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마이클호튼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 하나님의 불가해한 위엄/ 마이클 호튼

새벽지기1 2018. 3. 15. 07:59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은 1518년 마르틴 루터의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부터 시작해서,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을 대조했다. 우리는 실재의 주인으로서 하나님의 원형적인 위엄을 보려 애쓰는 대신 신실하지 못한 종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이 자신의 방식으로 심판과 은혜 속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한다.

 

십자가의 신학은 하나님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은혜로 육신을 입고 죄인들에게 내려오심을 선포하지만, 영광의 신학은 육신에서부터 신비주의, 공로, 철학적 사변을 통한 하나님과의 합일로 올라가려는 인간의 시도를 표현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라고 권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 베푸시기로 약속하신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라고 권면하신다.

 

하나님의 위엄은 길조가 아니다.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을 직접 ‘지복 직관’하는 것은 천국이라기보다는 지옥, 은혜라기보다는 심판을 엿보는 것에 더 가까울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간구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를 바위 뒤에 숨겨 놓으시고 자신의 ‘뒷모습’, 즉 자신의 선하심과 은혜만 보여 주셨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33:20).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위엄 있는 영광에 대한 계시가 전부다. 그러나 우리의 타락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의는 우리를 정죄할 수만 있을 뿐이다. 복음 안에서만 죄인들에게 나타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의의 선물이 있으므로 죄인들이 소멸되지 않고 하나님의 존전에 설 수 있다. 이것이 로마서 3장에 나타난 바울의 논증의 요지다.

 

우리는 하나님이 비천한 구유 안과 십자가 위와 일상적인 인간 언어의 저열함 가운데 우리에게 내려오신 곳에서 하나님의 계시와 구속을 받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아는 것은 모든 시대의 신비주의자들과 그 밖의 광신자들의 친숙한 후렴구였지만 하나님의 불가해한 위엄은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기보다는 우리를 심판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존재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중보자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칼빈은 이렇게 설명했다. “여러 학파에서 믿음을 논의할 때 하나님을 한마디로 믿음의 대상이라고 부르고 허망한 사색을 늘어 놓으면서--- 비참한 영혼들을 확실한 목표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곁길로 인도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므로(딤전6:16)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보자가 되셔야 하기 때문이다. --믿음이 한 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히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17:3)도 덧붙여야 한다.”

 

영광의 신학은 감히 하나님의 천상의 방 벽을 기어오르지만, 십자가의 신학은 언제나 우리가 하나님께 닿을 수는 없으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닿으실 수 있고, 선포되고 기록된 말씀 속에서 실제로 그렇게 하셨으며, 그 말씀 속에 성육신하신 말씀 하나님이 마치 강보에 싸인 것처럼 싸여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것이다.

 

프란키스쿠스 투레티누스는 ‘하나님’을 신학의 대상으로 다루는 것은 형이상학이 한 대상으로서의 하나님께 접근하는 방식과는 매우 다르며 다른 학문에서 ‘대상’을 다루는 방식과도 다르다고 말했다. 이는 하나님이 다른 학문의 대상들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최소한 구원 얻는 방식으로 ) 알려면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용어로 자신을 계시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이런 접근 방법은 한편으로는 이성주의와 대립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칸트 이후의 도덕주의와 대립된다.

 

아무도 하나님을 찾지 않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신다. 우리의 유한함과 죄악성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가 화해하려면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자신을 낮추시는 형태의 계시가 필요하다. 가장 높은 지혜와 지식은 순수한 사고의 비전을 잡고 쥐고 그 위에 오르고 장악하는 데서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환영하고 그리로 내려가는 데서 발견된다. 따라서 복음은 그 내용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그 형식에 있어서도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다(고전1:23).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지 하나님의 숨겨진 본질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를 구별하는 것이 동방 신학의 전통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를 따르는 서방 신학은 이런 구별을 인식하지 못했고 우리가 현재 하나님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의 육체적 형상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동방 교회는 플라톤주의의 영향에 서방 교회 만큼이나 취약했지만 동방 교회의 본질과 에너지의 구별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를 더 충분히 고려했고 종종 서방 신비주의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범신론적 경향을 경계했다.

 

이런 측면에서 종교개혁자들은 (본질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불가해성과 (에너지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자기 계시적인 낮아지심에 대한 동방 교회의 강조를 반영한다. 우리는 태양빛을 받아 따스함을 느낄 때만 태양을 아는 것처럼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활동 속에서만 하나님을 안다.

 

복음은 지적, 신비적, 도덕적 노력을 통한 하늘의 정복을 권장하지 않는다. 복음은 우리가 원수 되었을 바로 그때에 하나님이 우리와 화해하셨다고 선포한다(롬5:10). 우리는 죄로 죽어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살아나게 하셨다(엡2:5).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선한 일이 아닌 하나님의 선한 일로 인해 구원받았다(엡2:8-9).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파괴적이고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소외를 극복하는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그 아들의 복음을 전하심으로써 불화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이다.

 

복음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서 떠나 지혜로 위장된 어리석음과 미덕으로 위장된 불경건의 옷을 입게 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에 대한 윤리적 반란이다. 우리를 송영으로 이끄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존재론적 위엄과 소외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이 불가사의한 기이함이다.(롬11:33-36)

 

- 마이크 호튼, 『개혁주의 조직신학』, pp 54-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