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마이클호튼

영지주의, 오리겐, 범신론/ 마이클 호튼

새벽지기1 2018. 3. 6. 07:41


창조주와 피조물의 혼동은 일반적으로 이방 종교의 특징이지만 그리스 철학의 지평을 형성했다. 2세기에는 기본적으로 그리스 철학의 틀 안에서 성경의 이야기를 재해석하려는 비교(秘敎)적인 유대인 및 기독교인 집단 안에서 한 운동이 일어났다. 영지주의로 알려진 이 이단은 결정적으로 리용의 주교 이레나이우스(115-202년)에게 도전을 받았다.

 

선한 창조, 언약 위반으로 인한 죄로의 타락, 그리스도의 성육신하신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속이라는 성경의 이야기와는 대조적으로 영지주의자들은 내적 깨달음(그노시스)을 통한 악한 창조 세계로부터의 구속을 추구했다.

 

구약에 표현된 창조의 하나님(여호와)은 신적인 영혼을 몸 안에 가두어 둔 악한 신이 되는 반면 에덴동산의 뱀은 내적인 깨달음을 통해 아담과 하와를 해방시키려 했다. 영지주의 ‘복음서’에 계시된 구속의 하나님(그리스도)은 역사 속에서의 육체적 감금으로부터 신적인 운명을 향해 나아가는 초보자들을 이끌어 가는 일종의 화신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185-254)는 영지주의자들과는 거리를 두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교리를 근본적으로 플라톤주의적인 체계에 동화시키려 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한 세기 전에 대단히 성공적으로 유대교적 플라톤주의의 체계를 발전시킨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을 따랐다.

 

오리게네스는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성경의 교리를 배격하고 그리스도의 육신적 성육신과 승천과 재림 속에서의 육체적 구체화라는 실재를 경시했다. 그는 또 사탄과 타락한 천사들을 포함한 모든 영적 실체의 재생과 최종적 회복도 가르쳤다.

 

이런 억측들에 대해서 오리게네스는 훗날 동방 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되었지만 오리게네스의 플라톤주의적인 기독교는 특히 수도원 운동 속에서 강력하게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서구 기독교 역사 속에서는 일부 신비주의자들 가운데 범신론적인 방향으로 움직이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 한 가지 예는 14세기의 에크하르트인데 그는 한 독특한 설교문에서 이렇게 쎴다. “내면으로 돌아선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내적인 신성을 갖는다---하나님만큼 지성에 알맞거나 현존하며 가까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성주의와 신비주의의 관련성은 플라톤주의 자체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이런 외부/내부의 이원론은 수피교 이슬람과 유대교 신비주의뿐만 아니라 중세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의 많은 급진적인 신비주의의 특징을 이루었다.

 

이런 흐름은 제세례파에서부터 초기 계몽주의까지 급진적 개신교 안에서 지속되었다. 이 점은 특히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분명히 나타나는데 스피노자의 철학은 독일 낭만주의와 미국의 초절주의(19세기 미국 뉴잉글랜드의 작가와 철학자들이 벌인 운동, 모든 피조물이 본질상 하나이고, 인간은 본래 선하며, 가장 심오한 진리를 밝히는 데는 논리나 경험보다는 통찰력이 더 낫다는 믿음에 기초한 관념론 사상체계)에서 부활했다. 그 영향력은 신학적 자유주의와 특히 오늘날 뉴 에이지 영성 및 새로운 이교적 영성의 지배적인 형태 속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범신론적 세계관은 (예컨대 영혼과 물질 사이의) 그 이원론 안에서조차 궁극적으로는 일원론적이다. 다시 말해 모든 실재는 궁극적으로는 하나다. 최종적으로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는 아무런 구별이 없다.

 

존재의 사다리 위에서 몸은 영혼보다 낮을지도 모르지만 모든 실재는 그것이 되돌아가는 단 하나의 실재에서부터 유출된다. 존재의 위계질서에도 불구하고 모든 차이- 심지어 하나님과 창조 세계 사이의 차이-는 점차적으로 상실된다.

 

어떤 이들은 범신론(모든 것은 신적이다)을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믿음(유신론)과 혼합하려 했다. 종종 만유재신론(하나님 안의 모든 것)으로 지칭되는 이러한 관점에서는 하나님과 세상은 상호 의존하며 존재하지만 ‘하나님’ 또는 신적인 원리는 세상을 초월한다고 믿는다.

 

명시적인 의존의 정도는 다양하지만 만유재신론은 과정신학의 실제적 존재론이자 테야르 드 샤르댕,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위르겐 몰트만 등 특히 신학과 과학철학의 교차점에서 신학을 하는 이들의 신학이다. 일부 만유재신론들은 세상을 하나님의 몸으로 상상한다.

 

- 마이클 호튼, 『개혁주의 조직신학(언약의 관점에서 본)』, pp 4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