭다 함과 거룩함을 주는 하나님의 구원 능력이다. 믿음의 열매는 실제적이다. 그것은 행위에서 나오는 의의 열매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의 ‘변화된 삶’에 목을 맬 때 위선이 고개를 든다. 보수주의건 자유주의건 가릴 것 없이, 교리가 아니라 행위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있다. 사람들은 실생활에서 교리는 하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이제 우리는 거룩한 행동으로 미국과 세계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학교, 교단 본부 가릴 것 없이 이런 말들을 하고 있다.

 

대립관계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자유주의는 실제로 경건주의에서 나왔으며 특히 미국에서 개신교 현대주의는 부분적으로 부흥주의에서 나왔다. 메이첸의 말이다. “자유주의와 기독교 사이에 가장 근원적인 차이가 발견된다. 자유주의는 전적으로 명령법이다. 반면 기독교는 승리의 분위기가 나는 서술법으로 시작한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의지에 호소하고, 기독교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을 선언한다. 자유주의는 그리스도를 모범과 길잡이로 간주하나 기독교는 신앙의 대상으로 여긴다.”. 자유주의는 종교적인 경험을 토대로 움직이지만, 기독교는 우리 밖에서 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한다. 모든 세대에 걸쳐 내면적인 생활, 경건, 공동체 그리스도 행동의 결단 등 우리 자신에게로 다시 초점을 두려는 자연스러운 경향은 사랑과 봉사를 낳는 믿음의 뿌리 자체를 시들어 버리게 한다. 한 프로그램에 시들해지면, 언제나 또 다른 베스트 셀러, 운동 혹은 계획이 코앞에 기다리고 있다.

 

- 마이클 호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pp 153-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