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마이클호튼

기독교는 더 나은 삶, 더 나은 자기를 위한 자기 개선 방법론이 아니다/ 마이클 호튼

새벽지기1 2018. 2. 26. 07:13


기독교를 좋은 조언으로 축소시키면 인생 코칭 문화에 딱 들어 맞는다. 기독교는 도덕주의적 치료법 시장에서 실종되고 만다. 기독교를 개인적인 개선의 최고 방법론으로 간증할 때, 비신자들은 “무슨 권한으로 기독교가 행복, 의미, 도덕적 향상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정당하게 따질 수 있다. 예수는 더 나은 삶으로 향하는, 아니면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은 분명 아니다. 사람은 예수 없이도 체중을 줄이고, 결혼생활을 개선하고, 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다.

 

기독교를 구별시켜 주는 핵심은 기독교의 도덕적인 계율이 아니라 기독교의 이야기다. 즉 자기 형상으로 창조한 자들에 의해 거절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자기 아들을 통해 자기와 화해하도록 스스로 낮아지신 창조주의 이야기다. 기독교는 개인이 하늘로 올라가는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육신, 속죄, 부활, 승천 그리고 다시 오심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것이 지닌 풍성한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 복음 즉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과 화해시켰다는 좋은 소식이 있다.

 

진짜 능력과 지혜는 승리하는 삶을 위한 원리들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승리를 선언함에서 발견된다. 사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를 보여주지 않으신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다.” 개신교 자유주의의 면전에서 메이첸이 외친 경고다.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권면이 아니라 복음이다. 나를 구원할 수 있는 방향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구원하셨는가를 아는 지식이다. 당신에게 복음이 있는가? 나는 이것을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이 주는 권면은 나를 도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구원하기 위해 어떤 일이 행해졌다면, 그 사실을 내게 말해 주지 않겠는가?”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기 위해서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옷을 벗어 버려야 한다. 그래야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다. 문제는 오늘날 사역의 목표가 우리의 무화과 나뭇잎 옷을 찢어버리고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인가 아니면 나뭇잎을 몇 장 더 얹는가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중심 메시지는 세계관, 처세 방법 혹은 개인과 사회 개혁 프로그램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이다. “좋은 소식”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전형적으로 승전보로 쓰였다. 이런 배경에서, 복음은 전장에서 닿은 특별한 전령이 전한 보고이다. 신약이 사도의 직분을 선포자와 복음 전도자로 기술하고, 목사를 전령, 대사 그리스도 증인으로 묘사한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이들의 임무는 그 이야기를 바로 파악하고 그 다음에 보고하는 것이다. 이 메시지가 말(설교)과 행동(성례전)으로 말미암아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그 결과물이, 이 지나가는 악한 세대 한가운데에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대사관인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능하신 구속 행동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과 함께 한다.

 

이 사명을 잊고 다른 데 신경을 쓸 때, 우리 자신을 위대한 왕의 대사, 우리를 위해 누군가가 이미 성취해 준 일의 증인이 아니라, 쇼의 스타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 소식을 보도하는 대신 소식이 된다. 사실 오늘날 우리는 마치 우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두신 승리에 보조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처럼, 기독교인들이 “복음을 산다” 그리고 “복음이 된다”고 하는 말을 자주 듣는다. 대사, 전령, 기자 그리고 증인 대신, 목사들은 경영인, 관리자, 코치, 심리치료가, 마케팅 대가 그리고 의사소통 전문가가 되고 있다.

 

이런 변화에 맞춰서 초점은 필시 우리가 하는 일로 옮겨 가고, 예수의 모범은 하나의 사례로 축소되고 만다. 좋은 조언을 제시하는 책들과 설교들은 이 좋은 소식을 제시하는 쪽보다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이 무엇인지 찾는 쪽으로 더 기울어진다. 기독교 서점에 나가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책들의 숫자와 “기독교” 자기계발류의 책들이 있는 서가를 비교해 보라. 오늘날 우리가 하는 사역의 상당 부분이 “예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가 아니라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에 강조를 둔 복음 없는 율법, 소식 없는 권면, 선언 없는 지침, 교리 없는 행위이다.

 

율법과 복음이 각각 단순히 십계명과 요한복음 3:16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도덕적 기대를 보여 주는 성경의 모든 것이 율법이고,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목적과 행동을 보여 주는 모든 것이 복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알아야 깨끗해질 수 있고, 우리의 죄를 인정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에게로 도피할 수 있다. 또한 그래야만 이것들이 우리를 감하가 넘치는 순종으로 이끌어 줄 수 있다. 무엇을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율법(행위들)에 부응하고 있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믿는 것에 대해서라면 복음(믿음)에 부으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을 얻는 수단으로 착각함으로써,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을 거슬리는 가장 공격적인 죄고 되고 만다. 그러나 오직 믿음만으로 이 선물을 받을 때, 믿음은 즉시 의의 열매를 생산해 내기 시작한다. 심지어는 좋은, 거룩한 그리스도 적절한 것들조차 복음과 섞여 버릴 때는,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즉 끝없이 펼쳐지는 드라마 안으로 우리를 끌어들이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현안들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실지에 대해 말해 주는 성경 구절이 단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그토록 중요하다고 명백하게 선언하고 다루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모호한 태도(겸손한 척 하면서)를 취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이런 문제들에 대해 예레미야처럼 울분을 토하는 것을 우리는 흔하게 대한다.

 

산상수훈이 사랑이라는 일반 윤리로 축소되고 교리가 뒷전으로 밀려나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그리스도는 심지어 다른 종교의 추종자들이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는 단순한 모범이 된다. 이것은 교리가 아니라 행위다. 그리스도를 믿는 명백한 믿음이 있든 없든 예수를 좇는 것이 가능하다. 칸트가 만든 대조 즉 교회적 신앙(교리)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순수한 종교(도덕성)로 기울어진다. 시대정신으로 향하는 마차를 잡아타고 나면, 이런저런 형태의 문화 기독교, 달리 말해서 우리의 타고난 펠라기우스주의를 향해 달려가게 된다.

 


- 마이클 호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pp 139-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