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마이클호튼

인간의 왕국이 종교적인 열정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도달한 적은 없다/ 마이클 호튼

새벽지기1 2017. 12. 22. 07:01


세기의 전환기에, 화란의 정치가이며 신학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소위 영역 주권론(sphere sovereignty)을 주장했다. 수상으로 일하고 있었던 카이퍼는 예술과 교육과 과학(학문)과 교회와 가족과 같은 각각의 삶의 영역들이 그 자체의 고유한 성격과 사명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의 목적은 이 각각의 ‘영역’ 이 하나님이 정해 주신 각자의 기능을 성취할 수 있도록 그 영역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학교까지도 공무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정들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학부모-교사 회의만이 아니라 부모들이 모든 수준에 참여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부보다는 가정이 그런 문제들에 대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다수의 ‘영역들’에 대해 정당한 균형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까닭은 부분적으로 우리가 전반적으로 정치가들에게, 특정하게는 대통령에게 부여해 준 권력 탓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대통령을 너무 사랑하고 동시에 너무 미워한다. 우리는 우상을 만들어 놓고서 그다음에 그 우상을 때려부수기를 좋아한다.

 

우리, 특히 크리스천인 우리는 큰 정부에 대해 불평하면서 대통령직을 과대평가하는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대통령은 기본적인 국내 정치의 목표와 우선 순위를 정하고, 다음 세기의 관료들을 임명하며, 외교 정책상의 목적들을 정하고 4년 동안 연설을 행하기 위해 그 자리에 있는 것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이런 것들이 결코 중요치 않은 임무는 아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궁극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임무는 아니다. 이들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지금껏 복음주의자들이 과장해 왔던 것이다.

 

카이퍼는 기독교가 특히 기독교에 대한 칼빈주의적인 표현이 세계관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자유와 정의와 시민적 선을 위한 세력으로서 자신을 입증해 왔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퍼 자신은 인간의 왕국이 세속적인 ‘진보’나 종교적이며 도덕적인 열정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도달한 적이 있었다는 환상을 결코 가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일반 은혜를 통해 이 세상 가운데 있는 악을 억제하시는데, 이런 일반 은혜에도 불구하고, 이 두 도성 사이의 ‘반립적 관계(antithesis)’는 언제나 그 둘 사이의 융합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의 타락의 운동을 억제할 수 있는 새로운 렌즈를 제공할 수는 있지만, 이런 것이 ‘하나님 나라’ 활동은 아니다. 그런 활동은 단순히 그 사회가 최악으로 되지 않도록 하나님의 제재를 통해 그 사회를 보존하는 것일 뿐이다. 이런 안목은 인간은 선하기 때문에 선한 사회적 구조만 있으면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현대적 이단설을 너무 쉽게 수용하고 있는 이 때에 우리가 깨달아야 할 중요한 안목이다. 정치에서의 한 사람의 크리스천의 소명은 어떤 기독교적인 사회를 창조해 내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악을 억제하는 데 도움을 주려는 것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와 같은 부르심의 중요성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불의와 악을 억제한다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회적이며 도덕적이며 정치적인 활동으로도 한 사회가 영적으로 다시금 바르게 형성될 수는 없다.

 

-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 된 교회』, pp 130-133

(청교도의 길)