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권인목사

반려동물에 대한 견해

새벽지기1 2018. 1. 25. 12:16


샬롬! 찬미예수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1,000만 명을 넘어섰고, 관련 시장 규모가 3조원을 돌파한다고 한다.

아이는 안 낳아도 개는 키우는 시대가 됐다.

말 그대로 '개 팔자 상팔자란 말이 장난이 아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문제로 이혼하는 부부도 생겨나고 있고,

반려동물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는 사례도 있다.

반려동물에 대한 문제가 이제는 즐거움과 취미를 넘어 사육하는 동물이 아닌 반려자(친구),

가족의 일원으로 대우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는 증거다.  


동물들도 구원 받을 수 있는가?

 

언젠가 동료 목사들과 동물의 구원에 대한 문제와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느냐

혼만 있느냐의 문제에 대한 격렬한 토론이 있었다.

또한 구원 문제를 언급할 때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구원에만 천착되어 협소하고 빈약한 인간의 구원 외에,

모든 피조물들의 회복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만물이 통일되게 하려하심()이라는 풍성한 우주적 구원론에 대한

통찰력이 부재한 사람들에게 받게 된 오해와 편견 때문에 자유롭지 못했던 경우도 있다.

이에 대한 결론적인 답을 구하자면 성경이 동물 구원이 중심주제는 아니지만 한마디로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 곤충들, 생물들, 동식물들, 초목들이 최종적으로 인간의 구원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려견의 내세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사실 성경은 구체적인 충분한 자료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

너무나 정들었던 반려동물을 잃은 성도를 위로해야 하는 필요성과 성경적 지혜를 얻어 어떤 입장이든 취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독특한 구원의 차원과 부활을 다루듯 이 문제를 접근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인간은 피조물의 주인이 아니고 청지기일 뿐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는 말은 성경적인 통찰이다.

그러나 지구에는 인간만 살지 않는다. 조물주는 인간에게 만물의 생살여탈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조물주가 만물을 '다스리라'고 하신 말씀은 인간과 자연만물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사랑으로 보살펴

그 생명체의 습성대로 살도록 돕고 공생하라는 것이지, 인간의 탐욕에 의한 파괴와 군림을 허락하는 말씀이 아니다.

동물 역시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요 언약의 약속 안에 있는 존재이다.

하나님은 사람뿐 아니라 수많은 가축이 있는 니느웨 성을 불쌍히 여기셨다(4:11).

사도 바울은 사람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이 허무함의 종살이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 위해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중에 있다고 했다(8:18-22).

 

창조는 종말론적 구원을 지향한다.


태초에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모든 피조물을 위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것이며

(65:17, 21:1), 아담의 죄로 인해 파괴된 인간과 동물 간에도 평화가 다시 회복될 것이다(65:25).

그 때까지 인간은 다스림의 위치에서 소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 다스림은 군림이 아니다.

인도의 신학자요 생태학자인 켄 그나나칸(Ken Gnanakan)은 이 '다스림' 안에는 사랑, 상호 연결, 지속 가능한 창조성,

다른 이들을 위한 배려, 종으로서의 섬김, 청지기, 하나님의 창조물에 대한 존경심, 정의라는

8가지 요소가 들어있다고 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C.S. 루이스의 입장이 언급되고 있다.

루이스의 입장은 동물을 포함한 피조물의 고통이 인간의 타락이 아닌 천사의 타락에서 비롯된 것처럼 말하며,

인간의 문화사명을 "동물 세계의 평화 유지"로 축소 해석하고 있는데,

만일 천사의 타락으로 동물들에게 아픔과 고통이 찾아왔다면 하나님께서는 불완전한 세상 가운데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되며,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한 말씀은

부적절한 표현에 불과하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동물들을 포함한 세상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까지 완벽하고 아름다웠는데,

그것의 고통은 인간의 죄로 인해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죄로 인해 유기적인 관계에 있는 동물들도 함께 고통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인간과 동물의 유기적인 관계는 하나님께서 노아 가족을 구원하실 때 동물들도 포함시켰고

노아와의 언약에도 동물들이 포함되었음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유기적인 관계는 부활할 가능성과 인간의 구원의 차원과 같은

독특한 구원의 문제까지 언급하는 것은 그리 적절하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를 믿으면 "너와 네 가족이 구원받으리라"고 했지,

"너와 네 가족과 네 반려견이 구원받으리라"고 하지 않으셨음이 분명하다.

물론 하나님께서 애굽 인들과 애굽의 가축들에게 재앙을 내리신 반면에,

이스라엘과 그들의 가축들에게는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는 출애굽기의 말씀이 있고

니느웨의 백성들이 회개할 때 동물들도 구별되었다는 말은 있지만

여기서부터 신자의 반려견이 신자와 함께 구원된다는 논리의 도출은 억지 해석에 불과할 것이다.

 

물론 이미 밝힌바와 같이 동물의 부활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도래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동물들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동물들을 다 죽이시고 새롭게 창조하신 동물들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을 밝힘에 있어서 동물들이 흙으로 돌아가고 그 후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말하는

C.S. 루이스의 입장으로는 불충분한 것 같다.

창조, 타락, 구속, 회복의 도식을 제시하고 있는 개혁신학의 입장도 충분히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새 창조보다는 피조세계의 회복을 말한다.

왜냐하면 로마서 8:21에 의하면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른다고 했기 때문이다.


동물들과 관련한 예배의 문제, 장례의 문제


예배의 목적은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를 표현하는 일체의 행위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지정의를 가지고 있고, 관계 지향적이고,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동물은 영혼이 있지만 애완견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인간처럼 하나님과 교제할 수도,

찬양할 수도, 죄를 회개할 수도 없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수도 없다.

더더욱 동물을 위한 예배는 상상할 수도 없는 비성경적인 구상이다  

또한 개나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으므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의미에서도

애완동물이 교회당에 출입하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물론 시각장애인을 위한 안내견은 또 다른 차원의 상식적인 이야기가 될 것이다.


정장복 교수는 "신학적으로 예배는 찬양과 기도, 신앙고백과 말씀 경청, 축도로 이어지는

제반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포함한다." 면서 "이 모든 예배행위에 참여할 수 없는 동물이

예배행위에 참여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동물신학을 연구하는 장윤재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는

"하나님은 창세기 1장에서 피조물 모두에게 복을 빌어주셨고, 동물도 엄연히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이라며

"사람에게 '인권'이 있다면 동물에게는 '동물권'이 있다.

별도의 공간에서 동물들을 위한 예배를 구상해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적으로 현실 속에서는 이러한 사안이 생각보다 심각하게 대두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반려 동물의 죽음과 관련한 장례예식은 여러 가지 신학적인 이유로 타당하지 않다.

단지 죽은 동물을 그리워하고 추모하는 주인을 위로하는 기도 정도는 할 수 있다할지라도

그 이상은 너무 나간 이야기가 되고 하나님을 믿는 정상적인 성도라면 결코 합당한 생각이라 할 수 없다.

하기야 최권능 목사는 죽은 송아지를 붙잡고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삼일 간 기도하여 살려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고, 목회적 상황에서 시골 농부의 전 재산과 같은 가축들이 죽거나 병들었을 때  

손을 얹고 기도한다고 해서 너무 고급한 신학적 잣대로 들이댈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정도다

아무튼 반려동물의 주변 이야기가 여기까지 진화하는 상황이 아직은 당혹스럽기만 하다.  


신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